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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김효로 묘갈명(번역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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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식 작성일07-01-20 22:58 조회1,329회 댓글3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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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전 : 예안파 초전 문중 홈페이지[http://myhome.naver.com/kksga]

 

증(贈)가선대부(嘉善大夫)이조참판(吏曹參判)겸(兼)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김효로(金孝盧)묘갈명(墓碣銘)

공(公)의 휘(諱)는 효로(孝盧)요 자(字)는 순경(舜卿)이니 광산인(光山人)으로 고려(高麗)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 광존(光存)의 후손(後孫)인데 지성공(知省公) 이하로 대대로 현달(顯達)하였다. 조(祖)의 휘(諱)는 숭지(崇之)니 목청전(穆淸殿) 직(直)으로 사복시정(司僕寺正)을 추증(追贈) 받았고, 고(考)의 휘(諱)는 회(淮)니 음성현감(陰城縣監)으로 병조참의(兵曹參議)를 추증 받았다. 공(公)이 어려서 부모를 여의자 외조(外祖) 경산현령(慶山縣令) 노응(盧膺)에게서 자랐으므로 이름을 효로(孝盧)라 하였고, 그 후로는 종조부(從祖父) 효지(孝之)에게서 양육을 받아서 예안현(禮安縣) 오천(烏川) 마을에서 살았다. 경자(庚子, 1480)에 생원시(生員試)에 입격한 후로는 과거(科擧)를 일삼지 않고 시골에 살면서 청렴결백으로 스스로를 지키면서 사람들 더불어 사귀되 구차(苟且)하지 않았으며, 상대방의 결점(缺點)을 보고서도 심하게는 꾸짖지는 않았다. 제사를 받들되 성경(誠敬)을 다하고 자손을 가르치되 효제(孝悌)를 강조하였다. 가업(家業)은 겨우 구차함을 면할 뿐이고, 넉넉하여 넘치는 것을 구하지 아니하였고, 친구가 찾아오면 반갑게 맞이하고 말할 때에는 반드시 적선(積善)한 다음에야 남은 경사(慶事)가 있다는 말로써 권면(勸勉)하였다. 일찍이 공(公)의 조행(操行)이 탁이(卓異)하였으므로 향천(鄕薦)을 받아 장차 현달(顯達)하게 되었을 터인데 마침내 이루지 못하였으니 애석하도다. 공(公)이 경태(景泰) 갑술(甲戌, 단종 2년, 1454)년 11월에 태어나서 중종가정(嘉靖) 갑오(甲午, 중종 29년, 1534) 12월에 하세하니 누린 바 수(壽) 81년이었으며, 이듬해 9월에 고을 서쪽 지례촌(地禮村)에 안장(安葬)하니 고려(高麗) 시종(侍中) 김공(金公) 방경(方慶)의 묘(墓)와 동원(同原)이었는데 공(公)은 곧 시중공(侍中公)의 7대(七代) 외손(外孫-증참판공 5대조 章榮公 휘 진(稹)께서 시중공 金方慶의 외손자임)이다. 임인(壬寅, 1542)에 공의 아들 연(緣)이 귀(貴)하게 됨으로써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조참판(吏曹參判) 겸(兼)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를 추증 받았다. 공(公)이 양성이씨(陽城李氏) 군수(郡守) 지(持)의 딸을 맞이하니 바로 숭정대부(崇政大夫)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순지(純之)의 손녀(孫女)였다. 두 아들을 낳았는데 장자(長子)는 연(緣)이니 기묘(己卯, 1519)에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벼슬이 가선대부(嘉善大夫)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 겸(兼) 병마수군절도사(兵馬水軍節度使)에 이르렀고, 차자(次子)는 유(綏)로 을유(乙酉, 1525)에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으며, 두 딸은 용궁현감(龍宮縣監) 김우(金雨) 훈도(訓導) 금재(琴梓)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관찰공(觀察公)은 창녕조씨(昌寧曹氏)를 맞이하여 이남(二男)을 두어 부필(富弼)과 부의(富儀)인데 모두 생원(生員)이요, 삼녀(三女)는 현감(縣監) 김난종(金蘭宗) 참봉(參奉) 이용(李容) 생원(生員) 박사눌(朴思訥)에게 각각 출가하였고, 생원(生員)은 순천김씨(順天金氏)를 맞아 삼남(三男)을 두었는데, 부인(富仁)은 기유(己酉)에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해주판관(海州判官)이 되었고, 다음은 부신(富信)이요 부륜(富倫)은 생원이요 일녀(一女)는 이빙(李憑)에게 출가하였다. 현감의 오남(五男은 부춘(富春), 수춘(壽春), 귀춘(貴春), 낙춘(樂春),말춘(末春)이요, 일녀(一女)는 안희빈(安喜賓)에게 출가하였으며, 훈도(訓導)의 이남(二男)은 생원(生員) 응협(應夾) 응훈(應壎)이요 이녀(二女)는 참봉(參奉) 이빙(李憑), 이치(李寘)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무신(戊申, 1548) 4월에 정부인(貞夫人) 이씨(李氏)가 돌아가니 수(壽)가 91세요 그해 12월에 공(公)의 묘좌(墓左)에 부장(祔葬)하였다. 아! 공(公)과 부인(夫人)이 다 같이 상수(上壽)하였고, 공의 자손들이 번창하고 준수하여 아름다움을 이어 꽃다운 향기가 연(聯)하여 그 집을 빛나게 하는 이가 계속 태어나므로 먼저 적선한 뒤에 경사가 따른다는 그 말을 지금에 더욱 증험할 수 있게 되노니 세상에 착한 일을 하는 자 또한 그 권하는 바를 알 수 있도다. 명(銘)하여 가로되, 선비가 몸을 닦음이 반드시 세상에 쓰이려 함만은 아니리라. 오직 몸가짐이 개제(愷悌)하니 복록(福祿)의 터전일세. 저 아름다운 임천(林泉)에 공(公)이 은거(隱居)하였음에, 많고 많은 자손들이 그 유서(遺緖)를 이었도다.  누가 하늘이 정한 이치(理致) 여기에 있지 않다 하리요, 세상 여러 집안 사람들 이 글 한번 살펴보소.    


통정대부(通政大夫)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지제교(知制敎)이황(李滉)찬(撰)

 

댓글목록

김항용님의 댓글

profile_image 김항용
작성일

  김효로 묘갈명의 제작년도가 궁금합니다. 이유는 충렬공 묘소와 동원에 묘소를 썼다는 기록 때문입니다. 충렬공 묘소 발견시기를 판단하는데 중요한 단서가 될 수도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인 추론으로 상기 김효로의 묘소 설치, 충렬공의 묘비(예생 건립) 훼손 및 충렬공 묘소 발견, 충렬공 묘지석 발견 등이 결코 무관하지 않다고 봅니다.
그래서 묘갈명 건립시기는 꼭 알아내야 합니다.

김윤식님의 댓글

profile_image 김윤식
작성일

  그렇잖아도 퇴계 선생이 묘갈명을 쓴 시기를 파악하고 있던 중입니다.
개미실 대부님께서 궁구하신 것처럼 충렬공 할아버지 묘소 실전시기는 100년 미만으로 확인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안은 충렬공의 외손인 정씨들이 회곡동에서 옮겨와 살던 곳이기도 합니다.
예안과 관련된 각종 읍지, 지리지 등의 성씨 항목에는 항상 정씨가 가장 먼저 등장합니다.
그만큼 영향력이 컸고, 일찍부터 자리잡고 살아왔다는 반증인 셈이죠.
또 연재물에도 나타나듯이 '김경건'이란 분은 능골의 사정을 훤히 꿰고 있습니다.
능골의 지리적 상황을 모르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죠.
제1회 여름캠프 당시 김동식(예안파) 원장의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속이 시원하지 않고 뭔가 자꾸 걸린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거든요.
휘 예생 할아버지께서 비석을 개수하신 다음 적어도 수십 년 정도는 충렬공 할아버지 묘소가 수호되었을 것입니다. 또 사촌에는 600년 세거의 도평의공파 집성촌이 있습니다.
멀쩡하던 비석이 부서져 없어졌다는 말 자체가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부분은 인위적이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여하튼 관련 자료들을 더 찾아보면 조금이라도 진척이 있겠죠.
오랫동안 고민해 오던 문젠데 연재물로 인해 많이 해소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김윤식님의 댓글

profile_image 김윤식
작성일

  아참, 어젯밤에 생원 윤의정의 문집을 찾았습니다.
이시발 선생과 관련된 글 두어 편이 있는데, 능골 묘소 사건과 관련된 글은 없는 것 같습니다.
국립중앙도서관으로 들어가시면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