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담 김시양 연구(석사학위 논문)-본론 (45-하담시의 문학사적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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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작성일07-01-25 15:28 조회1,490회 댓글0건본문
그 봉명하는 臣下도 반드시 儒臣 중에서 재식이 출중하고 文에 해박하고 禮에 通達하고, 또 掌故를 잘 아는 자를 뽑아서 임명해야만 임금의 뜻을 인도하여 드날리고 史臣의 職을 잘 닦아서 오묘하게 선발한 뜻을 저버리지 않게 된다. 그러므로 조종 이래로 유독 이 選拔만은 가장 중히 여겼으니, 그 취지를 대개 징험할 수 있겠다.1)
許筠은 이 글에서 荷潭의 재식과 문장을 인정하였다.
다음은 澤堂이 荷潭의 죽음을 哀悼하여 지은 輓詩이다.
直節忠謀聖主知 忠直한 절조와 計策을 성상은 알아주었건만
奇行獨立衆人疑 기특한 행동으로 홀로 서니 사람들은 의심했네.
將星乍耀都元帥 잠깐 都元帥로 將軍의 별자리 빛내더니
卿月增輝判度支2) 戶曹 判書로 卿士의 달빛을 내뿜었네.
乙亥 이후에 고질병이 몸에 생겨 나이가 들어가면서 점점 쇠약해져도 오히려 반드시 밤이 깊으면 잤다가 새벽이면 일어나서 솔선하여 평일에도 孟子를 암송하고, 詩는 올바른 朱子와 韓愈의 문장에 생각을 붙였다. 병이 깊어 질 때까지도 반드시 머리를 빗고 洗手를 하여 관을 바로 쓰고 앉았는데, 屬纊하는 아침까지도 끊이지 않았으며, 그날 또한 萬章 한 篇을 평상시 때와 같이 암송하였다.3)
平生에 산업을 經營하지 않아 검약함을 지키고, 즐기고 좋아하는 것을 끊었으며, 직위가 卿相에 이르러도 서울 近傍에 한 칸의 집이 없어 항상 세를 내어 살았다. 처자들은 고생되고 어려워 여러 사람들이 빌려주고 대주어 근근히 살아갔지만 荷潭은 즐겁게 처신하며 만날 때마다 편안해 하였다.4)
죽는 날까지도 이렇듯 열심히 學問에 정진했으니 그가 平素에 얼마나 學問과 詩作에 열심이었는지는 확실히 알 수 있다. 官職이 卿相에 있었으면서도 집 한 채가 없었다는 것만 보아도 그가 얼마나 淸廉潔白 했었는지를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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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許筠,『성소부부고』“其奉命之臣, 亦必於儒臣中, 極選才識出類, 而博文達禮, 且諳委掌故者爲之, 乃可導揚主衷, 虔修使職, 以不負妙簡之意. 故祖宗以來, 獨此選爲最重, 其指蓋可徵矣. ”
주2)『澤堂先生續集,』 第六卷, 「金判府事 時讓」.
주3)『荷潭文集』 卷之十一, 「遺事」, p.549.
주4) 상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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