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수 흥해군수의 공적을 기리는 신축제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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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영 작성일07-02-07 14:36 조회1,562회 댓글1건본문
신축제언기
고을의 토양(土壤)이 메마르고 척박하여 생민(生民)이 자주 선식(鮮食: 美食)에 곤란을 보는 것은 저수지(貯水池)가 절대 적어서 능히 한발(旱魃)을 막지 못하기 때문이다.
금상(今上)의 삼십칠 년 신사(辛巳)에 김공 영수(永綬)가 이 고을에 수령(守令)으로 부임하여 염근(廉勤)으로서 다스리되 무릇 가히 흥폐(興廢)함으로써 백성에게 이로운 것은 하나도 버리지 않고 여력(餘力)에 더욱 명농(明農)으로써 임무(任務)를 삼았다.
그 이듬해에 크게 가물어서 백성들은 추수(秋收)할 것이 없었다. 공(公)이 이에 군중(郡中) 노인들을 불러 모으고 수리(水利)를 일으킬 것을 도모하여 말하기를, 전답(田畓)이 있는데 못(澤)이 없으면 그 어찌 곡식을 얻으리오 온 지경안에 널리 제방을 설치하면 한발이 어찌 재앙이 되리오 백성이 진실로 노고(勞苦)를 꺼리지 않는다면 내가 앞장서서 제방을 신축할 것이다. 하니 모두가 말하기를, 진실로 수령(守令)의 말과 같이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면 누가 감히 원망하리오 하니 공(公)이 이에 두루 제방을 신축하는데 적당한 땅을 골라 농사일이 뜸한 때에 바로 명령하여 역사(役事)를 시작하여 몸소 감독하고 숙야(夙夜)로 부지런히 하여 구월(九月)부터 시월(十月)까지 통틀어 크고 작은 제방 축성(築成)된 것이 무릇 열두 개나 되어 큰 제방에서 사경(四境)의 안을 서로 바라보게 되니 보는 사람이 귀신처럼 시설하였다고 의심하였다.
대개 공(公)이 일을 시작한 이래로 일찍이 하루도 관청의 집에서 편안히 거처하지 않고 제방 근촌(近村)에 나가서 살며 닭 우는 소리를 듣고 나와서 별을 보고 돌아가는 것을 항상 하는 일로 삼았다. 말과 소가 왕래하는 데서 바람과 이슬을 무릎쓰고 친히 삽을 잡고 흙탕물이 몸을 적셔도 괴롭게 여기지 아니하니 백성들이 모두 공(公)의 정성에 감동하여 힘을 다함을 앞다투고 오직 일이 늦어질까 걱정하였으므로일은 매우 컸으나 마치기는 매우 빨랐다.
계미년 봄에 수의어사(繡衣御史)가 소문을 듣고 우직(右職)으로 승서(陞敍)하는 명(命)이 있었으니 이 해에 공이 평산(平山)으로 이배(移拜)되었고 겨울에 또 대신(大臣)이 공의 공(功)을 아뢰어 팔도(八道)에 반유(頒諭)하고 관리(官吏)가 된 자는 모두 김영수(金永綬)와 같이 하라는 교지(敎旨)가 있어 길에서도 모두 칭송하였다.
제방으로 인하여 큰 물에 잠기지 않은 곳이 네 개이고 완전한 곳이 여덟 개이니 아무 제방은 군서(郡西)에 있고 아무 제방은 군동(郡東)에 있으며 아무 제방은 군남(郡南)에 있고 그 북(北)에 있는 것이 바로 이 제방이다. 제방의 이름을 태평(太平)이라 하였으니 공(公)이 지은 것이다.
제방의 아래에 황전(荒田)을 개간하여 수십석(數十石)을 심을수 있는 땅이 있는데 군(郡)에서 소위(所謂) 노세(路稅)라고 하여 해마다 매호(每戶)에서 세금을 걷음으로 해서 백성이 고통을 받으니 공이 그 폐단을 없애고자 제방 아래에 두락(斗落)마다 오두(五斗)의 세금을 받아 여러 세금에 부치어 노세(路稅)에 대체하여 그 백성에게 혜택을 오래동안 주었으니 어떠합니까?
대개 공이 이 제방에 더욱 심력(心力)을 써 쌓기 시작하던 날 때는 이미 겨울이었다.
공이 열흘로 기약하고 일을 마치니 사람들이 모두 어렵다고 하였으나 기일 내에 과연 풍설(風雪)이 없고 따뜻하기가 봄같아 일이 순조롭게 이루어져 능히 그 뜻대로 하였으니 또한 이상한 일이다. 공의 시(詩) 일절(一絶)이 있어 그 일을 기록하였으므로 비석의 뒷면에 기록한다.
출전: 국역농수선생문집
김영수 흥해군수의 공적을 기리는 신축제언기(新築堤堰記)가 기록된 비(碑)는 안타갑게도 멸실되고 농수선생의 문집에만 기록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댓글목록
김항용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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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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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감사합니다. 홈에 올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