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사람들-길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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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중 작성일07-02-08 17:13 조회1,694회 댓글0건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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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영남사람들 .53] 길재 | |||||||||||||||||
"不事二君"…권력의 유혹 뿌리쳐
조선 이방원의 출사요구 거절 '굳은 절개'
"내 왕조는 고려뿐"…만고의 충신으로 남아
왕조의 교체. 벼슬살이를 평생의 업으로, 목숨같이 여기는 관료들에게 이 사건은 그야말로 충격 그 자체였다. 그렇지만 권력을 맛본 많은 이들은 새 왕조의 건국 이후에도 그 유혹을 좀처럼 떨쳐 내기 어려웠다. 이긍익(李肯翊)이 편찬한 역사서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진다. '개국 직후 국왕이 여러 재상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그들은 모두 고려 왕조의 재상으로서 새 왕조에 벼슬하는 사람들이었다. 어느 정승이 술에 취해 기생 설매(雪梅)를 희롱했다. "네가 아침은 동쪽에서 먹고 잠은 서쪽에서 잔다고 들었다. 이제 나와 함께 자는 것이 어떠하리." 그러자 설매가 "동가식서가숙(東家食西家宿)하는 천하디 천한 몸으로 왕씨를 섬기다가 또 이씨를 섬기는 정승을 모시는 것이 어찌 합당하지 않으리오"라고 되받았다. 이 말을 듣자 정승은 낯을 붉히면서 머리를 숙였고, 좌중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탄식했는데, 눈물을 흘리는 자도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처럼 절의를 잃고 현실에 붙좇을 때, 물론 그렇지 않은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절의지사(節義之士)'로 인정받아 조선 왕조 초기의 대표적인 윤리서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에 그 행적을 남긴 야은(冶隱) 길재(吉再)가 그런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다. 길재(1353∼1419)는 고려 왕조가 기울어가던 1353년(공민왕 3년) 금산군수 길원진(吉元進)과 토산의 사족 김희적(金希迪)의 여식 사이에 장남으로 해평현(오늘날 구미시) 봉계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선대는 해평에서 대대로 향직을 계승하던 해평 토성으로 생원시에 합격한 증조부(吉時遇)에 이어, 아버지 대에 와서 비로소 출사하게 된 전형적인 지방세력이었다. 지방관을 전전하던 아버지는 노씨와 재혼하여 서울 개경에 거주했다. 전혀 가사를 돌보지 않았던 아버지 탓에 집안의 가세는 말이 아니었다. 가난하고 외로웠던 어린 시절의 경험들이 그를 소심하고 내성적인 성격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생업과 학문을 겸해야 했던 그는, 또래 아이들보다 한참 늦은 18세가 되어서야 상산(오늘날 상주)의 사록(司錄)으로 부임했던 박분(朴賁)의 문하에 출입하면서 공부의 참맛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이임하는 스승을 따라 상경하여, 당대의 학자 이색(李穡), 정몽주(鄭夢周), 권근(權近) 등을 만나면서, 정주학(程朱學)에 깊이 빠져들었다. 그는 22세에 생원시에 합격했고, 31세가 되어 대과에 합격하여 관직 생활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관직을 시작한 1387년(우왕 13년)부터 낙향을 결심한 1390년(창왕 3년)까지 4년여 동안 그는 주로 성균관(成均館)의 학정(學正), 박사(博士), 그리고 교수(敎授)와 같은 교육 관련 하위직에서 근무했다. 낮은 문지(門地)에다가 내성적인 그의 성격이 그를 교육 관료의 길로 나아가게 했을 것이다. 고려의 멸망이 코앞에 닥쳐온 1390년에 이르러, 그는 진로를 두고 고민에 빠졌다. 그가 배우고 가르친 정주학에서는 신하의 도리로서 '불사이군(不事二君)'의 덕목을 강조하고 있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동문수학했던 많은 관료들은 새로운 왕조에서 관직 생활을 재개했다. 그가 스승으로 따르던 권근마저 새 왕조로 출사할 정도였다. 많은 동료들이 양심을 저버리는 순간에 그는 자신의 양심을 따라 고향 선산으로 낙향하는 결단을 보였다. 조선 건국 이후 새로운 실력자로 급부상한 이방원(李芳遠)은 새 왕조가 들어선지 9년여가 흐른 정종 2년(1400) 길재를 개경으로 불렀다. 훗날 조선 3대 국왕 태종이 된 이방원과는 성균관에서 동문수학했던 학문적 동지이자, 같은 시기 관직 생활을 했던 정치적 동료였기 때문이다. 이방원은 왕씨(王氏)의 고려 대신 이씨(李氏)의 새 왕조가 '하늘의 명'을 획득한 정통 왕조임을 대내외에 공표하고자 했다. 그의 입장에서는 기회주의적이고 현세 영합적인 수많은 관료들의 복종보다는 길재와 같은 단 한 사람의 양심적인 인물의 심정적인 지지가 더 절실했다. 그렇지만 길재는 끝내 출사를 거절했다. 새 왕조는 계속해서 그에게 애정 어린 손짓을 보냈다. 그렇지만 그는 한사코 출사를 거부했다. 길재의 출사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새 왕조는 대신 그의 아들에게 손짓을 보냈다. 세종 원년(1419)의 일이었다. 왕조의 부름을 받은 아들 길사순(吉師舜)은 관직의 길로 나섰다. "너는 마땅히 고려를 잊지 못하는
길재는 '하늘의 명'을 받아 새롭게 왕조를 건설한 조선의 정통성을 단 한 번도 부인한 적이 없었다. 건국 30여년이 지나는 동안 조선은 유교주의에 입각한 도덕적인 국가를 세우고자 무던히 애를 썼다. 전 왕조 말기에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농민들도 새 왕조에 들어와 안정을 되찾았다. 사실 고려는 천명을 상실한 왕조였다. '하늘의 명'을 받은 조선은 새 술을 담을 새 부대였다. 길재 또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면 그는 왜 한사코 새 왕조에 출사하는 것을 거부했던가. 그것은 '불사이군'의 정절을 지켜야 한다는 도덕적 책무에서 비롯되었다. 그에게 '내 왕조'는 고려일 뿐이었다. 그렇지만 아들에게는 상황이 바뀌었다. 아들에게는 '네 왕조' 조선이 있을 뿐이었다. 그 때문에 그는 관로에 오르는 아들에게 "내 마음을 본받아 네 조선의 임금을 섬겨라"고 당부했다. 이로써 새 왕조와 그 사이에 놓인 불화는 해소되었다. 고향에서의 그의 삶은 그동안 중앙에서 갈고 닦은 교육 관료로서의 경험과 책무를 충실히 수행하는데 바쳐졌다. 그는 낙향 이래 금오산 기슭에 서재를 열고 정주학에 기초하여 학생들을 가르쳤다. 교육자로서의 명성은 선산을 넘어 경상도 전역으로, 더 나아가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수제자 박서생(朴瑞生)은 스승의 '행장'을 집필하면서 "경학을 하는 선비 가운데 선생의 문하에서 나온 이들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고 회고했다. 그리하여 길재의 고향 선산은 15세기에 전국에서 가장 많은 과거 급제자를 배출한 문향(文鄕)으로 이름을 날렸다. 가난과 외로움 속에 어린 시절을 살아온 수줍은 소년 길재는 그 시절의 모든 고난과 시련을 극복하고, 만인의 스승으로, 만고의 충신으로 우뚝 서게 되었던 것이다. 15세기 영남 인재의 절반은 선산서 배출 충절로 '성리학의 본향' 명성 18세기 중반의 유명한 지리학자 이중환(李重煥)은 그의 명저 '택리지(擇里志)'에서 "조선 인재의 절반은 영남에 있고, 영남 인재의 절반은 일선(선산의 고지명)에 있다"고 선산을 평한 바 있다. 물론 이 말은 조선 왕조 전 시기에 걸쳐 선산이 관료를 많이 배출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15세기에 관한 한 선산은 인재의 고장이었다. 15세기 후반 선산 출신의 저명한 관료 학자 김종직(金宗直)은 '이존록(彛尊錄)'에서, 길재의 문하로 "학동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었다"고 소회한 바 있다. 이들 가운데 그의 부친 김숙자(金叔滋)가 포함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15세기에는 선산 관아와 향교가 있던 영봉리 출신으로 과거에 급제한 자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이들 가운데 전가식, 유면, 정지담, 하위지는 문과에서 당당히 장원한 재원이었다. 그 때문에 김종직은 영봉리를 '장원방(壯元坊)'이라 불렀다. 길재의 '불사이군'의 충절은 이후 선산 유학에 큰 영향을 끼쳤다. 사육신 하위지(河緯地)와 생육신 이맹전(李孟專)이 이곳 출신인 것도 이러한 분위기와 관련이 있다. 그리고 평생에 걸친 길재의 정주학 침잠은 이후 이 지역이 성리학의 본향이 되는 데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16세기 중반 이후 확립된 조선 성리학의 도통(道統)은 흔히 정몽주-길재-김숙자-김종직-김굉필·정여창-조광조-이언적-이황으로 연결된다. 그런데 위의 8대 연원 가운데 길재로부터 김굉필(金宏弼)에 이르는 무려 4대의 학자들이 모두 선산과 직·간접적으로 연결을 맺고 있던 인물들이었다. 15세기 선산은 성리학의 메카였던 셈이다. 그런 탓에 임진왜란 직후인 17세기 전반 해평 출신의 학자이자 관료 최현(崔晛)은 '일선지(一善志)'를 편찬하면서, 그 말미에 '선현(先賢)'조를 따로 설정해 둘 정도였다. 거기에는 김주, 길재와 같은 고려말의 저명 인물을 비롯해서 하위지, 김숙자, 이맹전, 김종직, 김굉필, 김응기, 정붕, 박영, 김취성, 김취문, 박운, 성운, 최응룡 등 19명이 수록되어 있다. 15세기와 16세기를 풍미했던 당대의 관료와 학자들 대부분이 망라되어 있는 셈이다. 15세기의 문향 선산은 이렇게 탄생했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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