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제사공(휘 永綬) 경상지역 유적 답사기_3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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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용, 윤식 작성일07-02-17 01:40 조회1,877회 댓글2건본문
통제사공(휘 永綬) 경상지역 유적 답사기_3
열 분의 安金 해군총사령관
대진고속도로 개통 이후 최근에 연장 고속도로가 통영시까지 개통되었다. 덕분에 17:42분 통영시 입구에 도착했다. 충무는 통영군과 통합되면서 통영시로 개칭되었다. 해가 지기 전에 해안 절경을 감상하기 위해 오른쪽 평인일주도로를 타고 바닷가로 향했다. 직진하면 옛 충무시 중심지로 직행하게 된다.
절경이었다. 몇 차례 통영에 와 보기는 했지만 이 길은 처음이다. 따뜻한 날씨로 벌써 동백꽃이 피기 시작했다. 굽이굽이 고갯길 몇을 넘어 자그마한 포구에서 잠시 쉬었다. 파도가 잘게 부서지는 걸 보니 바람이 센가 보다. 붉은 저녁놀이 지고, 사방이 회흑색으로 변한다. 하늘이나 바다나 똑같은 빛깔이다. 태영 종친은 “동양의 나폴리, 아니 그보다 더 뛰어난 절경”이라며 연신 감탄이다. 사진 몇 장을 찍고 시내로 향한다. 18:05분 통영 시내에 들어와 여장을 푸느라 시간이 꽤 걸렸다.
▲ 저녁놀이 아름다운 평인일주도로
모텔 안주인의 안내로 중앙시장의 ‘혜숙이네’ 식당으로 갔다. 안주인이 수더분하고, 바깥주인은 순박하다. 식당 바로 앞 어물전에서 펄떡펄떡 뛰는 활어 몇 마리를 사서, 회와 매운탕으로 저녁을 든든하게 들었다. 싱싱한 횟감 안주라 술이 덜 취하는 듯하다. 숙소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04:00시쯤 잠이 들었다. 그러느라 술을 몇 순배 더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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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영항 야경 |
▲ 통영대교 야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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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영시민 문화회관 |
▲ 거북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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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포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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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00시경 숙소를 나와 08:40분 복어국집(부일식당)으로 향했다. 태영 종친이 통영 명물이라며 미리 인터넷에서 조사한 집이다. 이번 답사에 들인 정성이 짐작된다. 부둣가 여객터미널 맞은편 골목 안쪽에 있다.
여객터미널에 주차를 하고, 10:00시 정각에 한산도로 출항하는 배를 탔다. 배를 타고 가는 동안 후안동김씨 한 사람을 만났다. 등산배낭에 붙은 안사연 표지를 보고 말을 걸어온다.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통영항 내해를 구경한다. 통영항도 많이 변했다. 한적한 포구였건만 이제는 리조트 시설과 조선창(造船廠)이 내해(內海)를 꽉 메운 듯하다. 한산도행 여객선은 두 종류가 있다. 섬주민을 위한 여객선과 관광용 유람선이다. 여객선은 정해진 시간에, 유람선은 여객 정원이 차는 대로 입출항한다. 외해(外海) 쪽 다도해 절경까지 구경하려면 유람선이 제격이다. 주말이면 여객이 많으므로 한산도만 다녀오는 경우에도 유람선이 훨씬 시간을 아낄 수 있다.
▲ 한산도 제승당을 오가는 여객선에서. 왼쪽부터 윤식, 태영, 항용
▲ 통영항 여객터미널
▲ 여객선에서 즐거운 한때
거북등대를 지나자 멀리 제승당이 한눈에 들어온다. 10:27분 제승당이 있는 한산도에 도착했다. 포구에서 내려 오른쪽 제승당 쪽으로 향했다. 해안을 따라 길을 잘 닦아 놓았다. 제승당 입구에서 관리사무소를 지나자 조선 수병들이 사용하던 우물과 대첩문(大捷門)이다. 충무문(忠武門)으로 난 계단을 올라서자 정면에 제승당(制勝堂)이다.
▲ 통영항 내해의 거북등대. 이곳을 지나면 제승당이 한눈에 들어온다.
▲ 한산문 현판
▲ 제승당에서 본 한산도 포구
▲ 제승당으로 들어가는 입구, 대첩문
▲ 충무문
제주도 관덕정의 ‘탐라형승(耽羅形勝)’ 현판에서 보듯이 통제사공께서는 사람 키를 넘는 대자(大字)에도 뛰어나신 분이다. 글자 크기도 크거니와 한 번에 내리그은 붓놀림이 사람의 기(氣)를 누른다. 그 글씨를 머릿속에 그리며 제승당 안을 들여다본다.
거기 있었다. 또 놀란다. 현판서(懸板書)를 보니 ‘崇禎三丙午仲春統制使望八醉筆’이라 적혔다.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돼 있었지만 현판에 끌려 안으로 들어갔다. 슬며시 높이도 재 본다. 키를 훌쩍 넘는다. 글자에도 손바닥을 펴서 통제사공의 기운을 느껴 본다. 그러곤 빠른 동작으로 현판 사진과 기념사진을 찍고 나왔다.
▲ 제승당 내부
▲ 통제사공 친필 휘호, 제승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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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제사공 친필 '제승당' 현판 앞에서. 왼쪽부터 항용, 태영, 발용
이 현판은 제승당에 걸려고 했으나 워낙 커서 걸지 못했다고 한다. 관덕정에서처럼 제승당에도 이 현판이 밖에 내걸렸다면 관람객들을 압도했을 텐데. 아쉽다.
▲ 제승당
▲ 1960년대 제승당 현판 - 휘 영수 통제사의 친필 현판이 걸려있다.
현재 제승당 처마 밑에 걸려 있는 작은 현판은 조경(趙儆) 통제사의 필체로 초서체이다. 제법 크기가 있어 통제사공의 친필인가 들여다봤더니 필체가 다르다. ‘조경’이라 적혀 있어서 눌암 할아버지의 사위 용주(龍洲) 조경(趙絅) 선생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발용 종친이 이름자가 다르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용주 선생은 문관이다.
▲ 조경 통제사의 친필 '제승당'
제승당은 잘 다듬은 화강석으로 초벌대를 쌓고 두리기둥에 팔작지붕의 겹처마집을 얹어놓은 단정한 집이다. 5칸×3칸 크기에 이익공집으로 단청을 베풀었다. 단단한 근육질을 떠올리게 하는 장수(將帥)들 집이다.
그 앞으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후손 중 통제사를 지낸 분들의 비석이 보호각 안에 5기가 서 있다. 우리 문중 할아버지 중에서 통제사를 역임한 분들은 모두 열 분이시다. 그 중 휘 중기 할아버지는 2번 통제사를 맡으셨으니 모두 열 분이 된다. 눈에 보이지 않는 우리 문중의 ‘통제사 비림(碑林)’을 머릿속으로 그려 본다.
◆우리 문중의 역대 통제사 | |||
35대 |
김응해(金應海) |
1646. 3.~1648. 3. |
金應河의 弟 |
43대 |
김 적(金 逷) |
1659. 8.~1660. 1. |
金智童의 5代孫 |
63대 |
김세익(金世翊) |
1685. 3.~1686. 6. |
金應海의 孫 |
71대 |
김중기(金重器) |
1695. 8.~1695. 11. |
金應河의 曾孫 |
85대 |
김중원(金重元) |
1711. 11.~1713. 5. |
金應海의 曾孫 |
92대 |
김중기(金重器) |
1718. 9.~1720. 1. |
金應河의 曾孫 |
100대 |
김 흡(金 翕) |
1727. 12.~1729. 12. |
金世翊의 孫 |
104대 |
김 집(金 潗) |
1733. 6.~1736. 4. |
金重元의 子 |
106대 |
김 광(金 洸) |
1737. 9.~ ? |
金應海의 高孫 |
116대 |
김 윤(金 潤) |
1754. 3.~1755. 2. |
金應海의 高孫 |
140대 |
김영수(金永綬) |
1786. 1.~1786. 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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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제사는 오늘날의 해군총사령관에 해당한다. 1593년 이순신 장군이 초대 통제사로 취임한 것을 시작으로 1894년 208대 홍남주 통제사에 이르기까지 약 300년간 충청ㆍ전라ㆍ경상 3도의 수군을 지휘한 총사령관(종2품직)이다. 조선조의 수군은 각 도(道)의 수군절도사가 지휘하였으나, 1592년 임란을 계기로 3도의 수군을 통합해 삼도수군통제사를 신설하고 전라좌수사였던 이순신 장군을 임명한 것이 그 시초였다고 한다. 삼도수군통제영 예하에는 경상좌ㆍ우수영과 전라좌ㆍ우수영 그리고 충청도수영등 5개 수영이 소속되었다.
제승당을 바라보고 오른쪽, 바다 쪽으로 쑥 나간 곳에 단정한 수루(戍樓)가 앉아 있다. 통영항이 바라다보이는 쪽이다. 직선으로 충무시 주산(主山)인 여황산에 세병관이 있는 통제영 쪽이다.
▲ 제승당 옆 수루(戍樓)에 걸린 이 충무공의 시
▲ 수루에서 내다본 풍경
제승당 왼쪽에는 이순신 장군의 영정을 모신 충무사(忠武祠)가 있다. 충무사로 들어서자 중문 앞에 ‘정화기념비’와 ‘제승당유허비’가 서 있다. 유허비는 조경 통제사의 필체로 뒷면의 초서가 볼 만하다. 마치 제비가 날아가는 듯하다.
▲ 제승당 유허비(오른쪽)과 정화비(가운데)
▲ 제승당 유허비의 음기. 조경 통제사의 친필이다.
충무공 영정에 참배를 하고, 발용 종친이 얼른 안으로 들어가 영정을 찍은 다음 다시 제승당으로 나왔다. 다시 한 번 통제사공의 친필을 눈에 담고 관리사무소로 향한다. 제승당을 둘러보면서 안내자인 듯한 사람에게 건물 안에 모셔진 통제사공 친필 현판에 대해 물으니 머뭇거리면서 조경 통제사의 친필이라는 대답이 돌아왔기에 ‘따지러’ 가는 길이다.
▲ 충무사. 초대 통제사 이 충무공을 모신 사당이다.
▲ 이 충무공 영정
▲ 이 친무공 친필 - 무릇 신하된 자는 임금을 섬김에 있어서는 죽음도 있는 것이다.
▲ 이 충무공 서간문 - 임금께서 쾌차하심은 신하와 백성의 즐거움이다.
대첩문을 나와 경남제승당관리사무소로 들어가자 직원이 용무를 묻는다. 인사를 하고 태영ㆍ항용 종친이 제승당 현판에 대해 묻자 대뜸 “김영수 통제사 친필”이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그 말에 마음이 누그러져 통제사공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항용 종친이 우리 홈의 통제사공 자료를 안내한다.
▲ 제승당관리사무소에서 직원 이미화 씨와 대담 중인 답사 일행
경남 문화재관리국의 이미화 씨와 통제사공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통제사공 친필 안내판 설치를 구두로 약속받았다. 아울러 상호 정보교류를 하기로 하였다. 이미화 씨는 “제승당 현판은 원래 8조각으로 나뉘어 제승당에 보관 중이던 것을 1985년 8월 하나로 합쳐서 복원한 것”이라고 한다.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태영 종친이 사무실 책꽂이에 꽂혀 있는 ‘제승당지(制勝堂誌)’를 한 권 얻었다. 경남제승당관리사무소에서 펴낸 책자인데, 통제사공에 대한 내용 중 두어 군데가 잘못되었다. 책 내용에는 ‘8조각’이 아니라 ‘18조각’으로 돼 있는데, 오자(誤字)라고 한다. 또한 이 책자 다른 페이지에 수록된 역대 통제사 명단에 통제사공께서 141대 통제사로 소개돼 있으나 140대가 옳다.
■제승당지에 수록된 ‘제승당 현판 복원’ 내용 복원된 제승당 현판은 1786년(정조 10년) 3월 140대 통제사 김영수(金永綬)가 쓴 것으로 정화사업 이전까지 제승당 안에 보관되어 있었다. |
벼르고 들어갔다가 얻어맞고 나오기는 했으나 기분은 날아갈 듯하다. 그 사이 한산도에 들어왔던 배를 놓쳤다. 마음은 급한데 1시간 가까이 부두에서 배를 기다렸다.
▲ 포구에서 제승당으로 들어가는 길. 굽이지는 고즈넉한 길이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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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승당을 참배하고 돌아오는 배 안에서
노(老)장군의 순직
13:00시 정각 통영항에 내려 통제영으로 향했다. 유명 관광지인데도 안내판이 눈에 띄지 않는다. 서너 차례 길을 물었다. 주민들이 ‘적극적’으로 길을 알려준 덕에 13:35분에 통제영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들어섰다. 그제야 ‘통제영지(統制營址)’ 안내판이 보인다. 큰길에 붙여야 할 것을 골목길에 붙여 놓았으니……. 안내판은 길 찾는 이에게 필요한 것이건만, 통영시의 세심한 배려가 아쉽다.
주차할 곳이 만만찮다. 이리저리 주차할 곳을 찾다 보니 언덕 위에 비석들이 서 있는 게 아닌가. ‘통제사공의 타루비(墮淚碑)가 있는 곳이구나.’ 하는 생각이 스친다. 그 옆으로 복원 중인 건물들이 있다.
‘통제사김공휘영수타루비(統制使金公諱永綬墮淚碑)’는 다듬은 받침돌 위에 비신(碑身)을 세우고, 팔작지붕 겹처마 형태의 덮개석을 씌웠다. 통제사공의 휘 밑으로 비신 한가운데에 큰 글자로 ‘墮淚碑’라 적고, 그 좌우에 작은 글자로 ‘六朔莅營 一心圖報 身無兼衣 言不及私 規畵未半 公何遠棄 父老咸嗟 士卒相弔’이라 새겼다.
▲ 통제사공의 타루비
▲ 타루비 음기
1786년 1월 140대 통제사로 부임하신 통제사공께서는 애통하게도 그 해 7월에 임지인 통제영에서 71세를 일기로 순직하셨다. 사후 두 차례나 청백리로 추천될 정도의 추앙받는 선정관(善政官)이자 군부를 이끄는 노(老)장군이 서거하자 통영 읍민들은 통제사공의 반친(시신을 운구함) 당시 눈물을 흘리며 통제사공의 죽음을 슬퍼했다. 타루비 음기(陰記)에 당시 상황을 짐작할 수 있는 글귀가 적여 있다. 그 까닭에 ‘善政碑’라는 의례적인 문구 대신 ‘墮淚碑’라 한 것이다. ‘타루(墮淚)’, 즉 ‘눈물을 흘린다’는 것은 중국의 양양 사람들이 양호(羊祜)를 생각하면서 비석을 바라보면 반드시 눈물을 흘리게 된다는 고사에서 비롯되었다. 한다.
정종 10년에 세워진 타루비는 마구리(馬九里)에 처음 세워졌으나, 충렬사(忠烈祠)로 옮겨졌다가 현재는 통제영의 중심건물인 세병관 옆에 세워져 있다. 음기에 ‘族孫 泗川縣監 基明 改刻’이라 적혀 있는데, ‘족손 기명’은 어느 분인지 확인하지 못했다.
타루비가 서 있는 곳에는 총 63기의 비석이 모여 있다. 대부분 ‘善政碑’라 적혀 있으며, 타루비는 세병관 담장에서부터 2열, 북쪽에서 3번째에 있다. 통제사를 역임하신 열 분의 선조님 중 다른 분의 비석이 있을까 살펴보았으나 휘 영수 할아버지 비석뿐이다.
▲ 타루비를 살펴보는 답사 일행
▲ 역대 통제사들의 선정비를 모아놓은 세병관 옆 비림(碑林)
타루비를 살펴보고 세병관(洗兵館)으로 들어서는 순간 웅장한 위용에 입이 벌어졌다. 제6대 통제사인 이경준(李慶濬) 통제사가 두릉포에서 이곳(통영시 문화동)으로 통제영을 옮긴 이듬해인 선조 37년(1604년)에 완공한 거대한 규모의 기와집이다. 세병관은 창건 후 약 290년간 3도 수군을 총지휘한 사령부로서 오늘날의 해군사령부에 비교할 수 있다. 한산 앞바다가 한눈에 들어오는 곳에 자리잡고 있다. 어제 보았던 마산의 정동행성 터의 조망에 버금 간다.
▲ 세병관 현판. 서유대 통제사의 친필이다.
세병관은 수군 최고 지휘관들의 의전 건물답게 9칸×5칸 크기의 위용을 자랑한다. 두벌대 위에 세운 팔작지붕의 겹처마 9량집이라 지붕 무게를 분산시키기 위해 공포를 설치했다. 그래도 워낙 큰 집이라 한 아름 반이나 되는 두리기둥을 안쪽에도 설치해 내주와 외주로 집을 받쳤다. 오랜 세월이 흐른 탓에 단청이 많이 퇴락했지만, 그것이 오히려 운치를 더한다.
내부 시설도 특이하다. 우물마루를 깔고 천장에는 소란반자를 달았는데, 정중앙 북쪽에 단을 한 단 높여 단상과 단하가 구분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문들을 모두 떼었다 붙였다 할 수 있도록 분합문을 달아서 통풍이 잘 되도록 하였다. 호쾌한 군인의 기상이 절로 느껴지는 집이다. 바로 이 건물이 바로 제35대 통제사 김응해(金應海) 장군께서 중수하신 건물이다.
▲ 세병관 기둥. 내주와 외주가 모두 한아름을 넘는다.
▲ 세병관 내부
건물 크기에 걸맞게 현판 역시 크다. 통제사공의 대자(大字) 현판과 필체가 흡사한 듯도 한데 자세히 보니 다르다. 해설사 김은주(金銀珠) 씨가 서유대 통제사의 휘호라고 들려 준다. 세병관(洗兵館)이라는 이름은 두보의 시 ‘세병마행(洗兵馬行)’에서 유래된 것으로 ‘전쟁을 종식하고 평화를 염원하는’ 뜻이 담겨 있다고 한다.
세병관 안쪽에는 사방에 빙 둘러 ‘통제사좌목(統制使座目)’이 걸려 있다. 통제사좌목은 해군 총사령관인 통제사 이름 밑에 휘하 제독 및 고위 장교들의 이름을 적은 것으로 이를테면 막료 명단이라고 할 수 있다. 통제사 이름을 필두로 장교들의 직책과 이름을 적고, 각각의 이름 밑에 거주지까지 적어 놓았다.
이 좌목들 역시 예사 크기가 아니다. 게다가 세병관이 웬만한 2층 건물보다 더 높아서 좌목들이 거의 수직에 가깝게 걸려 있다. 그 안에 적힌 글자들 중에 혹시 우리 선조님 휘자가 들어 있을까 확인하기 위해 일행 모두가 까치발을 든 채 목을 길게 뽑느라 혼이 났다. 사진을 찍어야 하는 발용 종친은 아예 마루에 누운 자세로 카메라 셔터를 누른다.
▲ 유비연 통제사좌목. 유비연 통제사는 요동백(휘 응하) 할아버지의 외손자이다.
통제사좌목 중에 정남향, 즉 섬돌 바로 안쪽에는 ‘괘궁정(掛弓亭)’이라고 적힌 특이한 현판이 걸려 있다. 김은주 해설사 말에 의하면 원래 통제영으로 들어오는 입구 양쪽에 ‘괘궁정(掛弓亭)’과 ‘괘도정(掛刀亭)’ 두 개의 정자가 있어서 활과 칼을 걸어두었다고 한다. ‘괘도정’ 현판은 전하지 않는지 ‘괘궁정’ 현판 하나만 걸려 있다.
▲ 괘궁정 현판
세병관 앞마당 오른쪽 담장 근처에는 절집의 당간지주 같기도 하고 제주도의 정낭(대문)과 비슷하기도 한 기다란 돌이 두 개 서 있다. 큰 것이 한 길을 조금 넘고, 작은 것은 어깨 높이다. 김은주 해설사는 빙그레 웃으며 통제영의 영기(營旗)와 원수기(元帥旗)를 걸 때 사용하던 것인데 현재 1기만 남았다고 한다. 해군사령부 깃발과 총사령관기(旗)가 나부끼는 게양대와 같은 셈이다.
▲ 통제영기와 원수기를 걸던 게양대
▲ 요동백(휘 응하)의 아우님 김응해 통제사께서 중수하신 세병관의 위용
세병관을 둘러보고 잠시 한산도 앞바다를 내려다본다. 집에 돌아와 답사기를 쓰느라 통제사공 자료를 찾아 공부하다가 뒤늦게 알았다. 한동안 업무에 쫒겨 우리 홈에 못 들어왔던 2006년 12월 26일 우리 문중의 보배 주회 종친이 우리보다 먼저 통영시의 통제사공 유적을 둘러보고 주요한 내용을 많이 알려 주셨다.
세병관 앞의 망일루 등을 살펴보고 통제영 바로 앞에 있는 통영시향토역사관으로 들어갔다. 통영시의 주요 민속자료들을 모아 놓았다. 용무를 말하자 마침 관장은 공무로 타지에 출장 중이었고, 여직원 김은하(金銀河) 씨가 맞이한다. 잠시 후 중년의 남자 직원이 들어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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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병관 앞의 부속건물들. 왼쪽 위에서부터 지과문, 두룡포기사비, 수항루, 망일루
통제사공께서 순직하신 운주당(運籌堂)을 묻자 복원 중인 건물을 가리킨다. 인사를 나누고 운주당으로 향했다. 운주당은 1998년부터 2007년까지 10년 동안 통제영의 연차적 복원계획에 의해 2003년 11월에 복원되었으나 아직 개방되지 않고 있다. 운주당 영역에는 운주당을 비롯해 경무당(景武堂), 병고(兵庫), 내아(內衙) 등의 건물이 들어서 있다.
▲ 통제영 복원 계획도
▲ 통제영 고지도. 이 지도를 바탕으로 통제영을 복원하고 있다.
운주당은 5칸×3칸의 팔작지붕 익공집으로 겹처마와 두리기둥으로 지어졌다. 경무당은 3칸×2칸의 팔작지붕의 두리기둥집이다. 운주당 영역은 통제사공께서 서거하신 장소라 그런지 옷깃을 다시 여미게 만든다.
▲ 운주당 영역. 아직 공개되지 않고 있다.
가장 오른쪽에 있는 내아는 여염집과 흡사해서 금방 눈에 띈다. ㄷ자집 형태의 남향인데, 대청을 사이에 두고 안방과 건넌방이 마주본다. 동쪽의 건넌방 앞으로는 방과 부엌이 배치되었다. 서쪽 안방 앞에는 창고와 방 2개가 이어 붙었는데, 뒤에 툇마루가 달렸다. 안쪽 본채는 팔작지붕에 사각기둥이며, 5칸×1.5칸이다. 양쪽에 내달린 바깥채는 맞배지붕이다.
▲ 운주당(運籌堂)
▲ 운주당 옆 경무당(景武堂)
▲ 내아(內衙). 일반 살림집 형태이다.
▲ 통제사께서 거주하셨던 내아. 이곳에서 통제사께서 순직하셨을 것이다.
내아 앞에는 3칸×1칸 크기에 맞배지붕의 행랑채가 있는데, 가운데 문을 사이에 두고
댓글목록
김항용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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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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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많은 탐방 자료를 이렇게 섬세하고 세밀한 묘사와 서술로써 기록하여 명작 후기로 남겨 주시어 감사합니다.
대종회보에, 또는 언젠가는 한 편의 책 속에 잘 정리되리라 봅니다.
김상석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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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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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분께서 오롯이 함께하신 남도 답사길에 묻어나는 숭조의식과 함께 요소요소 마다 작은 것 하나도 놓치지 않고 세밀한 주석을 달아 주신 꼼꼼함으로 통제사공의 업적을 비롯하여 선조님들과 관련한 조선조 삼도수군사를 공부하는 좋은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네 분께서 마산과 통영 앞바다의 넘실대는 파도 속에서 보신 안김의 위용과 비전 만큼이나 새해도 활기찬 나날이 지속 되시길 앙망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