安東金公*김홍필(金弘弼)墓碣銘 -소고 박승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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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7-02-22 10:10 조회1,416회 댓글1건본문
安東金公墓碣銘幷序
義城縣令金顯之澆奠于其先墓。過余語曰。先君早事儒術。讀習經書。於庸學語孟尤熟。諸子在懷抱時。親自提耳。
然未嘗披卷目閱。皆口誦以授。逮至成立而不倦。英世與羣季。得不爲他歧所誘。以有今日。無非昊天之德。風樹奄忽。
號慕曷及。今欲載揚遺行。樹表墓南。庶得少慰罔極之痛。敢以敘述爲請。余與顯之氏。同里而同榜。義不敢辭。遂詢而得其詳。
則君本安東人。諱某字某。其遠祖方慶。仕高麗爲侍中。曾祖某。祖某。父某皆不仕。母某氏。君性度軒裕。居家。無疾言遽色。
學勤而身不顯。豈非命歟。娶昌原黃氏尼山縣監永孫之女。生三男。長卽義城。英世其名。中壬午生員, 進士兩試。登庚子甲科第二。歷戶刑曹郞署。今出爲是縣。皆以守職稱。隱德所積。其發諸此乎。次英輔。次英國。女二。安舜弼, 安克恭。其壻也。
君生弘治丁亥。終嘉靖庚寅。壽六十四。黃氏先君五年生。後君十年卒。壽七十八。合葬于所居榮川郡南五里和林洞艮坐坤向之原。
嗚呼。余生十四年而君逝。其行跡可紀者。尙不能知。矧伊數世之後乎。伐石昭示。乃孝子之心。故樂爲之敘。銘曰。
窆貴同穴。慶鮮後延。世所共憾。於斯爲全。稽古之功。可永其傳
위 묘갈의 주인공은 그의 아들이 김영세임을 근거로 추정하였음
김영세(金英世) | |
중종(中宗) 35년 (경자, 1540년), 식년시(式年試) 갑과2(甲科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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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 | 현지(顯之) |
본관(本貫) | 안동(安東) |
거주지(居住地) | 미상(未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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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父) | 김홍필(金弘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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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과(小科) | 1522(임오) 생원시/진사시 |
전력(前歷) | 생원(生員) |
관직(官職) | 도사(都事) |
출처' 嘯皐先生文集卷之四 박승임(朴承任)
박승임(朴承任)
1517(중종 12)∼1586(선조 19).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중보(重甫), 호는 소고(嘯皐). 경상북도 영주출신. 형(珩)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예안김씨(禮安金氏)로 만일(萬鎰)의 딸이다.
이황(李滉)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어려서부터 재주가 뛰어나 사람들로부터 크게 촉망받았다.
1540년(중종 35) 24세로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예문관·승정원·홍문관 등에서 여러 청환직(淸宦職)을 역임하고, 정자(正字)로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옥당(玉堂)에 있을 때는 왕의 신임이 두터웠으며, 군학(君學)과 시무(時務)에 대한 충언을 담은 1만여자나 되는 상소를 올려 정책결정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였다.
이어 수찬에 승진되고, 이조좌랑을 거쳐 정언(正言)이 되었다. 그의 명망이 세상을 떨치자 당시 세도가인 소윤(小尹) 윤원형(尹元衡)의 심복으로 악명이 높았던 진복창(陳復昌)이 그를 농락할 목적으로 만나보기를 청하였으나 끝내 응하지 않았으며, 그뒤 소윤의 횡포가 날로 심하여지자 벼슬을 사직하고 귀향하였다.
1547년(명종 2) 예조정랑에 다시 임명되고, 그 이듬해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귀향, 복(服)을 벗은 뒤 현풍현감이 되어 굶주리는 백성들을 구휼하는 데 힘썼다.
1557년 직강(直講)을 거쳐 사예(司藝)가 되었으나 윤원형의 세도가 더욱 심하여 벼슬에서 은퇴, 두문불출로 독서에 힘썼다. 그 이듬해 풍기군수로 다시 임명되어 치적을 쌓고, 임기가 만료되어 교감(校勘)에 임명하려 하였으나 이를 사양하였다.
얼마 있다가 군자감정(軍資監正)에 임명되었고, 판교(判校)를 거쳐 1565년 병조참의에 승진되고, 그 이듬해 동부승지로 전직되었다가 얼마 뒤 진주목사로 나아갔다.
1569년(선조 2) 동지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1571년 황해도관찰사로 나갔다가 이듬해 좌승지에 임명되고, 1573년 도승지에 승진되었으며, 다음해 경주부윤이 되었다.
이때 집경전(集慶殿)에 태조의 영정을 봉안하였는데, 사람들이 함부로 문을 열어보는 등 예절을 지키지 않자 이를 바로잡기 위하여 봉심(奉審)하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열지 못하도록 사람들의 출입을 엄금하였다.
또한 경주 일대의 묵는 땅을 개간하여 곡식을 심고 거기에서 나오는 수입으로 관비를 충당하는 한편, 조세를 감면하고 부역을 줄이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1576년 다시 도승지에 임명되었고, 강화부유수·여주목사를 거쳐 1581년 춘천부사에 나아갔다가 병으로 사직하고 귀향하였다.
1583년 공조참의를 거쳐 대사간이 되었으나 언사(言事)에 연루, 왕의 뜻에 거슬려 창원부사로 좌천, 얼마 뒤 중앙에 소환되었다가 병사하였다.
풍모가 준걸하고 평소 말이 없이 과묵하였으며, 항상 자신을 드러내기를 꺼려하였다. 일찍이 읽지 않은 책이 없을 정도로 많은 서적을 읽었으며, 특히 《논어》와 주자서(朱子書)를 탐독, 의심나는 것이 있으면 기록해두었다가 스승인 이황에게 질문하여 실력을 크게 인정받았다.
시문에 능하여 한때 많은 시작활동이 있었으나, 중년 이후로는 사람을 부박(浮薄)하게 만든다는 이유로 이를 중지하고 심학(心學)에 주력하며 실천적 수행에 힘썼다.
또한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는 한편, 이에 관한 여러 선현들의 설을 모아 책으로 엮어내는 등 저술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그의 성리학적 견해는 주로 스승의 학설을 따라 주리론(主理論)의 경향을 보였다.
경상북도 영주의 구산정사(龜山精舍)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성리유선 性理類選》·《공문심법유취 孔門心法類聚》·《강목심법 綱目心法》과문집인 《소고문집》이 있다.
댓글목록
김항용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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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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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감사합니다. 홈에 올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