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의 문암서원-고려말 선산인 김주 배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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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작성일07-02-24 23:52 조회1,599회 댓글0건본문
문암서원
서기1612년(광해군4년)에 춘천부 관아 북쪽 30리 지점인 가락리(嘉樂里=서원리)에 설립되고 문순공 이황(李滉=퇴계)과 참판 이정형(李廷馨), 참판 조경을 봉안하고 1871년 철폐될 때까지 약 260년간 사액서원으로 선현선사를 존숭하는 춘천지역의 정신적인 중심의 전당으로, 교육기관으로 교육에 크게 이바지한 서원이었다.(춘천지리지)
지중추 신식(申湜)이 1610년 겨울에 관동을 순찰하는 길에 춘천에 들렀을 때 춘천 지방 유생들이 “춘천지방은 퇴계선생의 외관(춘천박씨)이므로 그의 학문을 진작시키기 위하여 서원을 건립하고 강(講)하겠습니다.”라고 청하였다. 신식은 그 뜻을 받아들여 당시 춘천부사 유희담(柳希?) 상의하여 서원을 설치토록 허락하고 노비 약간명을 주어 서원 건립에 대한 일을 보도록 하였다.
2년 후에 이숭양, 이주(李?) 등과 상의하여 가락리 문암 위에 터를 결정하고 서원을 건립하여 명칭은 ‘문암서원’으로 하고 규모는 서울에 있는 성균관과 같은 크기이며 성균관과 같이 선현선사를 봉안하는 사묘(祠廟), 학동이 공부하는 명륜당(明倫堂), 학생들이 거처하는 제(齊)로 구성되었었다.
문암서원에 관한 기록은 1648년(인조26)에 사액(賜額)을 받았다는 기록과 1731년에 수리하였다는 것 외에는 별로 없어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으나 당시 사액서원이었던 강릉의 송담서원과 원주의 칠봉서원과 같은 수준의 서원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문암서원의 배향 인물은 김주(고려말 인물 호는 농암, 본관은 선산 시호는 충정)와 이황(1501~1570)과 이정형(1549~1607)이었다.
조선시대 춘천지방 거주자로 생원 진사에 합격한 자는 217명이고 그 중 춘천향교 출신 합격자는 41명뿐이며 나머지 176명은 주로 서원출신인데 비사액서원인 도포서원보다는 사액서원인 문암서원 출신이 더 많은 합격자를 냈을 것으로 본다.(원영환,강원지방의 서원연구 논문.1998)
현재 문암서원지는 신북읍 용산리 한국전력공사 춘천수력발전소 운동장 부근에 위치해 있었다. 촌로들은 서원이 헐린 다음에도 사당은 남아있었다고 말한다, 필자가 현장을 답사한 결과 샘터와 자기 파편만이 발견될 뿐 서원터의 흔적은 찾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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