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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방경의 위기극복 리더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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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발용 작성일07-03-04 10:52 조회1,38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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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방경의 위기극복 리더십

피하지 말고 위기와 정면대결 하라.

어느 때인들 태평성대가 있었을 리 만무하겠지만 오늘날도 난세임에는 분명하다. 안팎으로 조용할 날 없는 시끄러운 세상이다. 분명 전쟁 상황은 아니지만 정치 경제적인 우위를 점유하기위한 국가 간의 경쟁은 날로 첨예화 되고 있는 게 현실이다. 뿐 만인가. 안으로는 다양한 이해집단의 갈등. 생활고를 호소하는 서민의 목소리 등으로 바람 잘 날이 없다. 위기상황을 풀어나가는 리더십이 아쉬운 시기이다.

역사에서 찾아보는 과거의 경험들을 오늘날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지만 참고할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해준다는 점에서 나름대로 의미 있다고 볼 수 있다. 몽골족이 세운 원제국의 강점기인 고려시대에 활동했던 김방경(金方慶 1212-1300)이란 인물을 통해 위기에 어떻게 대처했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한국사 전공자들에게 김방경이란 인물은 생소하진 않지만 보통 사람에겐 낯설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 산전수전을 겪은 평생군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에도 70세에 전쟁에 참전한 군인은 많지 않다. 71세에 인천상륙작전을 지휘한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 정도나 이에 해당할 것이다. 김방경이 활동했던 800년 전에는 70세의 수를 누리는 것조차 드문 일이었다. 숱한 전역을 치르면서도 김방경은 89세나 장수를 누렸다. 그가 참전한 전쟁은 정말 대전역 이었다. 고려의 대몽항쟁, 삼별초 토벌, 제1,2차 일본원정 등 단순한 전투가 아니라 험한 바다(風濤)를 여러 차례 건너 싸워야하는 대규모 해상원정까지 험한 전장에서 그는 용감하게 싸웠고 천운의 도움으로 살아남았다.

김방경은 안동김씨(安東金氏) 집안에서 태어났다. 고려에 국가를 양도한 신라 마지막 왕 경순왕의 후손이다. 집안의 배경으로 과거를 거치지 음보(蔭補)로 16세에 초급장교인 산원(散員)이 됐다. 그 후 감찰어사(監察御使)를 거쳐 1248년 (고종 35) 서북면병마판관(西北面兵馬判官), 1263년 (원종 4) 어사대지사(御史臺知事), 상장군(上將軍)으로 승진을 거듭했다. 한때 남경유수(南京留守)로 좌천되었으나 곧 서북면병마사가 됐다.

후퇴한다면 결점을 적에게 보여주는 것, 더욱 강하게 맞붙어라

1270년 (원종 11) 삼별초 장군 배중손(裵仲孫) 등이 승화후(承化侯) 온(溫)을 왕으로 추대하고 삼별초(三別抄)의 항쟁을 일으켜 진도(珍島)로 들어가 고려 정부에 대항했다. 삼별초에 대한 오늘날의 역사적인 평가는 별개로 하고 당시의 고려조정의 관점에서는 체제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다. 삼별초의 항쟁은 중앙정부는 물론 몽골까지 긴장에 빠뜨렸다. 삼별초의 저항은 거셌다. 김방경과 함께 토벌에 나선 몽골장수 아해(阿海)는 진도에서 완강히 저항하는 삼별초군에게 겁을 내고 배에서 내려 나주로 퇴각하자고 권하였다. 김방경은 “원수가 만일 후퇴한다면 이것은 우리의 약점을 보여주는 셈이다. 적들이 승승장구하여 들이 닥치면 누가 그 창끝을 당해낼 것인가?” 라며 결전을 주장했다. 김방경은 홀로 군사를 거느리고 공격했다. 정황은 불리했다. 화살도 돌도 모두 떨어졌다. 삼별초군에게 둘러싸였다. 김방경은 “차라리 고기뱃속에 장사를 지낼지언정 어찌 반적의 손에 죽겠느냐” 며 바다에 몸을 던지려했다. 부하들의 만류로 다시 마음을 잡은 후 군사들을 지휘한 끝에 포위망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 후 재차 진도를 공격, 진도를 함락시켰다. 포로로 잡힌 양민들을 모두 생업에 종사케 하고 돌아왔다.

승리의 기세가 오를수록 더욱 다그쳐라

1274년 (원종 15) 원 세조 쿠빌라이는 일본을 정벌하고자 김방경과 홍다구(洪茶丘)에게 전함 건조를 명했다. 같은 해 (충렬왕 즉위년) 10월 김방경은 원나라의 일본정벌에 중군사(中軍使)로서 고려군 8천명을 이끌고 도원수 홀돈(忽敦)의 총지휘 아래 참여하였다. 처음 대마도에서 상당한 전과를 올리고 이키도(壹岐島)에서도 일본군의 예봉을 꺾었다. 그러나 날이 저물자 전투를 중지하자 “병법에 군대가 천리나 되는 먼 곳에까지 나아가서 싸우게 되면 격하는 기세가 꺾을 수 없으리만큼 강하다고 한다. 지금 우리 군사들이 수적으로는 적지만 벌써 적의 지경에 들어섰으니 사람들이 제가끔 힘써 싸우게 되었으니 이것은 곧 맹명(孟明)이 배를 불사르고 회음(淮陰)에서 강을 등지고 진을 친 격이다. 그러니 다시 싸우도록 하자” 고 독전했다.
* 맹명(孟明) : 秦(진)나라의 장수. *회음(淮陰):지명이름, 현지명 칭창

이에 대해 총사령관 격인 도원수 홀돈(忽敦)은 “병법에 적은 수효의 군사들이 강하게 덤비다가는 결국 많은 수효의 군사들에게 붙잡히게 된다.” 라고 했다. 그러므로 피로하고 부족한 것이 많은 군대들을 몰아서 날로 많아지는 적군과 싸우게 한다는 것은 완전한 계책이라고 할 수 없으니 군대를 돌이켜 돌아가는 것만 못하다” 며 지속적인 공격을 중지시켰다. 김방경의 적극적인 공세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부원수 유복형(劉復亨)이 화살에 맞아 중상을 입어 부하들을 이끌고 귀한하게 됐다. 게다가 때마침 밤에 세찬 비바람이 불어 전함들이 바위와 언덕에 부딪쳐 대파되고 수많은 병사들이 익사하는 등 원정은 실패로 끝났다.

1281 (충렬왕 7) 3월 원은 다시 일본을 침공했다. 김방경 또한 70살의 노구를 이끌고 2차 원정에 참전했다. 고려군 도원수로서 종군하여 이키섬을 공략하고 규수(九州)의 하카타(博多)에서도 승리를 거뒀다. 침공한지 3개월이 지나자 일본군의 저항, 유행병 등으로 3천명의 병사가 사망했다. 여러 날을 싸워서 승리하지 못하자 원의 지휘관 흔도(忻都) 홍다구 등은 회군을 하자고 했다. 이에 김방경은 “우리는 석 달 동안의 식량을 가지고 떠났었는데 지금 아직 남아 있으니 강남군이 오는 것을 기다려 힘을 합쳐 반드시 일본을 격멸해야한다” 고 공격을 계속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8월에 폭풍이 닥쳐왔다. 원정군은 대부분 물에 빠져 죽었다. 시체들이 썰물과 밀물을 따라 포구에 밀려들어 포구가 시체로 가득 찼으므로 시체를 밟고 걸어 갈 수 있을 지경이었다고 한다. 2차 원정도 태풍과 전염병으로 실패로 끝났다.

이렇듯 김방경이 참전한 전쟁은 승리보다는 참담한 희생과 패배가 더 많았다. 그러나 그는 어려움의 와중에서도 탁원한 용병을 통해 적어도 자신이 지휘하는 전투는 능동적으로 주도했다. 어려울수록 위축되지 않고 더욱 용기를 내며, 승기를 잡으면 고삐를 놓치지 않고 죄였던 과감성은 위기관리를 하는데 교훈으로 삼기에 충분할 것이다.

<인터넷을 보고 워드화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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