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프도록 아름다운 ‘장송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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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영 작성일07-03-12 15:53 조회1,816회 댓글2건본문
슬프도록 아름다운 ‘장송곡’
얼마 전 아들놈(재하)이 열하일기에 관한 책을 사달라고 하기에 분당에 있는 교보문고를 찾았습니다. 학생들이 읽기에 쉬운 내용을 찾다보니 고미숙의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이 지루하지 않고 괜찮을 듯 해서 구입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날 부터 떡본 김에 제사지낸다고 제가 그 책을 가지고 다니며 읽게 되었습니다.
그 책 내용 중에 연암 박지원이 지은 누님에 대한 묘지명과 절친한 친구 덕보 홍대용의 묘비명 일부를 실었는데 읽고 감동이 되어 전문을 보고 싶어서 인터넷상에서 찾았더니 쉽게 전문을 구하였습니다. 연암이 쓴 그 묘지명의 번역 전문을 그대로 옮겨 소개합니다.
백자증정부인박씨묘지명(伯姉贈貞夫人朴氏墓誌銘)
유인(孺人) 휘(諱) 모(某)는 반남 박씨인데, 그 동생 지원(趾源) 중미(仲美)가 다음과 같이 묘지명을 쓴다.
유인은 열여섯에 덕수 이씨 택모(宅模) 백규(佰揆)에게 시집을 가 딸 하나와 아들 둘을 두었으며 신묘년 9월1일에 세상을 뜨니 나이 마흔 셋이었다. 남편의 선산은 아곡인바, 장차 그곳 경좌방향의 묏자리에 장사 지낼 참이었다.
백규는 어진 아내를 잃은데다가 가난하여 살아갈 도리가 없자, 어린 자식들과 계집종 하나를 이끌고 솥과 그릇, 상자 따위를 챙겨서 배를 타고 산골짝으로 들어가려고 상여와 함께 출발하였다.
나는 새벽에 두뭇개의 배에서 그를 전송하고 통곡하다 돌아왔다.
아아! 누님이 시집가던 날 새벽에 얼굴을 단장하시던 일이 마치 엊그제 같다. 나는 그때 막 여덟 살이었는데 발랑 드러누워 발버둥을 치다가 새신랑의 말을 흉내 내 더듬거리며 점잖은 말투로 말을 하니, 누님은 그 말에 부끄러워하다 그만 빗을 내 이마에 떨어뜨렸다.
나는 골이나 울면서 먹을 섞고 거울을 더럽혔다. 그러자 누님은 옥으로 만든 자그만 오리 모양의 노리개와 금으로 만든 벌 모양의 노리개를 꺼내 나를 주면서 울음을 그치라고 하였다.
지금으로부터 스물여덟 해 전의 일이다.
강가에 말을 세우고 멀리 바라보니, 붉은 명정이 펄럭이고 배 그림자는 아득히 흘러가는데, 강굽이에 이르자 그만 나무에 가려 다시는 보이지 않았다.
그 때 문득 강 너머 멀리 보이는 산은 검푸른 빛이 마치 누님이 시집가던 날 쪽진 머리 같았고, 강물 빛은 당시의 거울 같았으며, 새벽달은 누님의 눈썹 같았다.
울면서 그 옛날 누님이 빗을 떨어뜨리던 걸 생각하니, 유독 어릴 적 일이 생생히 떠오르는데 그때에는 또한 기쁨과 즐거움이 많았으며 세월도 느릿느릿 흘렀었다.
그 뒤 나이 들어 이별과 근심, 가난이 늘 떠나지 않아 꿈결처럼 훌쩍 시간이 지나갔거늘 형제와 함께 지낸 날은 어찌 그리도 짧은지....
떠나는 이 정녕코 다시 오마 기약해도 / 去者丁寧留後期
보내는 자 눈물로 옷깃을 적시거늘 / 猶令送者淚沾衣
저 조각배 이제가면 어느 때 돌아올꼬 / 片舟從此何時返
보내는 자 쓸쓸히 언덕 위로 돌아가네 / 送者徒然岸上歸
어린 남동생의 심술과 장난, 그것을 따스하게 받아주는 누이. 비통한 죽음앞에서 이런 정경을 떠올리는 연암의 마음은 아직도 여덟살 소년 그것이다. 말을 세워 강위를 멀리 바라보니, 붉은 명정(銘旌)은 바람에 펄럭거리고 강 위 먼 산은 검푸른 것이 마치 누님의 쪽진 머리 같고, 강물빛은 누님의 화장거울같고, 새벽달은 누님의 눈썹 같았다. 스물여덟 해 전의 추억을 마치 어제일처럼 간직하고 있는 것도 감동적이지만, 그것을 죽음 앞에서 오롯이 드러내는 진솔함이야 말로 이 글을 ‘불후의 명작’으로 만든 비결일 것이다.
이 묘비명이 잔잔하면서도 애잔한 화음으로 구성된 ‘서정적 비가(悲歌)에 속한다면, 평생의 지기 홍대용의 묘비명은 굵직한 터치, 낮은 목소리로 구성되어 있다.
朴燕巖의 洪德保墓誌銘(홍대용 묘지명)
덕보가 간 지 사흘이 되던 날 손님 중에서 연례 동지사(冬至使)를 따라 중국에 들어가는 이가 있는데, 그 가는 길에 삼하(三河)를 지나게 되었다. 삼하에는 덕보의 친구가 있어, 손유의라 하는데 호는 용주이다.
지난해 내가 연경에서 돌아오던 길에 용주를 방문하였으나 만나지 못하고, 편지를 써 놓게 되어서 거기에 덕보가 남쪽 지방에서 벼슬을 하고 있는 것까지를 갖추어 말하고, 또 가져간 토산물 몇 가지를 놓아두어 정의를 표하고 돌아왔으니, 용주가 그 편지를 펴 보았다면 응당 내가 덕보의 친구인 줄을 알았을 것이리라. 그래서 손님 가는 편에 그에게 부고하여 일렀다.
"건륭 계묘년 모월 모일에, 조선 사람 박지원은 머리를 조아려 삼가 용주 족하에게 아룁니다. 우리나라 전임 영천군수 남양 홍씨 담헌, 이름은 대용, 자는 덕보가 금년 10월 23일 유시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평소에 별 탈이 없었는데 갑자기 중풍으로 말을 못하다가, 얼마 뒤에 곧 이런 지경에 이르고 말았으니, 향년 53세입니다. 아들 원은 곡 중이라 정신이 혼미하여 손수 글을 올려 부고를 하지 못하고, 또 큰강(揚子江) 이남은 인편의 방도가 없었습니다. 부디 바라옵건대, 이를 대신하시어 오중(吳中)에 부고하여, 천하의 아는 이에게 그의 죽은 날을 알게 하여 죽은 이와 산 사람 사이에 한이 없게 하소서."
객을 보내고 나서, 손수 항주 사람들의 서화와 편지, 그리고 시문 등을 점검해보니 모두 10권이었다. 이것을 빈소 옆에 놓아 두고 구(柩)를 어루만지며 통곡하며 이르노라.
"아! 슬프다. 덕보는 통달 · 민첩하고, 겸손· 단아하며, 식견이 원대하고 이해가 정미하였으며, 더욱이 율력에 뛰어나 혼의(渾儀) 같은 여러 기구를 만들었으며, 생각이 깊고 사려가 있을 뿐만 아니라, 남다른 독창적인 기지가 있었다.
서양 사람이 처음 지구에 대하여 논하면서도, 지구가 돈다는 것을 말하지 못했다. 덕보는 일찍이 지구가 한 번 돌면 하루가 된다고 하였으니, 그 학설이 묘미하고 현오하였다. 다만 저서하기에까지는 이르지 못했으나, 그의 만년에는 더욱 더 지구가 돈다는 것에 대해 자신을 가졌으며, 이에 대하여 조금도 의심이 없었다.
세상의 덕보를 흠모하는 사람들은 그가 일찍이 스스로 과거할 것을 그만두고 명리에 뜻을 끊고서 한가히 앉아 이름난 향(香)이나 태우고 거문고와 비파를 두드리면서 '나는 장차 아무 욕심없이 고요히 스스로 즐기는 태도로 마음을 세속 밖에 놀게 하겠노라'하는 것만 보았지, 특히 덕보가 온갖 사물을 종합정리하여 체계있게 분석하여, 나라일을 맡고 외진 땅에 사신 갈 만하며, 지도할 기략이 있었다는 것은 모른다.
홀로 잘났다고 남에게 드러내는 것을 좋아하지 아니했던 까닭에, 겨우 몇몇 군이나 맡으면서, 장부나 문서를 조심하고 마감일에 앞서 일을 잘 처리함으로써, 하부 관리들은 할 일이 없고 백성들은 잘 순화되게 하는 정도에 불과하였다.
일찍이 제 숙부가 서장관으로 갈 때 따라가 유리창에서 육비, 엄성, 반정균 등을 만났다. 세 사람은 다 집이 전당(錢塘)에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문장과 예술의 선비였으며, 교유한 이들도 모두 중국 내의 저명한 인사였다. 그러나 모두들 덕보를 대유(大儒)라 하여 높이 치켰다. 그들과 더불어 필담한 수만 언(言)은 모두 경전의 요지와 천명· 인성과 고금에 나온 대의(大義)에 대한 논변과 해석이었는데, 폭넓고도 빼어나 이루 말할 수 없이 즐거웠다. 헤어지려고 할 때, 서로 보고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한 번 이별하면 다시 보지 못할 것이니 황천에서 서로 만날 때 아무 부끄러움이 없도록 맹세하자' 하였다. 엄성과는 특히 뜻이 맞았으니 그에게 은근히 간(諫)하기를 '군자가 자기를 드러내고 숨기는 것을 때를 따라 해야 한다.'고 하였을 때, 엄성이 크게 깨달아 뜻을 결단하고는 남쪽으로 돌아갔는데, 그 뒤 몇 해 만에 민(閩: 福建) 땅에서 객사하고 말았다. 반정균이 덕보에게 부고를 하였다. 덕보는 이에 애사(哀辭)를 짓고 향폐(香幣)를 갖추어 용주에게 부치니, 이것이 전당으로 들어갔는데, 바로 그날 저녁이 대상(大祥)이었다. 제사에 모인 사람들은 서호(西湖)의 여러 군에서 온 사람들인데 모두들 경탄을 금치 못하면서 이르기를 '명감(冥感)이 이른 바로다'고 하였다. 엄성의 형 엄과가 향과 전을 태우고 애사를 읽고 초헌을 하였다.
아들 엄앙이 백부라 칭하여 써서 제 아비의《철교유집》을 부쳐 왔는데, 전전하여 9년만에야 비로소 도착하였다. 유집 중에는 엄성이 손수 그린 덕보의 작은 영정이 있었다. 엄성은 민 땅에서 병이 위독할 때 덕보가 준 조선 먹과 향기로운 향을 가슴에 품고 세상을 떠났다. 마침내 먹을 관 속에 넣어 장례를 치렀는데, 오하(吳下)의 사람들은 유별난 일이라 하여 자자히 전하며, 이것을 두고 다투어 가며 서로 시문으로 찬술하였다. 주문조라는 이가 있어 편지를 하여 그 사실을 말해주었다.
아! 슬프다. 그는 살아 있을 때 이미 먼 옛날의 기적과 같이 낙락하였다. 성품을 아는 벗이라면 그의 이름을 반드시 널리 전하려고 할 것이다. 비단 그 이름이 강남에만 두루 전해질 뿐만이 아닐 것이니, (이렇게) 그의 묘에 적지 않더라도 덕보의 이름은 썩지 않을 것이다."
고(考)는 휘가 역(櫟)으로 목사였고, 조고(祖考)는 휘가 용조(龍祚)로 대사간이었으며, 증조고(曾祖考)는 휘가 숙(潚)으로 참판이었다. 모(母)는 청풍 김씨 군수 방(枋)의 딸이다.
덕보는 영종 신해년에 나서 벼슬은 음직으로 선공감 감역에 제수되었고, 이어서 돈녕부 참봉으로 옮겼으며, 세손 익위사 시직에 고쳐 제수되었고, 그 다음엔 사헌부 감찰에 승진되었다가 나중에는 종친부 전부에 전직되었다. 외직에 나아가 태인현감이 되었다가 영천 군수에 승진하였는데, 수년 만에 어머니의 늙음을 이유로 사직하고 돌아왔다. 부인은 한산 이씨 홍중의 딸이고, 1남 3녀를 두었다. 사위는 조우철, 민치겸, 유춘주이다. 그 해 12월 8일에 청주 어느 좌향 언덕에 안장하였다.
왜 절강인가? 이미 밝혔듯이 거기는 바로 홍대용의 세 친구들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홍대용은 연암에 앞서 숙부를 따라 중국기행을 다녀왔다. 그때 유리창(琉璃廠)에서 육비,엄성,반정균등을 만나 수만 마디의 필담을 나누면서 깊은 정을 쌓았다. 짧은 만남 뒤의 긴 이별! 단 한번 만남이었음에도 이들의 정은 말할 수 없이 돈독하여 그간 편지를 주고받은 것이 10여 권에 달하였다. 담담하게 친구의 죽음을 전하던 연암의 필치는 이들과의 교유를 다루면서 더 한층 깊어진다.
지극히 사랑한 친구의 죽음 앞에서 이렇듯 연암은 그의 삶을 이 세 친구들과의 국경을 넘는 우정으로 압축한 것이다. 족보니, 관직이니, 덕행이니 하는 따위는 그저 껍데기요 지리한 나열에 불과하다고 여긴 것일까. 어떻든 이 묘비명 또한 연암 산문의 정수이자 18세기가 낳은 명문이다. 연암처럼 태생적으로 밝고 명랑한 기질을 가진 사람이 이렇게 슬프도록 아름다운 ‘장송곡’을 썼다는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의 묘비명들은 슬픔을 과장하지도 생경하게 토로하지도 않는다. 죽음을 그리는 그의 목소리는 때론 경쾌하고 때론 느긋하기까지 하다. 그런데 바로 그 때문에 오래도록 여운이 남는다.
-고미숙의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중에서-
댓글목록
김윤식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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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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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아저씨, 울~컥 했잖아요.
외할머니 돌아가시던 날, 부고 받으시고 칠순이 넘으신 할머니 남동생께서 오시다가 길이 멀어 끝내 못 오셨죠. 그 어른 마음이 아마 그러셨을 것 같아요.
김항용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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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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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놀라운 발견입니다. 묘비명을 이렇게 자유로운 수필형식으로 쓰다니, 지금도 묘비명이라 보기엔 다소 파격적 문체로 보이는데 당대에는 더욱 엄청난 저항의 목소리가 있었으리라 봅니다. 역시 문체반정이란 말을 들을 만한 위인이요 글들입니다.
누님의 묘비명은 개인적인 슬픔을 숨김없이 산문 형식으로 나타냈습니다. 그러면서 명은 명대로 써 넣었구요.
실학가 홍대용의 묘비에는 편안한 이야기투의 수필 형식 속에 계보와 행장등은 중요한 것만 압축하여 간단히 썼고 명은 쓰지 않은 것이 특색입니다.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도 문제이고, 너무 벗어나는 것도 또한 문제.. 그래서 과유불급이란 중용지도를 제일의 덕으로 보았는가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