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만취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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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만 작성일02-05-18 03:51 조회1,617회 댓글0건본문
만취당(晩翠堂)
(출전 : 의성군지, 의성군지편찬위원회, 1998년 pp459∼460)
---만취당은 점곡면 사촌리(沙村里) 한가운데에 자리한 동발 대청이다. 이 대청
의 배경은 자하산(紫霞山)이며, 이곳에서 6십리 남쪽에 솟은 의성의 명산 금성
산(金城山)이 안산이다. 낙동강의 지류 기천(沂川)이 완만하게 굽어 흐르는 언저
리 200여m 북녘에 세워져 풍수설에 의해 명당이라고 이른다. 이 건물은 송은
(松隱) 김광수(金光粹)의 증손이며, 퇴계 문하의 고제(高弟)였던 만취당(晩翠堂)
김사원(金士元)이 학문을 닦고 후진을 양성하기 위해 1582년에 건조했다. 그는
1539년 이곳 사촌에서 태어나 퇴계선생에게 사사하며 도산(陶山)의 월란정사(月
瀾精舍)에서 수학하고 임진란 때는 근시재(近始齋) 김해(金垓)의 의진에 참여
의성 정제장(整齊將)으로 활약한 바 있다. 난이 끝난 후에는 많은 이재민을 구
휼하여 향중에서 "김씨 의창(金氏 義倉)"이라는 칭송을 받았고, 은의를 입힌 사
람들의 사례는 일체 사양하여, 이 고장 사람들이 오래 칭송하고 추모해 마지
않았는데, 1601년 62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누각의 구조는 정면 4간, 측면 2
간으로 영주 부석사(浮石寺)의 무량수전(無量壽殿)과 함께 국내에서 가장 오래
된 사가(私家)의 목조 건물로 꼽히고 있다. 창건 이후 줄곳 김씨 종가의 대청
겸 문중 집회소로 이용하다가 1727년에는 거실로 사용하기 위해 건물 뒤편 서
쪽에 1간, 동쪽의 2간의 방을 연결하여 지으니 그 양식이 여느 누대 정각과 달
라 학계의 관심을 끌고 있다. 1764년에는 들보를 갈아 넣어 번와를 하는 등 크
게 보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정조조에 영남의 학맥을 이은 천사(川沙) 김종덕(金宗德)의 기문에 의하면
「땅이 후미지고 산은 깊은데, 큰 선비와 운사(韻士 : 시인)가 노닐며 읊음이
무릇 얼마였던고. 당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퇴계선생의 형 온계(溫溪) 이도헌
(李都憲 : 주, 도헌은 大司憲) 선생이 송은공을 문안 시주로 응수하다가 돌아갔
고, 당이 이루어짐에 서애(西涯) 류문충공(柳文忠公) 선생이 누대에 올라 면계했
다. 여헌(旅軒) 장문강공(張文康公) 선생은 일찍이 이곳을 거닐었음에 감개하고
돌아가 이 고을 사람을 만나면 만년송(萬年松)의 안부를 물었다. 또 이호은(李
湖隱), 신란재(申 齋=悅道), 류졸재(柳拙齋=元之), 김학사(金鶴沙=應祖), 김표은
(金瓢隱=是 ), 김지촌(金芝村=邦杰) 등 여러 선생이 이곳에서 읊조렸으니, 그
모두가 옛날을 살피고 후인을 격려하려는 뜻이었다. . . . .」【원문은 생략】
---현판 글씨는 만취당 김사원과 동문인 한석봉(韓石峯)이 썼다. 1971년 김덕화
경북지시가 내방했을 때 보수비 60만원을 지원하여 일부 수리했고, 1983년 지
방유형문화재 제169호로 지정된 바 있다.
참고문헌 「의성의 전통」「의성문화」
만취당(晩翠堂)
(출전 : 의성군지, 의성군지편찬위원회, 1998년 pp1465)
---사촌 김씨 종실(宗室)로 사용되어 온 조선조 특유의 11간 대청 건물이다. 400
여년전, 이곳에서 약 2㎞ 밖에 있었던 신라때의 사찰 문루를 뜯어 옮겨 지었다
고 하니 자재는 천년이 넘었으리라고 짐작된다. 부석사 무량수전과 더불어 국
내에서 가장 오래된 사가의 목조 건물이다. 건축이후 수많은 전란에 조금도 훼
손되지 않았고 지금은 문중 집회장소 또는 경노당 구실도 함께 하고 있다. 현
판은 한석봉 글씨라고 전한다. 지방문화재 제169호로 지정되었다.
▣ 김태서 - 글 감사드립니다.
▣ 김은회 -
▣ 김항용 -
(출전 : 의성군지, 의성군지편찬위원회, 1998년 pp459∼460)
---만취당은 점곡면 사촌리(沙村里) 한가운데에 자리한 동발 대청이다. 이 대청
의 배경은 자하산(紫霞山)이며, 이곳에서 6십리 남쪽에 솟은 의성의 명산 금성
산(金城山)이 안산이다. 낙동강의 지류 기천(沂川)이 완만하게 굽어 흐르는 언저
리 200여m 북녘에 세워져 풍수설에 의해 명당이라고 이른다. 이 건물은 송은
(松隱) 김광수(金光粹)의 증손이며, 퇴계 문하의 고제(高弟)였던 만취당(晩翠堂)
김사원(金士元)이 학문을 닦고 후진을 양성하기 위해 1582년에 건조했다. 그는
1539년 이곳 사촌에서 태어나 퇴계선생에게 사사하며 도산(陶山)의 월란정사(月
瀾精舍)에서 수학하고 임진란 때는 근시재(近始齋) 김해(金垓)의 의진에 참여
의성 정제장(整齊將)으로 활약한 바 있다. 난이 끝난 후에는 많은 이재민을 구
휼하여 향중에서 "김씨 의창(金氏 義倉)"이라는 칭송을 받았고, 은의를 입힌 사
람들의 사례는 일체 사양하여, 이 고장 사람들이 오래 칭송하고 추모해 마지
않았는데, 1601년 62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누각의 구조는 정면 4간, 측면 2
간으로 영주 부석사(浮石寺)의 무량수전(無量壽殿)과 함께 국내에서 가장 오래
된 사가(私家)의 목조 건물로 꼽히고 있다. 창건 이후 줄곳 김씨 종가의 대청
겸 문중 집회소로 이용하다가 1727년에는 거실로 사용하기 위해 건물 뒤편 서
쪽에 1간, 동쪽의 2간의 방을 연결하여 지으니 그 양식이 여느 누대 정각과 달
라 학계의 관심을 끌고 있다. 1764년에는 들보를 갈아 넣어 번와를 하는 등 크
게 보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정조조에 영남의 학맥을 이은 천사(川沙) 김종덕(金宗德)의 기문에 의하면
「땅이 후미지고 산은 깊은데, 큰 선비와 운사(韻士 : 시인)가 노닐며 읊음이
무릇 얼마였던고. 당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퇴계선생의 형 온계(溫溪) 이도헌
(李都憲 : 주, 도헌은 大司憲) 선생이 송은공을 문안 시주로 응수하다가 돌아갔
고, 당이 이루어짐에 서애(西涯) 류문충공(柳文忠公) 선생이 누대에 올라 면계했
다. 여헌(旅軒) 장문강공(張文康公) 선생은 일찍이 이곳을 거닐었음에 감개하고
돌아가 이 고을 사람을 만나면 만년송(萬年松)의 안부를 물었다. 또 이호은(李
湖隱), 신란재(申 齋=悅道), 류졸재(柳拙齋=元之), 김학사(金鶴沙=應祖), 김표은
(金瓢隱=是 ), 김지촌(金芝村=邦杰) 등 여러 선생이 이곳에서 읊조렸으니, 그
모두가 옛날을 살피고 후인을 격려하려는 뜻이었다. . . . .」【원문은 생략】
---현판 글씨는 만취당 김사원과 동문인 한석봉(韓石峯)이 썼다. 1971년 김덕화
경북지시가 내방했을 때 보수비 60만원을 지원하여 일부 수리했고, 1983년 지
방유형문화재 제169호로 지정된 바 있다.
참고문헌 「의성의 전통」「의성문화」
만취당(晩翠堂)
(출전 : 의성군지, 의성군지편찬위원회, 1998년 pp1465)
---사촌 김씨 종실(宗室)로 사용되어 온 조선조 특유의 11간 대청 건물이다. 400
여년전, 이곳에서 약 2㎞ 밖에 있었던 신라때의 사찰 문루를 뜯어 옮겨 지었다
고 하니 자재는 천년이 넘었으리라고 짐작된다. 부석사 무량수전과 더불어 국
내에서 가장 오래된 사가의 목조 건물이다. 건축이후 수많은 전란에 조금도 훼
손되지 않았고 지금은 문중 집회장소 또는 경노당 구실도 함께 하고 있다. 현
판은 한석봉 글씨라고 전한다. 지방문화재 제169호로 지정되었다.
▣ 김태서 - 글 감사드립니다.
▣ 김은회 -
▣ 김항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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