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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영공(휘 恂) 묘소를 찾아서_02. 문영공의 장지(葬地)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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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식 작성일07-03-19 01:17 조회2,013회 댓글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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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영공(휘 恂) 묘소를 찾아서_02. 문영공의 장지(葬地) 기록


이 글은 윤만 종친, 발용 종친, 주회 종친 등 여러 현종들께서 올려주신 자료의 도움이 컸음을 밝힙니다.


문영공 묘지석 내용은 대동보 중에서는 기미대보가 처음이며, 관련 서적으로는 <역주 고려묘지명집성>, <안양문화유적총람> 등에 실려 있다.

기미대보에 기록된 문영공의 장지(葬地)는 덕수현 마산(德水縣馬山)이다. 묘지문 해독과 번역은 묘지석 발견 당시 이 일에 관여했던 문중 어르신들에 의해 이루어진 듯하다.

이 해독문이 <역주 고려묘지명집성>에 실려 있는데, 이 책의 엮은이[編者 : 김용선]는 묘지석을 친견하지 못한 것이 분명하다.

기미대보에 실린 문영공 묘지문은 일부 글자가 누락돼 있는데, <역주 고려묘지명집성>에 그 부분이 실려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는 <안양문화유적총람> 역시 마찬가지다. 누락된 글자는 안양시 관양동에 있는 문영공 묘비에도 새겨져 있다. 이로 보아 이 책의 엮은이는 현장을 답사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결과적으로 <역주 고려묘지명집성>이나 <안양문화유적총람>은 1차 기록을 보고 전사한 2차 기록에 불과하므로 문영공의 장지 기록은 기미대보에서부터 시작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기록은 문영공께서 돌아가신 고려 충숙왕 8년(1321년)에 민지(閔漬) 선생이 찬(撰)한 것이므로 문영공 묘소의 현재 위치를 찾기 위해서는 당시 행정구역이었던 덕수현의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는 것이 핵심이라 할 수 있다.

고려 황도(皇都) 개성(開城)과 인근 지역은 수많은 전란과 행정구역 개편으로 수시로 경계가 변해 왔다. 게다가 고려시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왕조의 교체는 물론 일제 강점기와 광복, 그리고 6.25동란 등으로 인해 대대적인 행정구역 개편이 이루어져 현재는 덕수현의 옛 위치를 파악하는 것이 간단하지 않다.


<자료 및 주석>

◆번역문 및 원문 1(기미대보, 제1권 213쪽 및 219쪽)

- 전략 - 영돈永暾)의 문중(門中)에서 이미 장지(葬地)를 덕수현 마산(德水縣馬山) 위에 잡아놓고 장차 장예(葬禮)를 지내려고 하는데 나는 그의 선친(先親)의 친구(親舊)인지라 공(公)의 행장(行狀)을 가지고 와서 명(銘)을 지어달라고 간청(懇請)함으로 내가 비록 병(病)들었으나 구지 사양(辭讓)치 못하고 받아서 명(銘)을 쓰노라.(永暾等旣卜兆于德水縣馬山將葬也以予爲先公親舊具公之行狀乞銘甚切予雖病不忍堅拒受而銘之) - 하략 -


◆번역문 및 원문 2[『역주 고려묘지명집성(상)』(2001), 김용선 : 국립문화재연구소_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에서 재인용]

- 전략 - 영돈 등이 덕수현 마산(德水縣 馬山)에 무덤을 정하고 장례를 치르려고 하면서, 내가 선공의 친구라고 하여 공의 행장을 갖추어서 매우 간절하게 묘지명을 부탁하였다. 내가 비록 병들었지만 차마 굳게 거절하지 못하고 수락하고 글을 짓는다.(永暾等旣卜兆于德水縣馬山將葬也以予爲先公親舊具公之行狀乞銘甚切予雖病不忍堅拒受而銘之) - 하략 -


◆덕수현(德水縣) : 경기 개풍군 일부 지역의 통일신라·고려시대 행정구역.

본래는 고구려에 속하여 덕물현(德勿縣)·인물현(人物縣)이라 하다가 통일신라시대의 경덕왕 때 덕수현으로 고쳤다. 고려시대에도 그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1442년(세종 24년) 해풍군(海豊郡)과 합하여 풍덕군(豊德郡)을 이루고 1914년 개성군(開城郡)과 통합하여 개풍군이 되었다. 덕수 이씨·덕수 장씨의 관향(貫鄕)으로 많이 알려져 있으며, 고려시대 문종 때 12년에 걸쳐 국고를 기울여 덕수현에 지었다는 국립사찰 흥왕사(興王寺) 터가 매풍군 봉동면(鳳東面) 흥왕리에 남아 있다. - 네이버 백과사전


◆덕수현(德水縣) : 개성직할시 판문군에 있던 옛 고을.

본래 백제의 덕물현(德勿縣) 또는 인물현(仁勿縣)인데, 삼국 통일 후 757년(경덕왕 16년)에 덕수현으로 개칭, 개성군의 영현(領縣)이 되었다. 고려 문종대인 1056년에는 흥왕사(興王寺)를 읍의 중심지에 세우고 치소(治所)를 이전하였다. 1389년(공양왕 1)에 감무를 두었다가 조선 초인 1398년(태조 7년)에 해풍군(海豊郡:풍덕)에 속현으로 병합되었다. - 엠파스 백과사전


◆누락된 글자

公諱恂字歸厚系出新羅王金傅內孫三韓壁上功臣司從亞父三重大匡金宣平公爲金傅十五代孫而安東府卽其桑梓之鄕也

공의 휘는 순(恂), 자는 귀후(歸厚)이다. 가계(家系)는 신라 왕 김부(경순대왕)에서 나왔는데 삼한벽상공신사종아부삼중대광 김선평의 내손(內孫)이다. 공은 김부의 15대손이며, 안동부는 곧 선대(先代)의 고향이다.

상재지향(桑梓之鄕) : 선대로부터 대대로 살던 고향.

댓글목록

김태서님의 댓글

profile_image 김태서
작성일

  오랜만에 안부전합니다.
별일없으시죠. 평안하시지요.
머잖아 한바탕 꽃놀이로 시끌시끌 하겠지요
봄이오는 문턱에 향긋함이 가득 하시길 바랍니다
햇살은 봄빛이나 아침 저녁 바람이 찹습니다
늘 건강 조심하시길 바랍니다.

김윤식님의 댓글

profile_image 김윤식
작성일

  아저씨 그간 별고 없으셨는지요?
소식 궁금했습니다.
햇볕 따뜻한 날 봄나들이 한번 가고 싶습니다.
자주 뵙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