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촉석정충단비각
페이지 정보
정보미 작성일02-05-18 09:36 조회1,509회 댓글0건본문
촉석정충단비(矗石旌忠壇碑)
지정번호 |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호 |
소 재 지 |
진주시 본성동 500-1 |
지정일자 |
1972년 2월 12일 |
규 모 |
비높이 143㎝, 폭92㎝,두께 21cm |
시 대 |
조선 숙종 12년(1686) |
이 비는 현재 촉석(矗石) 광장에 위치하고 있다. 비신은 수성암(水成岩)을 사용하였으며 비문은 하단부가 마멸되었다. 귀부(龜趺)는 비신과 같은 수성암(水成岩)으로 높이 35cm이며 한 돌로 조각되어 있다. 이수(이首)는 쌍용(雙龍)을 조각하고 있는데 쌍용이 구름속에서 여의주를 놓고 서로 다투고 있는 모습을 나타낸 형태이며, 그 아래부분에는 화문(花紋)을 조각하고 있어서 이채롭다. 다른 비석과 다르게 이수부분이 커서 윗부분이 넓고 하부가 좁은 사다리형으로 되어 있다.
비문은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에 실려 있으며, 아랫쪽이 판독 되지 않을 뿐 비교적 양호한 편이다. 비를 세운 동기는 임진왜란 당시 김시민(金時敏)장군을 비롯한 진주성 싸움에서의 충정과 전공을 후세에 길이 전하기위해서다.
즉 2만명의 왜군이 패배하였던 진주성의치욕을 씻고자 왜적은 다음 해 선조(宣祖) 26년(1593)에 제2차의 진주성 공략을 하게 된다. 왜군은 12만1천6백여명의 대군으로 진주성을 세겹으로 에워싸며 공격하자 중과부적으로 6월29일 성이 무너졌다. 이러한 사실들을 전해주는 이 비는 진주성에서 싸우다 순국한 충절을 기린 비라고 하겠다. 비문은 정헌대부 이민서(正憲大夫 李敏徐)가 지었고 성균관사 신익상이 비문을 적었으며 홍문관제학 지연경사 김만중이 두전(頭篆)을 썼다.
비문에는 진주성에서 싸우다 순국한 인물에 대하여 기술하고 그 뜻을 기리고 있는데 대표적인 인물로는 고종후(高從厚 1554∼1593)는 임진왜란 당시 부친과 함께 의병을 일으키고 아버지와 아우가 전사하자 다시 의병을 일으켜 여러 곳에서 싸우다가 이곳 진주성에서 최후를 맞이하였다. 또한 비문은 김천일(金千鎰), 최경회(崔慶會)등과 남강(南江)에 투신하게 되는 그행적을 기록하고 있다.
또 한명은 황진(黃進 ?∼1593)으로 황희(黃喜)의 5대손(代孫)이다. 이는 1591년 통신사와 함께 일본을 다녀와서 그들의 침입을 예언하기도 했으며 임진왜란때에는 용인(龍仁)에서 왜군과 교전하다 패전하자 진안(鎭安)에서 왜적의 선봉장을 사살하고 적을 격퇴하는 전공을 올렸으며 진주성에서 마지막까지 성을 고수하다 전사한 인물이다. 이 외에도 장윤(張潤)등 진주성에서 순국한 인물을 비문에 기록하고 있어 임란의 전적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고 있다.
< 출처 : 진주시청 홈페이지 >
▣ 김항용 -
▣ 김태서 -
▣ 김영환 -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