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봉공(南峰公) 휘 치(諱 緻) 묘갈(墓碣) 탁본(拓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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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발용 작성일07-03-24 18:48 조회1,873회 댓글1건본문
남봉공(南峰公) 휘 치(諱 緻) 묘갈(墓碣) 탁본(拓本)
시대 조선
연대 1674년(현종15년)
유형/재질 비문 / 돌
문화재지정 비지정
출토지 충청북도 증평군 증평읍 율리
소재지 (한국)경기도박물관-경기도 용인시 기흥읍 상갈리 85,
(한국)-충청북도 증평군 증평읍 율리
서체 해서(楷書)
찬자/서자/각자 김득신(金得臣) / 최선(崔渲) / 미상
충청북도 증평군 증평읍 율리(忠淸北道 曾坪郡 曾坪邑 栗里)에 자리한 김치묘소에 있는 김치묘갈(金緻墓碣)이다. 1674년(현종 15년)에 세워진 이 묘갈의 묘갈문은 그의 아들 김득신(金得臣)이 짓고, 글씨는 손녀사위(孫壻)인 최선(崔渲)이 쓴 것이다. 김치(1577~1625년)는 1597년(선조 30년)에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하여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에 임명되면서 벼슬길에 들어섰다. 이후 병조좌랑(兵曹佐郞), 이조참의(吏曹參議)와 병조참지(兵曹參知) 등을 역임하였으며, 광해군의 학정이 심해지자 병을 핑계로 관직에서 물러나 두문불출하였다. 인조반정(仁祖反正) 때에 대북파(大北派)로 몰려 유배를 당하였으며, 유배에서 풀려나 동래부사(東萊府使)를 거쳐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가 되었다. 묘갈문에는 그의 가계(家系)와 관력(官歷), 그리고 가족사항이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다.
<자료출처 : 금석문종합영상정보시스템>
댓글목록
김항용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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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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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현재 묘소에는 1957. 3. 에 중건한 묘비가 서 있고 상기 구 묘갈은 없어졌습니다. 주변에 묻었다면 다시 세워야 하리라 보는데---
없어진 묘갈의 탁본을 찾았으니, 이런 보물이 어디 있습니까. 감사합니다. 홈 <김치>란에 올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