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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영공(휘 恂) 묘소를 찾아서_04. 덕수현 치소는 2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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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식 작성일07-03-28 14:02 조회3,692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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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영공(휘 恂) 묘소를 찾아서_04. 덕수현 치소는 2군데

덕수현은 고려 성종 14년(995년)에 설치된 6개 적현(赤縣) 중 하나로서 개성부(開城府)가 직접 관장하는 주요 지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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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현과 기현. 흥왕리는 잘못 표시되었다. 덕수현 서쪽이 흥왕사가 있던 흥왕리이다. <고려시대 開京 연구> 64쪽.

당시 덕수현 치소(읍치 : 현청 소재지)는 개경에서 동남쪽으로 20여 리 떨어진 곳으로 덕적산(德積山) 남쪽 기슭에 있었다.
그러나 문종 10년(1056년) 덕수현 치소 서쪽에 흥왕사(興王寺)가 창건되면서 읍치를 양천(楊川)으로 옮겼다. 덕적산은 오늘날의 지도에 덕물산(德勿山)으로, 흥왕사 자리는 흥왕리(興王里 또는 興旺里)로 표시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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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물산과 흥왕사 위치 <고려의 황도 개경> 85쪽

문종의 원찰인 흥왕사는 속장경을 판각한 2,800여 칸의 대규모 사찰인데, 무인정권 이후 조선이 개국할 때까지 크고 작은 정치적 사건들이 발생한 곳으로 우리 문중과도 무관치 않을 것으로 추측된다.

여하튼 고려사 등에 의하면 흥왕사 창건에 의해 덕수현 치소는 개경에서 동남쪽으로 40여 리 떨어진 양천(楊川)으로 남하할 수밖에 없었다. 이곳은 6·25동란 이전까지 개풍군 중면 덕수리 애포동으로 불리던 곳이다. 이 지역은 한강과 임진강, 동강(東江), 그리고 서해의 수운(水運)을 통해 각종 물산이 집결했던 곳으로 오늘날에도 거대한 규모의 창고 자리가 남아 있다고 한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덕수현 남하는 흥왕사 창건과 더불어 왕권 강화를 위한 경제적 조치도 내포하고 있는 복합적인 요인에 의해 이루어진 것임을 추측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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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구요람 中 개풍군 부분도

덕수현 이전 사실과 흥왕사에 관해서는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를 비롯해 개경 읍지인 송도지, 중경지, 일제 강점기에 발간된 개경지, 개경군면지 등에 자세하므로 생략한다. 2006년에 발간된 <개풍군 중면지(開豊郡中面誌)>에 의하면 남하한 덕수현 읍치는 “여니산(如尼山) 하(下) 남서방(南西方)의 포중(圃中 : 밭)”으로 밝히고 있다.

문영공께서 돌아가신 것은 고려 충숙왕 8년(1321년)이므로 덕수현이 개풍군 남부로 이동한 후의 일이다.

현(縣)의 관할구역은 문헌 기록이나 사료가 남아 있지 않아 어느 정도 범위인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각종 자료들을 살펴보면 군(郡)보다는 작으나 면(面)보다는 훨씬 넓은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읍치 이전으로 인해 덕수현의 관할구역이 변경되었는지, 그대로 유지된 채 읍치만 이전했는지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

이 때문에 문영공 장지를 찾아가는 데 두 지역을 검토하느라 어려움을 겪었다. 하지만 문영공께서 돌아가신 연대를 고려할 때, 장지(葬地)는 덕물산보다는 여니산 인근일 것 같다는 심증으로 개풍군 남부를 집중적으로 검토하였다.

개풍군 중면 덕수리 일대 지명(地名)에서 말[馬]과 관련된 곳이 두어 군데 나타나기는 했으나 결정적 단서인 ‘마산(馬山)’이라는 산은 발견할 수 없었다. 아쉬움이 남기는 했으나, 지도에서 ‘양천(楊川)’으로 표시된 지역을 중심으로 자료를 다시 검토할 수밖에 없었다.

<자료 및 주석>

■高麗史56卷-志10-地理1-002
○德水縣本高勾麗德勿縣[一云仁物縣.]新羅景德王改今名. 顯宗九年爲開城縣屬縣文宗十年創興王寺于縣移縣治於楊川十六年來屬恭讓王元年置監務. 有祖江渡引寧渡.

덕수현은 원래 고구려의 덕물현(인물현이라고도 한다)인데, 신라 경덕왕이 지금 이름[덕수현]으로 고쳤다. 현종 9년 개성현의 속현이 되었으며, 문종 10년에 이 현에 흥왕사를 창건함에 따라 현치를 양천으로 옮겼다가 문종 16년에 본 부(개성부)에 예속시켰다. 공양양 원년(1389년)에 감무를 두었다. 조강나루와 인녕나루가 있다.

■高麗史7卷-世家7-文宗1-10-04-1056
癸卯始創興王寺于德水縣.

계묘년에 흥왕사를 덕수현에 창건하기 시작하였다.

■<中京誌> 卷之七
德水廢縣 : 在府南二十里本高句麗德勿縣一云仁物新羅改今名高麗因之顯宗九年屬開城縣爲尙書所掌文宗十年創興旺寺于縣移縣治於楊洲(楊川의 오자)十七年直隸開城府恭愍王元年置監務本朝 太祖七年省監務屬豊德

개성부 남쪽 20리에 있다. 본래 고구려 덕물현인데, 인물현이라고도 한다. 신라가 지금 명칭으로 고쳤으며, 고려시대에는 이를 토대로 현종 9년 개성현에 속하게 한 뒤 상서에서 관할토록 하였다. 문종 10년 덕수현에 흥왕사를 창건함에 따라 현치를 양주로 옮기고, (문종) 17년에 개성부 직할로 예속시켰다. 공양양 원년에 감무를 두었으며, 본조(조선조) 태조 7년 감무를 없애고 풍덕현에 예속시켰다.

※고려사절요와 기타 개경 읍지류는 내용이 대동소이하므로 생략한다.
※일부 읍지류에 ‘양천(楊川)’을 ‘양주(楊州)’라 한 것은 오기 또는 착오로 보인다.

■<開豊郡中面誌> 74~75쪽
덕수현청 폐지(德水縣廳廢址)

삼국시대에 이어 통일신라에서 고려조와 이조(李朝)에 이르기까지 덕수현이 존립함에 덕수리 애포동(艾浦洞)이 덕수현청 소재지였다고 합니다.
여니산(如尼山) 하(下) 남서방(南西方)의 포중(圃中) 지금은 민가 외 전작(田作) 농지이나 유석(遺石)과 무수(無數)의 개와(蓋瓦) 조각들이 출토되며 흩어져 있습니다. 장기간 청사(廳舍)를 유지되어 왔으리라 보나 폐청된 지 오랜 세월이다 보니·····.
- 중략 -
·····옛 덕수현의 덕수골을 향토의 면민(面民)이 영세토록 간직하려 함이 아닌가 합니다.

■지도류
광여도(19세기 전반 제작), 해동지도(1750년대 초 제작), 대동여지도(1864년 수정판), 청구요람[1834년(순조 34)에 김정호가 작성한 靑邱圖의 이본], <개성군면지> 부도, <동국여지승람> 부도, 현대 지도(국립지리원 간행 개풍군, 장단군 지도), 개풍군지 부도(1984년), 장단군지 부도 및 장단읍지 부도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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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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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구체적이고 놀라운 자료를 근거로 한 묘소지 추적에 놀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