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영공(휘 恂) 묘소를 찾아서_05. 임계면은 없다
페이지 정보
김윤식 작성일07-04-04 05:46 조회2,058회 댓글3건본문
문영공(휘 恂) 묘소를 찾아서_05. 임계면은 없다
청구요람에 ‘양천(楊川)’으로 표시된 지역은 옛 덕수현 읍치인 덕수리와 연접한 개풍군 임한면(臨漢面) 북부의 월암천(月岩川)이 흐르는 곳이다. 월암천은 중연천(中蓮川)이라고도 하는데, 상도면과 중면에서 각각 발원한 두 물줄기가 임한면 월암리에서 합류한 다음 서남쪽으로 흘러가 망포천을 통해 서해로 빠져나간다. 월암천 북쪽에는 채연리와 월암리가, 아래쪽에는 가정리(佳井里)가 있다.
문영공 묘지석 발견 장소에 대해 <기미대보>에는 “개풍군 임계면 가정리(開豊郡 臨溪面 佳井里)”로 밝히고 있다. 반면에 <안동김씨보감>의 ‘연대고(年代考)’에는 “개풍군 가정리(開豊郡 佳井里)”로만 적혀 있어 면(面)에 대한 기록이 없다.
◆기미대보 기록
文英公(諱 恂) 墓誌石發見及移葬經緯
嗚呼 公之墓所失傳 未知何代而歲壬午春 誌石 發見於開豊郡臨溪面佳井里馬山東麓 張姓塚附近 奉審後欲爲仍舊守護卽張姓之肆惡非常勢不得已翌年癸未春遷奉于始興郡安養市冠陽一洞後麓艮坐之原 竝設配位齊平郡夫人陽川許氏靈壇 - 이하 생략
문영공(휘 순) 묘지석 발견과 이장 경위
오호, 공의 묘소를 실전한 것이 어느 대(代)인지 알 수 없으나 임오년 봄에 묘지석을 (경기도) 개풍군 임계면 가정리 마산 동쪽 기슭의 장씨 무덤 부근에서 발견하였다. 장차 묘소를 받들고 돌보기 위해 옛 묘소(자리)를 수호코자 하였으나, 장씨들이 악독한 성질을 부리는 것이 평상시의 상황이 아니기에 부득이 다음 해인 계미년 봄에 묘소를 (경기도) 시흥군 안양시 관양1동 뒷산 간좌의 언덕으로 옮기면서 아울러 배위 제평군부인 양천 허씨의 영단을 설단하였다. - 이하 생략
※봉심(奉審) : 임금의 명(命)으로 능이나 묘를 보살피는 일.
기미대보의 기록을 보면 당시 문중 어르신들께서 문영공 옛 묘소를 수호하고자 노심초사했으며, 이 때문에 장씨들의 방해를 무릅쓰고 한동안 현지에 머물렀던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묘지석 발견 장소 기록에 면(面) 이름을 잘못 적었을 가능성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이 당시 개풍군에 ‘임계면’이라는 명칭이 발견되지 않는다는 점이 문제다.
송경지, 중경지, 신증동국여지승람, 개성지, 개성군면지, 개성구경(開城舊京) 등 문헌자료는 물론이고, 광여도를 비롯한 각종 지도의 방리(坊里)조를 살펴보면 고려시대 덕수현의 부방(部坊) 명칭은 밝혀지지 않았으며, 조선조 역시 이 지역에 임계면이라는 명칭은 발견되지 않는다. 묘지석이 발견된 일제 강점기나 광복 이후도 마찬가지다. 인접한 장단군에서도 ‘임계면’이란 명칭은 찾아볼 수 없었다.
■ 개풍군의 면(面) 명칭 변화
시기 |
府/郡/縣 |
部/面 |
비고 | |
고려 |
덕수현 |
미상 |
||
세종 24년 |
풍덕군 |
東面, 西面, 南面, 北面, 中面, 郡中面, 郡南面, 郡北面 |
*남면 : 임한면의 전신 | |
효종 원년 |
풍덕부 |
東面, 西面, 德北面, 德中面, 德南面, 郡南面, 郡中面, 郡北面 |
*효종 비 仁宣王后 張妃(德水人 張維의 딸)의 관향이므로 府로 승격 *府로 승격 후 고종 3년(1866년) 郡으로 환원되기까지 면 이름에 약간 변동 있으나 대동소이함. | |
순조 23년 |
개성부 |
中北面, 東南面, 西南面, 邑北面 |
*개성부로 병합되면서 종전 8개 면에서 4개 면으로 축소 *남면은 동남면으로 합속 | |
근대 |
1914년 |
개성군 |
松都面, 東面, 靑郊面, 上道面, 進鳳面, 中面, 臨漢面, 興敎面, 大聖面, 光德面, 南面, 西面, 中西面, 北面, 嶺北面, 嶺南面 |
*조선총독부-京畿道令-제3호 |
1930년 |
개풍군 |
西面, 南面, 北面, 中面, 土城面, 靑郊面, 嶺南面, 嶺北面, 光德面, 大聖面, 上道面, 興敎面, 鳳東面, 臨漢面 |
*1930년 12월 制令 제12호 지방행정제도 개혁 *송도면 및 인접 일부지역이 개성군으로 승격하면서 개풍군에서 분리됨. | |
광복(1945년) |
개풍군 |
상동 |
||
1957년 |
개풍군 |
상동 |
<기미대보>, <안동김씨보감> 발간 |
위의 표에서 보는 것처럼 ‘임계면(臨溪面)’은 찾아볼 수 없고, ‘임한면(臨漢面)’만 나타날 뿐이다.
그렇다면 왜 임계면으로 기록된 것일까?
첫째, 묘지석 발견 당시부터 면(面) 이름을 잘못 알고 있었을 것으로 가정할 수 있지만 그 가능성은 없다. 기미대보 기록에서 보듯이 당시 문중 어르신들께서 현지를 답사한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둘째, 기미대보를 수보하기 위해 옮겨 적다가 오자가 발생한 경우를 가정할 수 있으나, 현실적으로 확인하기가 어렵다.
셋째, 문중 어르신들께서 묘지석 발견 장소를 기록할 때 초서체 또는 행서체를 주필(走筆)로 적은 경우를 가정해 볼 수 있다. ‘漢’과 ‘溪’의 초서체는 어느 정도 닮았다. 이 때문에 주필로 적은 초서 또는 행서 기록을 해서체로 옮겨 적는 과정에서 현지 사정을 잘 모르는 사람일 경우 착오를 일으킬 가능성이 존재한다.
면(面) 이름에 대한 고민 흔적은 <안동김씨보감> ‘연대고(年代考)’에서 엿볼 수 있다. 연대고는 면(面) 이름을 적을 자리가 충분한데도, 굳이 기록하지 않았다.
면 이름을 적지 않아도 의사전달이 가능하겠지만, 개풍군에 대해 잘 모르는 경우에는 리(里) 명칭만으로는 어느 지역인지 찾기가 매우 어렵다. 그런데도 연대고의 경우에는 중요한 기록임에도 불구하고 면(面)을 기록하지 않았다.
이는 연대고를 기록할 당시 ‘임계면’을 확인하지 못했기 때문에 신중에 신중을 기하고자 불명확한 ‘임계면’을 기록하지 않은 문중 어르신들의 깊은 뜻이 아닌가 하는 상상을 해 본다.
여하튼 ‘임계면(臨溪面)’은 ‘임한면(臨漢面)’의 오자임이 분명해졌다.
<자료 및 주석>
■ 개풍군 지도
▲맨 아래쪽 한강과 임진강이 합류하는 지점이 임한면이다.
■ 개성군의 행정구역 명칭
■ 참고자료 : 개성의 部坊, <邑誌 11 경기도2-한국지리지총서>, 아세아문화사
<松都誌> 天 卷之二 (1782년 발간)
◆部坊 49~50쪽
高麗太祖二年立市廛辨坊里成宗玄宗又改定五部三十五坊 _東部七坊曰安定奉香令昌哲令楊堤弘仁倉令 南部五坊曰德水德豊安興德山安申 西部五坊曰森松午正乾福鎭安香川 北部十坊曰正元法王興國五冠慈雲王輪堤上舍乃獅子巖內天王 中部八坊曰南溪起元弘道鶯溪由巖變羊廣德星化
本朝 世宗十二年以開城爲外官不可仍舊制遂省爲四部四坊
東仁興坊 西義興坊 南禮安坊 北智安坊
近世改爲四部七面 _有都副風憲各一人掌糾正民俗各里又有導位各一人 東部三里 _太廟○八字洞○京坊 南部五里 _都助○郭莊○九里介○惠民○旀造井 西部二里 _路前○太平館 北部七里 _ 池波○皮井○梨井○禮賓○二架閣○六架閣○兩城 東面四里 _大鳥足○鉢松○白冬音○籍田 靑郊面五里 _棑也洞○廣川○墨只洞○麻田○玄化 南面十里 _修隅○朽石○栗洞○新里○昌陵○十鷹○禮成江○玉山○照濟○軍隱 西面六里 _開城○光井○弘京○江里○碧瀾渡○蓮山 中西面四里 _麗朝陵○煙霞洞○墨寺洞○錢浦 北西面七里 _鳥足○食峴○加土尾○者羅洞○鎭里○梨浦○紙洞 北東面七里 _染川○吉水○古德○月古○頭毛洞○吉祥○山城城內
<中京誌> 卷之二 (1855년경 발간)
◆部坊 256~257쪽
高麗太祖二年立市廛辨坊里成宗玄宗又改定五部三十五坊 _東部七坊曰安定奉香令昌哲令楊堤弘仁倉令 南部五坊曰德水德豊安興德山安申 西部五坊曰森松午正乾福鎭安香川 北部十坊曰正元法王興國五冠慈雲王輪堤上舍乃獅子巖內天王 中部八坊曰南溪起元弘道鶯溪由巖變羊廣德星化
本朝 世宗十二年以開城爲外官不可仍舊制遂省爲四部四坊 _東仁興坊 西義興坊 南禮安坊 北智安坊
近世改爲四部七面丙辰移屬金川大小南兩面長湍沙川以西 沙川以西合于東部 癸未合屬豊德四面 豊德本八面今改爲四面 凡四部十三面一百二十三里 有都副風憲各一人掌糾正民俗各里又有導位各一人 東部三里 太廟○八字洞○京坊 南部四里 都助○郭莊○九里介○旀造井 西部二里 路前○太平館 北部五里 池波○梨井○禮賓○六架閣○兩城 東面五里 高頭山○大鳥足○鉢松○白冬音○籍田 靑郊面六里 棑也洞○德巖○裕陵○廣川○墨只洞○女化('玄化'의 오자) 南面十一里 修隅○朽石○栗洞○新里○昌陵○十鷹○禮成江○玉山○照濟○軍隱○獐山 西面六里 開城○光井○弘京○江里○碧瀾○蓮山 中西面五里 麗陵○鵠嶺○煙霞洞○墨寺洞○錢浦 北西面七里 鳥足○食峴○加土尾○者羅洞○鎭里○梨浦○紙洞 北東面六里 染川○吉水○古德○月古○吉祥○城內
大南面四里 長佐洞○升谷○石村○位川 小南面三里 紅花○斗谷○朴淵 中北面十九里 興旺○炭洞○山上○長芝山○松山○食峴○栗串○大足○都羅山○金巖○左後○黃梅○艾浦○大也峴○倉內○炭谷○箭川○東江○梨谷 東南面十五里 丁串○上松江○下松江○柳川○佳井○士洞○採蓮○月巖○宮川○蛇串○官谷○望浦○興敎○照門○領井 西南面八里 興川○山歸○古郡○森薺○中連○高尺○黃江○寺盆 邑北面十四里 邑內○新竹○羊司○杜門○歸道○高陽○禾洞○郭峴○鵲谷○仙山○上道○下道○楓川○蓮洞
댓글목록
김항용님의 댓글
![]() |
김항용 |
---|---|
작성일 |
방대하고 명확한 자료에 의한 추론. 그저 놀라워 벌어진 입이 다물어 지지 않습니다.
--臨溪面은 존재하지 않는다. 臨漢面은 존재한다. 漢을 溪로 오기한데서 비롯된 오기의 연속이다. 부분적 자료에서 '계와 한'의 명확한 글자 판독이 안되어 면단위는 쓰지 않은 기록이 그 가능성을 더욱 높여 준다. 가정리는 개성군 임한면에 있다.
---감사합니다. 아우님의 큰 노력으로 커다란 숙제가 또 하나 해결되어 가고 있습니다. <마산>의 위치가 어디쯤가가 또 남는군요.
홈에 올리고자 하나 현재 신 홈에 자료를 옮기고 있는 중입니다. 약 1주일 후에 올리겠습니다.
김용주님의 댓글
![]() |
김용주 |
---|---|
작성일 |
윤식아저씨 방대한 자료 확인 하시느라 고생하셨 읍니다 감사합니다.
김상석님의 댓글
![]() |
김상석 |
---|---|
작성일 |
윤식님께서 정확한 근거를 지적하여 주셨습니다! 얼마 전까지도 우리글을 언문(諺文 ,한글을 속되게 표현함)이라 하였으니 분명,묘지석 발견당시에는 한자로 지명을 기록하였을 것이고 그 과정에서 흘려 쓴(草書,走筆) 계(溪)字와 한(漢)字를 다시 옮겨 기록하는 과정에서 명확하지 않았기에 보감에는 面單位를 기입하지 않았다는 게 더욱 더 오기라는 확신을 가져오고 무엇보다도 임계면은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증명 되었습니다.기록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느낍니다.가정리 인근의 마산을 찾아서 보고하겠습니다.노고가 크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