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산성 임란 전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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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작성일07-04-06 23:14 조회1,753회 댓글0건본문
*출전 : 네이버 블로그(http://cafe.naver.com/ijwar/206)
강원도 전투 1592 8월 중순
당시 일본군의 주력부대는 강원도를 무시하고 충청도, 경기도 쪽으로 북상을 하고 있었는데....
하지만 일단은 강원도도 공략을 해야했기에 가토가 이끄는 2번대를 따라오던 모리 요시나리의 4번대 일본군 3천병력은 강원도로 진출했는데. 당시 모리 요시나리는 자칭 강원감사라 하고 이 일대에 포고문을 뿌려 민심을 잡으려고 했다.
또한 자신의 부대를 길게 늘어트려 사나운 짐승과 귀신가면을 써서 행진했다고 한다. 제가 보기엔 모리 요시나리는 심리전을 매우 효과적으로 구사하는 일본인 장수 같습니다. 자칭 강원감사라 칭하고 포고문을 뿌린것을 보아 조선인들이 자신들에 대한 경계심을 낮춰서 의병의 발생을 막고자 했고 또 사나운 짐승과 귀신가면을 쓴 것으로 봐선 만약에 있을 지 모르는 의병들이나 일본군에게 반감이 있는 자를 위헙해 아예 의병활동을 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 같습니다. 확실히 이러한 심리전 전술에 의해서 강원도지방에선 의병이 거의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한편 모리 요시나리는 안변->강릉->삼척->울진->평해의 경상도 북부등을 손쉽게 점령했습니다. 마침 잠시 군사들을 돌리던 도중에 안동을 지나게 됬는데 안동에서 유종개가 일으킨 의병들이 일본군이 지나가는 길목에 의병들을 매복시켜 기습하려 했으나 이를 눈치챈 일본군이 오히려 기습하여 유종개가 전사했다.
여기서 안타까운 점은 만약 유종개의 기습작전이 성공했으면 일본군은 원주로 가는 길이 막혀 강원도 북부로 갈수가 없었으나 유종개가 하필 봉화가 있는 숲의 동쪽에서 매복시켰기 때문에 들킨 것 같습니다. 아마 봉화를 피웠거나 혹은 봉화를 피웠었던게 들켯었던 것 같습니다. 결국 안동에서 의병들이 대패하여 일본군은 원주로 향했는데 당시 원주의 상황은 원주목사 김제갑이 지키고 있었는데. 김제갑은 68세의 고령이었다. 그리고 김제갑은 충주 방어전에서 군사, 양곡, 무기등을 보내 지원하여 원주의 창고는 거의 다 비어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김제갑은 일본군이 온다는 말에 밤낮을 가리지 않고 방어준비를 했다. 한편 원주가 강원도 서쪽의 요지이긴 하나 방어하기에 좋은 지형이 못되 치악산 남쪽의 영원산성을 방어기지로 삼았는데. 영원산성은 관리가 이루어져 있지 않아서 잡초가 무성했지만 매우 가파르고 주위의 산세가 험하며 산성으로 향하는 통로도 하나밖에 안되어있어 원주에 있던 병력과 물자들을 실어날랏다.
마침 서울, 경기지방에서 모여든 피란민들이 산성으로 몰려들어 어림잡아 4천여명에 이르렀다. 마침 일본군이 잠시 주춤하고 있을 때 피란민들을 풀어 한달 동안 버틸 식수와 땔감을 준비하고 불화살을 날리기 좋은 위치에 배치하고 산성 여기저기에 돌무더기들을 쌓아놓았다.
이를 보면 김제갑은 지형을 매우 잘 이용하는 인물인 것 같다. 영원산성은 과거 삼국시대 때 쌓은 성으로 삼국시대 당시에는 성이나 산성들을 높게 짖거나 높은 지형에 세웠는데. 그래서 영원산성도 매우 험준하였다.
또한 급수, 땔감등을 대량으로 모아둔 것을 보면 영원산성에서 결사항전을 각오한 것이었다. 마친 일본군이 평창으로 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휘하 무사 박종남에게 일부병력을 평창에서 들어오는 통로인 가리령에 배치했는데, 안타깝게도 일본군은 복병이 배치될만한 지형들을 미리 탐색해놓았던 것 같다.
일본군은 가리령의 뒤쪽을 올라 복병들을 기습하여 대다수 전멸했다. 일본군은 가리령을 거쳐 영원산성 아래쪽에서 멈췄는데 일본군은 항복을 권유하는 글을 장대에 매달아 김제갑에게 보냈는데, 김제갑은 분노하며 그 글을 가지고 온 일본군사를 죽였다고 한다. 이 또한 역시 결사항전의 각오를 나타내는 것 같다.
김제갑은 산성 주변의 높은 봉우리에 척후병을 배치하여 일본군의 움직임을 훤히 보고 있어 일본군이 움직이지를 못했다.
확실히 역사적으로 보면 적이 높은 곳에서 자신들을 훤히 보고 있으면 움직이기가 버겁기 때문에 일본군이 바로 공격을 하지 못한 것 같다. 그 다음 날인 8월 25일 아침. 척후병을 세워둔 다섯 봉우리에서 호각(휘슬같이 고음을 내는 물품)을 불어 만반에 대비를 해놓았다. 일본군은 산성이 공격하기 어려운 지형이라 통로를 통해 진격하였으나 통로역시 좁고 저항이 심하여 일본군이 여러번 후퇴하였다. 그러다가 절벽 쪽 방지가 허술해 진 틈을 타 결사대 수십명을 시켜 절벽을 기어올라와 성벽여기저기에 큰 구멍을 뚫고 성안으로 돌진한 틈을 타 적군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아군은 치열한 항전을 벌였으나 날이 저물 무렵 비축해 놓은 화살과 돌맹이들이 바닥이 났다. 결국엔 산성으로 적들이 몰려와 넘어왔다.
일본군 장수 모리 요시나리는 아마 영원 산성의 험준함때문에 쉽사리 공략하지 못한 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인지 다른 성벽쪽으로는 거의 공격하지 않고 통로로만 공격하여 조선군의 시선을 끈 것 같습니다.
그리고 결사대를 절벽을 통해 몰래 보내 성벽에 구멍을 뚫어 돌격하게 했는데...
이 때문에 일본군들이 쉽게 성벽을 향해서 돌진한 것 같습니다.하지만 조선군이 항전을 하였기 때문에 쉽게 무너지지는 않았지만 아마 산성에서 비축해놓은 물량이 얼마 없을 것이라 생각되어 계속 공격을 감행한 것 같습니다. 원레 산성은 성과 달리 화살등을 대량으로 비축하기에는 좁고 수송이 불리한 것을 감안한 것 같습니다. 결국엔 화살과 돌맹이가 다 떨어지고 백병전이 벌여졌으나 조선군은 대부분이 피란민으로 구성되어 있어 훈련을 받은 일본군과의 백병전은 사실 무의미 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산성에서 백병전이 펼쳐진다는 것은 산성의 최후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죠.
결국에 조선군은 영원산성 입구 반대쪽에 몰리게 되었는데... 한 군사가 김제갑을 엎고 도망치려 했으나 김제갑은 이를 뿌리치고 북쪽을 향해 임금에게 절을 한 뒤 나머지 병력들과 함께 백병전을 펼치다가 일본군이 쏜 화살에 맞아 싸울 기력을 잃어버렸다.
자신들과 함께 싸우던 병졸들이 전멸한 뒤 일본군이 다가와 그를 무릎 꿇리려고 했으나 칼을 내리치며 버티자 찔러 죽였다고 한다. 또한 산성에서 같이 항전하던 백성들도 대다수 죽었다. 하지만 일본군도 크게 피해를 입어 영원산성을 넘어 거의 비어있던 원주를 쉽게 점령하고 한동안 머물렀다고 한다.
김제갑은 고령장수이었지만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막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당시 기록을 자세히 보니
영원산성을 향해 오기전에 잠깐 머뭇거렸을 때 후속부대와 합친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 규모는 자세히 나와 있지 않으나 3000의 병력에 몇 천이 보태져 대략 6~7천여명으로 추정됩니다.
한편 병졸들은 고경이 김제갑이 고령이고 몇 주동안 제대로 된 휴식을 취하지 못하고 싸우자 나중에 산성이 밀릴 때 그를 엎어 탈출을 하려 했을 정도로 김제갑이 매우 훌륭한 장수라고 생각됩니다.
아마 개인적인 의견으론 바보같이 지형적으로 매우 유리한 성을 버리고 강을 낀 채로 배수의 진을 치다가 각지에서 간신히 보낸 병력들을 고스란히 잃은 신X과는 매우 다르다고 생각되군요 -ㅅ-;
한편 모리 요시나리도 매우 훌륭한 장수 인 것같습니다. 조선군의 기습작전을 번번히 눈치챌 정도로 지형이나 그 곳의 상황들을 잘 봐주는 신중함이 있고 어떤 환경에서 어떻게 싸워야 할지도 잘 알고 있는 장수 인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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