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보경사원진국사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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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만 작성일02-05-19 08:00 조회1,859회 댓글0건본문
2. 보 경 사
(출전 : 浦港市史 上, 포항시사편찬위원회, 1999년 pp103)
---진평왕대에 건립되었던 보경사는 신라통일기인 제33대 성덕왕 22년(723) 도
인 각인(覺仁)과 문원(文遠)이 서로 의논하기를 절이 있는데 탑이 없을 수 없다
하여 발원하고 시주를 얻어 금당 앞에 5층탑을 조성하여 모셨다고 한다. 그러
나 「금당탑기」에 의하면 현종 계해 3월 27일이라고 한 바, 우리 왕조에 나오
는 현종은 고려시대의 현종(1010-1031 재위) 조선 제18대 현종(1660-1674)뿐이므
로 신라와 동시대의 당나라 현종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금당탑기에 현종 계
해에 탑을 세우고 다음 당 현종 천보(天步) 4년(745)에 절을 중창했다고 하였으
므로 현종 계해는 곧 개원(開元) 11년(723)으로서 이때 탑을 조성한 것으로 보
겠다. 또한 신라 제35대 경덕왕 4년(745)에 철민화상이 중창을 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 사실로서 보경사는 통일신라에 와서도 꾸준히 중창 발전되고 있었
음을 알 수 있다.(2002. 5.18)
2. 원진국사비(圓眞國師碑)와 부도(浮屠)
(출전 : 포항시史 上, 포항시사편찬위원회, 1999년 pp122∼126)
---원진국사비는 포항시 북구 송라면 중산리 보경사 대웅전 후원 영산전 앞에
있는 것으로 보물 252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이 비석은 원진국사비명(圓眞國師碑銘)이라는 비명의 글자가 가로로 쓰여 있
으며, 본문 글자의 크기는 2.1㎝로 해서체로 쓰여져 있다. 김고인(金考印)이라는
사람이 새기고【注 : 이 부분은 오기로서 김효인(金孝印)이라는 사람이 쓰고로
바로 잡아야할 것임】, 비문을 지은 사람은 통의대부추밀원부승선이 글을 지었
다. 이 비의 특징은 이수가 없는 것이 특징이고, 비석 상단 양귀퉁이가 각이 나
지 않고 귀접이한 독특한 형상을 하였으며, 거북의 몸통과 아래 대석은 단일석
이며 거북의 입에는 여의주를 물고 용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 비문의 내용에
의하면.
---원진국사의 속성은 신(申)씨이며 이름은 승형(承逈) 자(字)는 영회(永廻)이며
상락군 산양현(지금의 상주군) 사람으로서 고려 제19대 명종 원년(1171년) 곧
지금으로부터 828년 전에 탄생하였다고 한다.
---가문은 대대로 유학을 전승해 왔으며 그의 아버지는 금성원(군수 ; 郡守)으로
있다가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 또한 일찍 돌아가시자 세 살에 고아가 되어 그의
숙부 시어사(侍御使) 광한(光漢)씨가 맡아 길렀다고 한다.
---원진국사가 일곱 살 때에 그의 숙부는 운문사(지금의 청도) 연실선사(淵實禪
師)에게 위탁하여 글공부를 시키는데 그 말과 행동이 의젓하고 또 총명력이 뛰
어나서 한번 듣고 본 것은 다 기억하였으므로 사람들은 그를 신동이라 불렀다.
---열세살 때 희양산 봉암사(지금의 문경군에 있음)에 나아가 동순선사(洞純禪
師)를 스승으로 머리를 깍고 득도하고 이듬해 금산사(전북 김제군)의 계단에서
구족계를 받았다.(구족계라 함은 비구의 250계를 말함). 스님은 15, 6세에 부처
님의 경전을 공부하여 교리를 잘 통달한 뒤에 동숭선사(동순선사의 오기)의 지
도를 받아 참선공부를 하게 되었다. 이 봉암사에서 승형스님은 도를 닦았다. 이
때는 국가에서 불교를 국교로 삼고 선종이나 교종에서 공부 잘 하는 승려를 시
험보여 법계를 주었고, 선종에서는 선사 또는 대선사가 되면 왕사(王師)까지 되
었다. 왕사 또는 국사(國師)가 되면 임금님과 온 국민이 떠받드는 가장 영광스
러운 자리다. 그러나 스님은 그런 곳에는 조금도 뜻을 두지 않고 오직 인생의
한가지 큰일, 곧 부처님과 통할 수 있는 마음 공부를 철저히 하여 죽음의 큰
인연을 밝히는데 전력하였다.
---고려 명종 15년(1158년)이면 승형스님의 나이가 15세 되던 때이다. 그때에 그
의 스승 동순선사는 「승형아, 이 절의 개산조 지증국사께서는 입적하신지가
벌써 360여년이며 정진국사께서는 200여년이다. 그런데 그 중간에 큰 고승 대
덕이 없으니 너는 부지런히 불교의 도를 닦아 선대 조사의 발자취를 이어 우리
종문을 세상에 드날리도록 해야 한다. 나는 아무 한 일없이 70이 가까운 쓸모
없는 노물이 되었으니 이제 후회한들 소용이 없구나」하면서 때때로 훈계하고
경책하였다. 승형스님은 본래 총명 영특할 뿐만아니라 그 성품이 지극히 선량
하고 순진함으로 스승님의 교훈을 곧 부처님의 말씀으로 받들어 부지런히 스님
을 받들면서 선(禪) 공부에 전력하였다. 때로는 부처님 앞에 천번 2천번 절을
하면서 도를 깨달아 전대(前代) 조사(祖師)의 발자취를 빛내며 국가와 만민의
복밭이 되기를 발원했다. 이렇게 10여년이 흘러가며 마음의 본 바탕을 깨닫게
되었고 그 도행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스님은 어려서부터 부모를 잃었으므로 부모의 얼굴도 기억하지 못하고 또 부
모가 낳아주신 은혜를 한번도 갚지못한 것이 가슴에 맺힌 한이 되어 그의 스승
동순선사를 지극한 정성을 다하여 한시라도 그 곁을 떠나지 않으려 하였다.
---스님의 나이 27세가 되니 그의 스승은 80에 가까운 고령으로써 병중에 있었
다. 그해 봄에 국가에서 승려의 자격 시험을 보는 승과를 보이게 되자 선종에
서는 그때의 서울인 개경에서 「담선법회(談禪法會)」 곧 선종 승려의 참선 공
부를 시험보는 법회가 있었다. 그 스승 동순선사는 병중에 있으면서 「내가 이
산중에 들어와서 선 수양을 한지도 수십년이 되었구나. 너의 선 공부는 누구보
다 뛰어났으니 이번 담선법회에서는 꼭 참여하도록 하라」고 지시 하였다. 그
러나 승형스님은 「소승는 제 마음을 닦아서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을 밝히는
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하옵고 구태여 선과를 보아서 선사, 대선사의 왕사니 국
사니 하는 명리의 길을 밟고 싶지 않습니다. 더욱이 스님이 80 고령으로서 법
체도 안녕치 못하오신데 스님곁을 떠나고 싶지 않사옵니다」라고 사양하였다.
그러나 동순선사는 「네 말이 갸륵하다마는 그러나 지금 세상에는 선과를 보아
그 자격을 얻지 못하면 큰절 주지하나 얻을 수 없으며 선종 중으로서 제 구실
을 할 수 없나니라. 이번 담선법회는 꼭 참여하도록 하여라. 나의 소원이니라」
하고 간곡히 부탁하므로 「스님의 분부가 지중하시오니 소승의 본의가 아니오
나 그 분부 받자옵겠나이다」하고 물러 나와서 7일동안 걸어서 보제선사에 이
르자 아직 법회일자는 며칠 남아 있었다. 그때 봉암사에는 말을 급히 달려 스
님을 찾아온 사람이 있었다. 그동안에 동순스님께서 열반하셨다는 부음을 전해
들은 것이다. 매우 침통하여 슬픔을 억제하면서 「그렇기에 내가 이번에 선과
에 참여하기를 꺼렸다. 스님께서는 나를 선과 보러 보내시고 가셨구나」하고
매우 비통해 했다. 「어찌 그렇게 급작스레 열반하셨단 말이냐?」예, 스님을 서
울로 보내시고는 하루 바삐 담선법회에 합격하여 돌아오시기를 고대하시면서
전혀 잠을 이루지 못하고 7일이 되자 대중을 불러서 말씀하시기를「나는 세상
인연이 다하였다. 너희들은 부지런히 정진하라. 그리고 승형이는 이번에 꼭 선
과에 합격하고 돌아올 것인데 나와 인연이 다하여 그것을 보지 못하고 가게되
니 유감이다. 너희들은 승형이를 본받아 공부를 열심히 하여 이 산문을 빛내도
록 하여라. 그리고 승형스님에게는 내가 죽었다는 소식을 전하지 말라」고 유
언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대중들이 의논하기를 「큰 스님이 가장 사랑하는 수
제자이신데 어찌 부음을 알리지 않겠는냐 하여 이 소식을 전하옵니다」라고 하
였다. 승형스님은 그 말을 듣고 땅에 쓰러지면서 한동안 실신상태가 되었다가
얼마 뒤에 다시 정신을 차려 일어나 앉으면서 「중으로서 불법 공부를 잘하여
마음을 밝히고 도를 닦으면 그뿐이지 선과를 보아 합격하는 것이 무엇이 그다
지 중요하겠느냐. 스님께서는 우리 희양산문을 빛내라고 하시지만 꼭 선과에
합격해야만 되는 것은 아니다」하면서 곧 본산으로 돌아가려하자, 그 심부름온
스님은 「그러나 스님은 담선법회를 보아야 합니다. 동순스님은 임종하시면서
그 입적한 소식을 스님께 알리지 말라 하시면서 이번에는 꼭 선과에 합격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부득이 부음을 아니 드릴 수 없었으나 선과를 보신 뒤에
돌아가시도록 하십시오」
---그러나 서울에 올라온 길이라 그의 숙부 시어사 선한공을 찾아뵙고「저는 숙
부님의 은덕으로 입산하온 뒤로 오직 불도의 도를 닦아 생사 대사를 밝하는 것
을 근본 과업으로 삼아왔을 뿐 선과 같은 것을 뜻하지 않았습니다. 스님의 간
곡한 분부를 받자옵고 담선법회에 구경왔삽더니 그 사이에 동순스님께서 입적
하셨사옵니다. 과연 사람의 한세상이란 풀잎에 맺힌 아침이슬과 같고 부귀영달
은 한 조각 뜬 구름과 같습니다. 소질은 본디 세상살이 밀을 쌉은 듯 하온데
이제 동순스님께서 돌아가셨으니 소질은 이길로 세상의 영리를 버리고 본래 뜻
을 이루려 하옵니다」라고 고백하였다. 「장하다. 네 말이 바로 입산 수도하는
참뜻이며 불도의 진정한 교훈이시다」
---스님은 곧바로 동순스님의 장례를 마치고 수도에 정진하였다.
---명종은 평소에 스님의 도행이 남보다 뛰어났다는 소식을 들어왔고 이번 선과
의 명부에도 오른 것을 보았는데 돌연히 그 스승님이 선과를 포기하여 돌아갔
다는 말을 듣고 선교종의 감독기관인 우승록사를 불러서 하교하기를 「희양산
봉암사에서 십수년 선도를 닦아 그 도행이 뛰어나고 이번 담선법회에 참여하러
왔다가 불의의 사고로 절로 돌아갔다고 하니 그 스님이 이 법회에 참여하면 반
드시 상상과(上上科 : 장원)에 합격할 줄 믿는 바이니 그 스님을 합격자로 등록
하는 것이 마땅하다」라고 분부하여 그 담선법회의 합격자 명부에 등록하였다.
이와 같이 그의 덕은 나라에서 공인할 정도였다.
---그해 가을에 개경 광명사에서 선불장(選佛場) 선종의 대과에 합격하여 큰절
의 주지가 되는 자격을 얻었으며 이때 나이 30세로서 스님이 늘 마음으로 숭배
해온 지눌(知訥 : 보조국사(普照國師))이 계신 조계산 수선사에 계시다가 신종5
년 봄에 지눌국사님을 작별하고 강릉 오대산 월정사를 거쳐 금강산 유점사 주
지로 계시다가 고종3년 스님의 나이 45세 되던 해 가을에 경주 관내에 있는 청
하연 보경사의 주지에 임명되어 허물어진 절의 중창에 힘썼으며, 고종 왕이 대
신을 보내어 왕사로 봉하려 하였으나 다섯 번이나 사양하였다고 한다. 고려 시
대에는 왕사를 봉하려 하면 모든 대신이 반대하지 않아야 하고, 마지막으로 조
정의 처사에 잘잘못을 가리어 시비하는 간관의 서명이 있어야 하며, 그리고 대
신을 보내어 세 번 사양한 뒤에 왕이 친히 그 스님 앞에 나가서 예배하고 스승
의 예를 갖춘 뒤에 왕사를 봉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고려 불교사에 세 번
사양한 분이 기록상 없다고 하는데 원진국사는 다섯 번이나 왕사의 추대를 받
고도 사양하였던 것이다.
---고종8년 신사(1221년) 여름에 그 문하학도와 중들을 모아놓고 능엄경을 강설
하였다. 최후의 강설이라고 대중들에게 일깨웠다. 하루는 대중을 운집시키고 법
상에 올라서 한참동안이나 입정하고 계시다가 주장자로 법상을 세 번치고 대중
에게 「여러분은 이 소리를 다 들었는가?」「예! 다들었습니다」 스님은 다시
주장자를 들어 대중에게 보이면서 「여러분은 이 주장자를 보았는가?」「예,
보았습니다」「응, 그 무엇을 듣고 보았는가?」한 승려가 대답하기를 「예, 그
것은 우리의 안식, 이식, 즉 눈, 귀입니다」「응 그 의식은 이디에 있는고?」그
때에 대중은 꿀먹은 벙어리가 되었다.「그대가 밖에 있는 것도 아니며, 허공에
있는 것도 아니고 어느 중간에 있는 것도 아니로다. 그것은 이미 능엄경에서
밝한 바가 아닌가. 즉 부처님은 이 본연의 진성을 그대로 되찾는 분이고 그 진
성은 빛깔도 소리도 냄새도 형체도 없으면서 보고, 듣고, 냄새맡고, 맛보고, 기
뻐하고, 슬퍼하고, 사랑하며, 생사고해에 헤매나니 어찌 슬프지 않으랴」하였으
며, 또 하루는 스님이 대중을 돌아보면서 「정법을 만나기 어려움이 마치 눈먼
거북이가 나무등걸 만나는 것과 같은 것이요, 나도 세상에 오래 머물지 못할
것이니 여러분은 헛되게 광음을 보내지 말고 힘껏 불법을 선양하여 부처님 은
혜를 갚도록 하오」하고 설법하였다. 7월 그믐에 팔공산 염불암으로 옮겨가서
청림, 원정 두 선덕과 조용히 도를 이야기하고 8월 20일에 머리를 깎고 목욕하
고 시자를 불러 옷을 갈아입고 법상에 올라 좌정하고 있다가 「이 법은 나고
꺼짐이 없고 가고 옴이 없지만 바닷물이 바람따라 물결이 일고 꺼지나니 보는
것은 중생의 망견이요, 나고 꺼짐이 없는 도리를 체득한 것이 불도의 뜻이로다.
산승이 오늘에 생멸이 없는 법에서 생멸의 인연을 보이나니 여러분은 생멸상으
로 보지 말라. 일체 법이 나는 것도 일체법이 꺼짐도 없도다. 이렇게 법성을 볼
것 같으면 모든 부처님이 항상 앞에 드러나니라」라는 계송을 읊고 그 계송을
범패로 부르게 하고 조용히 좌정할 때 한 중이 「스님 임종계(유언)를 하나 남
기소서」라고 하자 스님은 그 중을 빤히 바라보며 「이 어리석은 자야 이밖에
무슨 임종계가 따로 있느냐, 나는 평생에 따로 짓지 않았다」하고 주장자로 세
번 법상을 치고 조용히 입정하였다. 다시보니 숨을 거두신 후였다. 그러나 안색
이 변함없고 온몸이 생시와 같았다.
---그해 10월 10일에 문하생 50여명이 남쪽 산부리에 화장하고 명일 영골을 주
워 보경사 산록에 탑을 세워 사리를 봉안한 것이 보물 430호인 원진국사 부도
이다. 나이는 51세이며, 출가한 나이는 38세이었다. 상감께서 그 부음을 듣고
크게 슬퍼하여 시호를 원진이라고 국사의 칭호를 내렸다. 그리고 문신이 골로
로 하여금 비문을 짓게하여 원진국사비를 세우도록 하셨다고 한다.
---원진국사 부도는 보물 제430호로 보경사 경내에 있다. 높이는 4.5m, 직경
1.4m 화강암으로 된 팔각원당형(八角圓堂型)이다. 하대석은 3단, 하측단은 무문
팔각(無紋八角) 상단은 섬세한 단변복연(單辨伏蓮) 상대석은 윗면에 받침있는
앙연석문양(仰蓮石紋樣)이 있다. 탑신은 팔각석주와 비슷한데 우주가 있는 면에
문호형(門戶形)이 모각(模刻)되어 있다.
---옥개석은 하면우각으로 뻗은 강기선(降起線)이 있으며 전각에 귀꽃을 장식하
였으며 추녀는 두터운 편이고 상륜부는 팔엽연화(八葉蓮花)의 앙화(仰花)위에
구형의 복발(覆鉢)을 높이고 앙화형의 한 돌을 높인 다음 보주를 얹고 있는 완
전한 형태의 부도이다.
※부도 : 고승의 사리나 유골을 넣어 두는 둥근 돌탑.(2002. 5.18)
▣ 김태서 -
▣ 김은회 -
▣ 김영환 -
▣ 김태영 -
(출전 : 浦港市史 上, 포항시사편찬위원회, 1999년 pp103)
---진평왕대에 건립되었던 보경사는 신라통일기인 제33대 성덕왕 22년(723) 도
인 각인(覺仁)과 문원(文遠)이 서로 의논하기를 절이 있는데 탑이 없을 수 없다
하여 발원하고 시주를 얻어 금당 앞에 5층탑을 조성하여 모셨다고 한다. 그러
나 「금당탑기」에 의하면 현종 계해 3월 27일이라고 한 바, 우리 왕조에 나오
는 현종은 고려시대의 현종(1010-1031 재위) 조선 제18대 현종(1660-1674)뿐이므
로 신라와 동시대의 당나라 현종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금당탑기에 현종 계
해에 탑을 세우고 다음 당 현종 천보(天步) 4년(745)에 절을 중창했다고 하였으
므로 현종 계해는 곧 개원(開元) 11년(723)으로서 이때 탑을 조성한 것으로 보
겠다. 또한 신라 제35대 경덕왕 4년(745)에 철민화상이 중창을 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 사실로서 보경사는 통일신라에 와서도 꾸준히 중창 발전되고 있었
음을 알 수 있다.(2002. 5.18)
2. 원진국사비(圓眞國師碑)와 부도(浮屠)
(출전 : 포항시史 上, 포항시사편찬위원회, 1999년 pp122∼126)
---원진국사비는 포항시 북구 송라면 중산리 보경사 대웅전 후원 영산전 앞에
있는 것으로 보물 252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이 비석은 원진국사비명(圓眞國師碑銘)이라는 비명의 글자가 가로로 쓰여 있
으며, 본문 글자의 크기는 2.1㎝로 해서체로 쓰여져 있다. 김고인(金考印)이라는
사람이 새기고【注 : 이 부분은 오기로서 김효인(金孝印)이라는 사람이 쓰고로
바로 잡아야할 것임】, 비문을 지은 사람은 통의대부추밀원부승선이 글을 지었
다. 이 비의 특징은 이수가 없는 것이 특징이고, 비석 상단 양귀퉁이가 각이 나
지 않고 귀접이한 독특한 형상을 하였으며, 거북의 몸통과 아래 대석은 단일석
이며 거북의 입에는 여의주를 물고 용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 비문의 내용에
의하면.
---원진국사의 속성은 신(申)씨이며 이름은 승형(承逈) 자(字)는 영회(永廻)이며
상락군 산양현(지금의 상주군) 사람으로서 고려 제19대 명종 원년(1171년) 곧
지금으로부터 828년 전에 탄생하였다고 한다.
---가문은 대대로 유학을 전승해 왔으며 그의 아버지는 금성원(군수 ; 郡守)으로
있다가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 또한 일찍 돌아가시자 세 살에 고아가 되어 그의
숙부 시어사(侍御使) 광한(光漢)씨가 맡아 길렀다고 한다.
---원진국사가 일곱 살 때에 그의 숙부는 운문사(지금의 청도) 연실선사(淵實禪
師)에게 위탁하여 글공부를 시키는데 그 말과 행동이 의젓하고 또 총명력이 뛰
어나서 한번 듣고 본 것은 다 기억하였으므로 사람들은 그를 신동이라 불렀다.
---열세살 때 희양산 봉암사(지금의 문경군에 있음)에 나아가 동순선사(洞純禪
師)를 스승으로 머리를 깍고 득도하고 이듬해 금산사(전북 김제군)의 계단에서
구족계를 받았다.(구족계라 함은 비구의 250계를 말함). 스님은 15, 6세에 부처
님의 경전을 공부하여 교리를 잘 통달한 뒤에 동숭선사(동순선사의 오기)의 지
도를 받아 참선공부를 하게 되었다. 이 봉암사에서 승형스님은 도를 닦았다. 이
때는 국가에서 불교를 국교로 삼고 선종이나 교종에서 공부 잘 하는 승려를 시
험보여 법계를 주었고, 선종에서는 선사 또는 대선사가 되면 왕사(王師)까지 되
었다. 왕사 또는 국사(國師)가 되면 임금님과 온 국민이 떠받드는 가장 영광스
러운 자리다. 그러나 스님은 그런 곳에는 조금도 뜻을 두지 않고 오직 인생의
한가지 큰일, 곧 부처님과 통할 수 있는 마음 공부를 철저히 하여 죽음의 큰
인연을 밝히는데 전력하였다.
---고려 명종 15년(1158년)이면 승형스님의 나이가 15세 되던 때이다. 그때에 그
의 스승 동순선사는 「승형아, 이 절의 개산조 지증국사께서는 입적하신지가
벌써 360여년이며 정진국사께서는 200여년이다. 그런데 그 중간에 큰 고승 대
덕이 없으니 너는 부지런히 불교의 도를 닦아 선대 조사의 발자취를 이어 우리
종문을 세상에 드날리도록 해야 한다. 나는 아무 한 일없이 70이 가까운 쓸모
없는 노물이 되었으니 이제 후회한들 소용이 없구나」하면서 때때로 훈계하고
경책하였다. 승형스님은 본래 총명 영특할 뿐만아니라 그 성품이 지극히 선량
하고 순진함으로 스승님의 교훈을 곧 부처님의 말씀으로 받들어 부지런히 스님
을 받들면서 선(禪) 공부에 전력하였다. 때로는 부처님 앞에 천번 2천번 절을
하면서 도를 깨달아 전대(前代) 조사(祖師)의 발자취를 빛내며 국가와 만민의
복밭이 되기를 발원했다. 이렇게 10여년이 흘러가며 마음의 본 바탕을 깨닫게
되었고 그 도행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스님은 어려서부터 부모를 잃었으므로 부모의 얼굴도 기억하지 못하고 또 부
모가 낳아주신 은혜를 한번도 갚지못한 것이 가슴에 맺힌 한이 되어 그의 스승
동순선사를 지극한 정성을 다하여 한시라도 그 곁을 떠나지 않으려 하였다.
---스님의 나이 27세가 되니 그의 스승은 80에 가까운 고령으로써 병중에 있었
다. 그해 봄에 국가에서 승려의 자격 시험을 보는 승과를 보이게 되자 선종에
서는 그때의 서울인 개경에서 「담선법회(談禪法會)」 곧 선종 승려의 참선 공
부를 시험보는 법회가 있었다. 그 스승 동순선사는 병중에 있으면서 「내가 이
산중에 들어와서 선 수양을 한지도 수십년이 되었구나. 너의 선 공부는 누구보
다 뛰어났으니 이번 담선법회에서는 꼭 참여하도록 하라」고 지시 하였다. 그
러나 승형스님은 「소승는 제 마음을 닦아서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을 밝히는
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하옵고 구태여 선과를 보아서 선사, 대선사의 왕사니 국
사니 하는 명리의 길을 밟고 싶지 않습니다. 더욱이 스님이 80 고령으로서 법
체도 안녕치 못하오신데 스님곁을 떠나고 싶지 않사옵니다」라고 사양하였다.
그러나 동순선사는 「네 말이 갸륵하다마는 그러나 지금 세상에는 선과를 보아
그 자격을 얻지 못하면 큰절 주지하나 얻을 수 없으며 선종 중으로서 제 구실
을 할 수 없나니라. 이번 담선법회는 꼭 참여하도록 하여라. 나의 소원이니라」
하고 간곡히 부탁하므로 「스님의 분부가 지중하시오니 소승의 본의가 아니오
나 그 분부 받자옵겠나이다」하고 물러 나와서 7일동안 걸어서 보제선사에 이
르자 아직 법회일자는 며칠 남아 있었다. 그때 봉암사에는 말을 급히 달려 스
님을 찾아온 사람이 있었다. 그동안에 동순스님께서 열반하셨다는 부음을 전해
들은 것이다. 매우 침통하여 슬픔을 억제하면서 「그렇기에 내가 이번에 선과
에 참여하기를 꺼렸다. 스님께서는 나를 선과 보러 보내시고 가셨구나」하고
매우 비통해 했다. 「어찌 그렇게 급작스레 열반하셨단 말이냐?」예, 스님을 서
울로 보내시고는 하루 바삐 담선법회에 합격하여 돌아오시기를 고대하시면서
전혀 잠을 이루지 못하고 7일이 되자 대중을 불러서 말씀하시기를「나는 세상
인연이 다하였다. 너희들은 부지런히 정진하라. 그리고 승형이는 이번에 꼭 선
과에 합격하고 돌아올 것인데 나와 인연이 다하여 그것을 보지 못하고 가게되
니 유감이다. 너희들은 승형이를 본받아 공부를 열심히 하여 이 산문을 빛내도
록 하여라. 그리고 승형스님에게는 내가 죽었다는 소식을 전하지 말라」고 유
언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대중들이 의논하기를 「큰 스님이 가장 사랑하는 수
제자이신데 어찌 부음을 알리지 않겠는냐 하여 이 소식을 전하옵니다」라고 하
였다. 승형스님은 그 말을 듣고 땅에 쓰러지면서 한동안 실신상태가 되었다가
얼마 뒤에 다시 정신을 차려 일어나 앉으면서 「중으로서 불법 공부를 잘하여
마음을 밝히고 도를 닦으면 그뿐이지 선과를 보아 합격하는 것이 무엇이 그다
지 중요하겠느냐. 스님께서는 우리 희양산문을 빛내라고 하시지만 꼭 선과에
합격해야만 되는 것은 아니다」하면서 곧 본산으로 돌아가려하자, 그 심부름온
스님은 「그러나 스님은 담선법회를 보아야 합니다. 동순스님은 임종하시면서
그 입적한 소식을 스님께 알리지 말라 하시면서 이번에는 꼭 선과에 합격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부득이 부음을 아니 드릴 수 없었으나 선과를 보신 뒤에
돌아가시도록 하십시오」
---그러나 서울에 올라온 길이라 그의 숙부 시어사 선한공을 찾아뵙고「저는 숙
부님의 은덕으로 입산하온 뒤로 오직 불도의 도를 닦아 생사 대사를 밝하는 것
을 근본 과업으로 삼아왔을 뿐 선과 같은 것을 뜻하지 않았습니다. 스님의 간
곡한 분부를 받자옵고 담선법회에 구경왔삽더니 그 사이에 동순스님께서 입적
하셨사옵니다. 과연 사람의 한세상이란 풀잎에 맺힌 아침이슬과 같고 부귀영달
은 한 조각 뜬 구름과 같습니다. 소질은 본디 세상살이 밀을 쌉은 듯 하온데
이제 동순스님께서 돌아가셨으니 소질은 이길로 세상의 영리를 버리고 본래 뜻
을 이루려 하옵니다」라고 고백하였다. 「장하다. 네 말이 바로 입산 수도하는
참뜻이며 불도의 진정한 교훈이시다」
---스님은 곧바로 동순스님의 장례를 마치고 수도에 정진하였다.
---명종은 평소에 스님의 도행이 남보다 뛰어났다는 소식을 들어왔고 이번 선과
의 명부에도 오른 것을 보았는데 돌연히 그 스승님이 선과를 포기하여 돌아갔
다는 말을 듣고 선교종의 감독기관인 우승록사를 불러서 하교하기를 「희양산
봉암사에서 십수년 선도를 닦아 그 도행이 뛰어나고 이번 담선법회에 참여하러
왔다가 불의의 사고로 절로 돌아갔다고 하니 그 스님이 이 법회에 참여하면 반
드시 상상과(上上科 : 장원)에 합격할 줄 믿는 바이니 그 스님을 합격자로 등록
하는 것이 마땅하다」라고 분부하여 그 담선법회의 합격자 명부에 등록하였다.
이와 같이 그의 덕은 나라에서 공인할 정도였다.
---그해 가을에 개경 광명사에서 선불장(選佛場) 선종의 대과에 합격하여 큰절
의 주지가 되는 자격을 얻었으며 이때 나이 30세로서 스님이 늘 마음으로 숭배
해온 지눌(知訥 : 보조국사(普照國師))이 계신 조계산 수선사에 계시다가 신종5
년 봄에 지눌국사님을 작별하고 강릉 오대산 월정사를 거쳐 금강산 유점사 주
지로 계시다가 고종3년 스님의 나이 45세 되던 해 가을에 경주 관내에 있는 청
하연 보경사의 주지에 임명되어 허물어진 절의 중창에 힘썼으며, 고종 왕이 대
신을 보내어 왕사로 봉하려 하였으나 다섯 번이나 사양하였다고 한다. 고려 시
대에는 왕사를 봉하려 하면 모든 대신이 반대하지 않아야 하고, 마지막으로 조
정의 처사에 잘잘못을 가리어 시비하는 간관의 서명이 있어야 하며, 그리고 대
신을 보내어 세 번 사양한 뒤에 왕이 친히 그 스님 앞에 나가서 예배하고 스승
의 예를 갖춘 뒤에 왕사를 봉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고려 불교사에 세 번
사양한 분이 기록상 없다고 하는데 원진국사는 다섯 번이나 왕사의 추대를 받
고도 사양하였던 것이다.
---고종8년 신사(1221년) 여름에 그 문하학도와 중들을 모아놓고 능엄경을 강설
하였다. 최후의 강설이라고 대중들에게 일깨웠다. 하루는 대중을 운집시키고 법
상에 올라서 한참동안이나 입정하고 계시다가 주장자로 법상을 세 번치고 대중
에게 「여러분은 이 소리를 다 들었는가?」「예! 다들었습니다」 스님은 다시
주장자를 들어 대중에게 보이면서 「여러분은 이 주장자를 보았는가?」「예,
보았습니다」「응, 그 무엇을 듣고 보았는가?」한 승려가 대답하기를 「예, 그
것은 우리의 안식, 이식, 즉 눈, 귀입니다」「응 그 의식은 이디에 있는고?」그
때에 대중은 꿀먹은 벙어리가 되었다.「그대가 밖에 있는 것도 아니며, 허공에
있는 것도 아니고 어느 중간에 있는 것도 아니로다. 그것은 이미 능엄경에서
밝한 바가 아닌가. 즉 부처님은 이 본연의 진성을 그대로 되찾는 분이고 그 진
성은 빛깔도 소리도 냄새도 형체도 없으면서 보고, 듣고, 냄새맡고, 맛보고, 기
뻐하고, 슬퍼하고, 사랑하며, 생사고해에 헤매나니 어찌 슬프지 않으랴」하였으
며, 또 하루는 스님이 대중을 돌아보면서 「정법을 만나기 어려움이 마치 눈먼
거북이가 나무등걸 만나는 것과 같은 것이요, 나도 세상에 오래 머물지 못할
것이니 여러분은 헛되게 광음을 보내지 말고 힘껏 불법을 선양하여 부처님 은
혜를 갚도록 하오」하고 설법하였다. 7월 그믐에 팔공산 염불암으로 옮겨가서
청림, 원정 두 선덕과 조용히 도를 이야기하고 8월 20일에 머리를 깎고 목욕하
고 시자를 불러 옷을 갈아입고 법상에 올라 좌정하고 있다가 「이 법은 나고
꺼짐이 없고 가고 옴이 없지만 바닷물이 바람따라 물결이 일고 꺼지나니 보는
것은 중생의 망견이요, 나고 꺼짐이 없는 도리를 체득한 것이 불도의 뜻이로다.
산승이 오늘에 생멸이 없는 법에서 생멸의 인연을 보이나니 여러분은 생멸상으
로 보지 말라. 일체 법이 나는 것도 일체법이 꺼짐도 없도다. 이렇게 법성을 볼
것 같으면 모든 부처님이 항상 앞에 드러나니라」라는 계송을 읊고 그 계송을
범패로 부르게 하고 조용히 좌정할 때 한 중이 「스님 임종계(유언)를 하나 남
기소서」라고 하자 스님은 그 중을 빤히 바라보며 「이 어리석은 자야 이밖에
무슨 임종계가 따로 있느냐, 나는 평생에 따로 짓지 않았다」하고 주장자로 세
번 법상을 치고 조용히 입정하였다. 다시보니 숨을 거두신 후였다. 그러나 안색
이 변함없고 온몸이 생시와 같았다.
---그해 10월 10일에 문하생 50여명이 남쪽 산부리에 화장하고 명일 영골을 주
워 보경사 산록에 탑을 세워 사리를 봉안한 것이 보물 430호인 원진국사 부도
이다. 나이는 51세이며, 출가한 나이는 38세이었다. 상감께서 그 부음을 듣고
크게 슬퍼하여 시호를 원진이라고 국사의 칭호를 내렸다. 그리고 문신이 골로
로 하여금 비문을 짓게하여 원진국사비를 세우도록 하셨다고 한다.
---원진국사 부도는 보물 제430호로 보경사 경내에 있다. 높이는 4.5m, 직경
1.4m 화강암으로 된 팔각원당형(八角圓堂型)이다. 하대석은 3단, 하측단은 무문
팔각(無紋八角) 상단은 섬세한 단변복연(單辨伏蓮) 상대석은 윗면에 받침있는
앙연석문양(仰蓮石紋樣)이 있다. 탑신은 팔각석주와 비슷한데 우주가 있는 면에
문호형(門戶形)이 모각(模刻)되어 있다.
---옥개석은 하면우각으로 뻗은 강기선(降起線)이 있으며 전각에 귀꽃을 장식하
였으며 추녀는 두터운 편이고 상륜부는 팔엽연화(八葉蓮花)의 앙화(仰花)위에
구형의 복발(覆鉢)을 높이고 앙화형의 한 돌을 높인 다음 보주를 얹고 있는 완
전한 형태의 부도이다.
※부도 : 고승의 사리나 유골을 넣어 두는 둥근 돌탑.(2002. 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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