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사(金沙) 김확(金矱)과 숙인 동래정씨의 행력 -김성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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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7-04-27 10:34 조회1,813회 댓글0건본문
금사(金沙) 김확(金矱)과 숙인 동래정씨의 행력
김 성 환(경기도미술관 학예연구관)
Ⅰ. 머리말
Ⅱ. 포천 안동김씨의 선영과 김확묘(金矱墓)의 천장
Ⅲ. 김확의 가계와 행력
Ⅳ. 묘갈명과 묘지명
Ⅰ. 머리말
철원부사 김확(金矱)의 묘는 영평현 종현산(鍾顯山) 동쪽에 있는 선영[현 포천시 창수면 추동리]에 조성되었고, 2년 먼저 죽은 부인 숙인 동래정씨(東萊鄭氏) 역시 이때 함께 부장(祔葬)되었다. 그러나 2003년 4월 안동김씨 문온공파에서는 포천에 산재한 선영의 분묘중 일부를 천장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대상 지역은 먼 거리가 아니었고, 역시 같은 지역에 있는 문중 선영중의 하나인 창수면 가양리였다. 김확과 동래정씨의 무덤 역시 그 대상중 하나였다.
원래의 무덤 현상을 확인하지 못해 저간의 사정을 알 수 없으나, 후에 천장한 곳을 답사하며 대체로 원형을 변경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음을 알 수 있었다. 현재 묘역의 상태는 봉분의 밑 부분에 대리석제의 원형의 호석이 둘러져 있고, 그 앞에는 외조카 이민구(李敏求)가 지은 묘갈명을 새긴 묘갈이 세워져 있는데, 앞면에는 “통훈대부 상의원정 금사김공확지묘 숙인동래정씨부좌(通訓大夫 尙衣院正 金沙金公矱之墓 淑人東萊鄭氏祔左)”라고 새겨 이 무덤이 김확과 부인 동래정씨의 것임을 알 수 있게 했다. 묘역에 설치된 석물로는 상석․향로석․문인석(2)․망주석(2)과 묘역의 일반 구역과 봉분을 구분하기 위해 상석의 중간 지점에서 길게 장대석을 두르고 있다. 이로 미루어 천장 이전의 무덤 역시 대체로 이와 같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때 천장 작업을 진행하면서 그들의 무덤에서는 다량의 유의(遺衣)와 비롯하여 청화백자로 구워진 9매의 묘지(墓誌) 등이 출토되었다. 경기도박물관에서는 포천시로부터 그 현황을 접수하고, 현지에 나갔으나 이미 천장이 완료된 상태여서 그 현상을 직접 조사할 수는 없었다. 이에 문중에서 수습하여 이미 일차 세척된 유의와 함께 묘지명만을 인수하고, 며칠 후 무덤이 옮겨진 곳을 답사하여 관을 비롯한 약간의 염습구(殮襲具)를 수습할 수 있었다.
이 글은 이때 출토된 복식의 상태와 현황을 학계에 보고하기 위해 진행한 보고서 작업의 하나로 의도되었다. 따라서 그 목적은 수습 유의의 자세한 상태와 현상을 살펴보기에 앞서 그 주인공인 김확과 숙인 동래정씨의 행력을 보다 구체적으로 추적하려는데 있다. 하지만 김확의 문집인 『금사집(金沙集)』이 전하지 않아 주변자료만으로 그들의 행적을 추적하기에는 많은 한계가 있었다. 따라서 묘지명을 중심으로 철원부사 확과 부인 동래정씨의 행력을 간략하게 정리하기로 한다.
Ⅱ. 포천 안동김씨의 선영과 김확묘(金矱墓)의 천장
김확(金矱)과 숙인 동래정씨(東萊鄭氏)의 묘는 포천군 창수면 추동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곳이 묘갈명에 언급된 동음현(洞陰縣)의 선영이자 묘지명에 기록되어 있는 영평현(永平縣) 종현산(鍾賢山) 동쪽 산기슭 정좌(丁坐)의 구릉이다.1) 『포천군지』에 의하면, 1934년 포천에서 안동김씨의 세거지로는 창수면 주원리의 19세대만 조사되었으나, 1953년에는 포천면 신읍리의 59세대, 창수면 추동리 20세대가 조사되었다.2) 또 1953년의 조사에서는 안동김씨가 포천에 입거한 때는 약 220년으로 추정하고 있지만, 자료를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지 않아 자세한 내용은 확인하기 어렵다.
안동김씨가 포천에 세거하기 시작한 때는 15세기 중반으로 문온공(文溫公) 구용(九容, 1338-1384)의 손자이자 성천도호부사를 지낸 명리(明理, 1361-1438)의 아들인 예문관직제학 맹헌(孟獻, 1397-?)의 묘가 영평현 남면 계류동(溪流洞)에 조성되는 것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짐작된다. 어떤 연고로 맹헌이 계류동에 묻히게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이후 안동김씨 문온공 일파는 포천에서 세거하며 지역의 유력성씨로 서서히 자리하게 되었을 것이다. 『세종실록』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포천현」에는 김씨가 토성 또는 성씨조에 실려 있고,3) 이는 『여지도서』에도 마찬가지이다.4) 물론 옛 지리지에 실린 포천의 성씨중 하나인 김씨가 안동김씨를 지칭한다고 단언할 수 없지만, 안동김씨의 포천에서의 입향 시기는 대략 15세기 중반으로 보아도 무리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포천 지역에 분포한 안동김씨의 선영은 대략 4-5개소인 것으로 확인된다. 맹헌과 숙부인 양성이씨, 자양(自壤)과 정부인 연안김씨, 예생(禮生)과 정부인 인천이씨, 윤종(胤宗)과 정부인 풍산김씨 등이 묻힌 영평 남면 계류동, 진기(震紀)와 의인 여흥이씨가 묻힌 창수면 가양리, 대섭(大涉)과 의인 청송심씨, 확(矱)과 동래정씨, 경복(慶復, 1662-1713), 택인(宅仁, 1753-1825)와 청송심씨 등이 묻힌 창수면 추동리 절골, 정지(鼎之, 1600-1641)와 여흥이씨, 환(奐, 1637-1677)과 숙부인 평산신씨 등이 묻힌 창수면 주원리, 형(瀅, 1715-1771)과 여흥이씨․광주이씨가 묻힌 영중면 불무산 수문동 등이 그곳이다.
이로 미루어 안동김씨의 선영은 15세기 중반 영평 남면 계류동에 먼저 조영되었고, 이후 후손의 확산으로 창수면 일대의 가양리․추동리․주원리, 영중면 수문동 일대로 확대되었음을 알 수 있다. 즉 포천지역에서 안동김씨는 포천시 신북면과 연천군 청산면의 경계에 있는 종현산의 동쪽인 창수면 주원리․추동리․가양리 일대에 세거하며 선영을 조영했는데, 그 지역이 처음의 계류동에서 가양리→추동리→주원리 등으로 확대되었다. 이는 후대로 내려오면서 한 지역의 선영이 점차 좁아지거나 후손들의 자연적인 확산으로 먼 거리보다는 근거리에 새로운 선영을 조성하는 등의 여러 가지 이유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이는 또 현재 포천지역에서 안동김씨의 최다 집성지인 주원리를 중심으로 가양리․추동리 일대에 이들이 분포하고 있는 상황과 대략 일치하는 것이다.
현재 포천에 세거하는 안동김씨 문온공파에서는 집안의 별장인 오가리의 금수정(金水亭)과 가양리의 선영을 중심으로 여러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최근 금수정 안에 척약재(惕若齋) 김구용의 시비(詩碑)를 건립하거나, 종가터의 정비․복원을 위해 발굴조사를 실시하기도 했다.5) 또 광주시 오포면 목리에 있던 명리의 묘를 이곳 가양리로 옮기기도 했다.6)
확과 부인 동래정씨의 묘를 천장하게 된 배경 역시 여기에 있는 듯 하다. 이들의 묘는 원래 창수면 추동리의 선영에 있었다. 이는 그의 아버지인 도사공 대섭과 청송심씨의 묘가 그곳에 먼저 조영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를 따랐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2001년 4월 조부 진기와 여흥민씨의 묘가 조영되어 있는 인근 가양리로 옮겨지게 되었다. 아마도 추동리의 선영 일부를 폐기하여 가양리로 옮기는 과정중의 하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묘가 조성된 지 약 370여년 후의 일이었다. 이 과정에서 확과 동래정씨의 분묘에서는 그들의 유의(遺衣)와 함께 약간의 명기 및 묘지명이 출토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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