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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확의 가계와 행력-김성환(경기도미술관 학예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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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7-04-30 09:19 조회2,00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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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김확의 가계와 행력


  1. 가계와 행력

  

  안동김씨 문온공파는 고려 원간섭기 성리학을 수용하여 이색(李穡)․정몽주(鄭夢周)․이숭인(李崇仁)․정도전(鄭道傳) 등과 함께 성균관을 중심으로 고려의 부흥을 위해 노력했던 척약재 김구용을 파조(派祖)로 한다.1) 그는 확의 9대조가 된다. 즉 구용 이후 그 가계는 그의 차남 성천부사 명리→ 장남 예문관직제학 맹헌→차남 내섬시첨정 자양→장남 청도군수 예생→장남 경상좌병마사 윤종→장남 활인서별제 진기→장남 의금부도사 대섭→장남 철원부사 확으로 이어졌다.

  구용 이후 그의 선계는 크게 현달한 인물을 배출하지 못한 것 같다. 1426년(세종 8) 문과에 급제하고 예문관직제학으로 『고려사절요』․『세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했던 맹헌2) 정도가 주목될 뿐이다. 또 맹헌의 손자인 예생과 증손인 윤종이 문과가 아닌 무과에 급제하여 청도군수․경상좌병사 등을 역임하고 있으며, 나머지는 음사나 천거로 비교적 하위직에 나가고 있음에서도 그러하다.3) 이런 점에서 확의 문과 진출은 포천을 지역적 기반으로 하던 문온공파 일파에게 큰 영예였을 것이다.     

  확은4) 1572년(선조 5) 의금부도사 대섭과 청파군 심전(沈銓)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자는 정경(正卿)이고 호는 금사(金沙)이다. 체격이 우람하고 기개가 뛰어났으며, 작은 일에 구애하지 않았다고 한다. 또 사물을 대할 때 일정한 법식에 얽매이지 않았다고 한다. 일찍이 양천허씨 집안으로 출가한 누님이 죽자 그 남편의 묘에 반장(返葬)하고, 4세였던 그 딸을 장성할 때까지 보살피기도 했다. 젊어서 하곡(荷谷) 허봉(許篈)에게 수업했고, 1589년(선조 22) 18세의 나이로 진사시에 합격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부모와 함께 북쪽으로 피난했다가 돌아왔는데, 남원에서 패한 총병(摠兵) 양원(楊元)의 군대로 인해 전쟁에서 입은 손해가 길에 가득하자 수성도(隋城道)에서 죽을 쑤어 이들을 구제하기도 했다. 1594년 부친상을 당하여 상을 마치고, 1618년(광해군 10)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성균관에 들어가 광흥창봉사(廣興倉奉事)를 겸임하여 광흥창의 폐단을 개선하는데 노력했다. 1622년에는 한준겸(韓浚謙)의 군막에서 종사관을 지냈고, 이듬해 인조반정으로 인조가 즉위하자 신민일(申敏一)·윤순지(尹順之)․리덕수(李德洙)·홍헌(洪憲)·송시길(宋時吉) 등과 함께 그해 회시의 소학강시관(小學講試官)으로 참여했다.5) 또 성균관좨주인 정엽(鄭曄)의 추천으로 명륜당(明倫堂)과 정록청(正錄廳)을 중수하는 등 성균관의 재건에 힘을 썼다.

  그 공을 인정받아 병조정랑이 되었는데,6) 사람의 추천을 잘못했다는 대간의 탄핵에 맞서다 파직 당하기도 했다. 이 때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 한양을 침범하자 자전(慈殿)을 호가(扈駕)했고, 1625년 직강․사예․사옹원정7) 등을 역임했다. 원주목사(原州牧使)로 부임해서는 민폐를 제거하고 학교를 수리하는 등 선정을 행하여 인조에게 비단을 하사받기도 했다. 또 진하전문(陳賀箋文)에 홍첨(紅籤)을 사용한 것에 대해 추고(推考)하기를 청하는 조익(趙翼)의 계(啓)에 의해 강원도관찰사 김상(金尙)․강릉부사 정종명(鄭宗溟) 등과 함께 추문되기도 했다.8) 그러나 관찰사와의 마찰로 파직되었다. 이에 그의 유임을 청하는 도민(道民)의 상소가 있기도 했다.9) 

  1627년 이윤우(李潤雨)·김육(金堉) 등과 함께 회시의 소학고강관(小學考講官)을 지냈고,10) 또 목장흠(睦長欽)·이충양(李忠養)·이목(李楘)·김물(金岉)·이윤우·김반(金槃)·원진하(元振河)·윤전(尹烇)·이경증(李景曾) 등과 함께 정시문과의 대독관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다시 한준겸의 종사관으로 등용되어 세자를 모시고 남쪽으로 피난했으며, 이후 사옹원정․군자감정을 거쳐 12월 제용정(濟用正)에 임명되었다.11)

  이듬해 초 조해연(趙海淵)·김황(金璜) 등과 함께 가형(加刑)되었다가12) 곧 이어 순창군수(淳昌郡守)로 부임하여13) 흉년으로 굶주린 백성을 구휼하고 백성들에게 종자를 나누어 주어 농사를 권장하는 등 시혜(施惠)했으나 역시 관찰사의 혐의를 입어 해임되었다.14) 1629년 상의원정(尙衣院正)을 거쳐15) 철원부지사(鐵原府知使)로 나갔으나16) 1633년 병으로 인한 관찰사의 요청으로 1633년 파직되어 그해 7월 죽었다.

  일찍이 동음현(洞陰縣) 하류의 물가에 초당을 지어17) 초야의 현인(賢人)들과 교유했다. 문장에 뛰어났고 자신을 다스림에는 명절(名節)로 가다듬었으며 정사를 행함에는 교화로 사람을 이끌어 적절하지 않은 것이 없는 한편, 세도가에 아부하지 않고 조용히 스스로를 영위했다는 평을 들었다.

  부인 동래정씨는 1567년(명종 22) 태어났으니 남편보다 5년 연상이었다. 우의정 언신(彦信)의 딸로 차분하고 말이 적었으며, 행실이 간결하다는 평을 들었다. 부모를 섬기는 것과 같이 시부모를 섬기며 매일 길쌈을 하면서도 매일같이 찾아오는 손님들을 접대하는데 정성을 다했다. 가사와 노비를 부리는데 방도가 있어 집안을 일으켰다. 남편보다 2년 앞선   1631년 죽어 그 곁에 부장했다.

  그는 도사 대섭의 아들로 아버지의 관직은 현달했다고 할 수 없지만, 청송군 심전(沈銓)을 외조부로, 영의정 정언신(鄭彦信)의 딸을 배필로 맞았다. 즉 심전의 아들인 우선(友善), 성균진사 우준(友俊), 한성부우윤을 지내고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책록된 청계부원군(靑溪府院君) 우승(友勝), 우순(友醇)은 그의 외숙이고, 정언신의 아들 대사헌 협(協)은 그의 처남이다. 또 그의 누이들이 양천허씨의 허균과 완산이씨의 이수광(李晬光)에게 출가하여 그들은 그의 매부이다.18) 특히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은 허균의 딸을 장성할 때까지 보살펴 출가시키고,  이수광의 아들인 성구(聖求)와 민구(敏求) 등이 항상 그의 집에서 놀았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이들과의 교류가 밀접했음을 알 수 있다.19) 이 같은 그의 친인척 관계는 그의 가문이 당시 과거 등을 통해 중앙 관직에 진출하지 못하고 있지만, 고려 말 김구용과 조선 초 명리→맹헌으로 이어지는 명문가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참고로 그의 가계를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표 1> 안동김씨 문온공파(文溫公派) 가계



신라 경순왕………金方慶………九容(方慶의 고손, 판전교시사, 文溫公派祖)

                               ┞―――――――――――――――――――――┑

                            南陽洪氏(예의정랑 義元 女)                     │

                                                                           |

 ┎――――――――――――――――――――――――――――――――――――┙

 |┎―――明善

 ┖╀―――明理           ┎―――孟獻

   |   (성천부사)        |  (예문관직제학)      ┎――――自埥

   |       |            |        ┞――――――╆――――自壤

   |       |            |     陽城李氏         |    (內贍寺僉正)

   |       |            | (양성부원군 思儉 女) |          ┞―――――┑

   |       |            ┡―――仲舒            |       延安金氏       |

   |       ┞――――――╁―――季友            |     (郡事 晙 女)     |

   |    慶州李氏         ┞―――壻 權煊         ┟――――壻 尹沂       |

   |(계림부원군 達衷 女) ┞―――壻 南景福       ┟――――壻 李世土缶     |

   |                     ┞―――壻 金鐵山       ┖――――壻 宋順年     |

   ┕―――明允           ┕―――壻 崔善文                               |

                                                                          |

  ┎―――――――――――――――――――――――――――――――――――┙

  ┖禮生

 (淸道郡守)    ┎――胤宗

     ┞――――┦(경상좌병마사)  ┎―――震紀

  仁川李氏     |      ┞――――┦  (활인서별제)

(감찰 萬壽 女) |   豊山金氏     |       ┞―――――――大涉

               |(장령 永銖 女)  |    驪興李氏       (의금부도사)

               ┞――胤先        | (생원 敏生 女)         ┟――――――┑

               ┞――胤福(庶子)  ┟―――震綱           靑松沈氏         |

               ┖――壻 柳近     ┟―――震經(庶子)  (청파군 銓 女)      |

                                 ┟―――壻 尹雲                         |

                                 ┟―――壻 李沈                         |

                                 ┕―――壻 李株國                       |

   ┎――――――――――――――――――――――――――――――――――┚

   |┎――― 

   ┖┦   (철원부사)      ┎鼎之(생원)――奐

     |       ┞―――――┾吳挺柱

     |    東萊鄭氏       ┟宋之獻

     | (우의정 彦信 女)  ┟李成翼

     |                   ┟徐文道

     |                   ┖洪億

     |   

     |                  ┎聖求

     ┟―― 壻 李睟光――┾敏求                 

     |                  ┖權儆

     ┕―― 壻 許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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