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확의 행력-교유인물-1-학연을 통한 교류- 김성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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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7-05-03 11:55 조회1,952회 댓글0건본문
2. 교유 인물
김확이 교유 관계에 대해서는 먼저 그가 문과를 통해 진출한 관료이기 때문에 학연으로 맺어진 관계와 관직 생활을 통한 교류 관계, 향리인 포천 영평을 중심으로 그곳의 사인․문인과의 교류 관계, 인척으로 이루어진 관계 등을 고려할 수 있다. 특히 외조카인 이민구(李敏求)가 지은 묘지명에서 “평소에도 손님이 오면 반드시 주식(酒食)을 차려놓고 날마다 마시는 것을 낙으로 삼으니 한가롭게 노니는 사람들이 모여들었다”거나 “일찍부터 초야의 현인(賢人)들과 노닐며 성대한 명망이 있었다”고 평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1) 그의 대인관계가 폭넓게 이루어졌음을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부분 역시 그의 문집인 『금사집(金沙集)』이 전하지 않는 상황에서 구체적으로는 파악하기 어렵다. 더욱이 병조에 있으면서 천거를 잘못한 동료의 잘못을 감싸다가 파직당한 예나 세도가나 권력자에 아부하지 않았다는 평도 있어2) 성품의 강직함을 엿볼 수 있다. 이에 그와 교유한 인물들에 대해서 위의 고려를 염두에 두고 살펴보기로 한다.
1) 학연을 통한 교류
그는 일찍이 허봉(許篈)에게 수학했다.3) 그리고 1589년(선조 22) 진사시에 합격했고, 비교적 늦은 나이인 44세 때인 1618년(광해군 10) 무오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했다. 그는 수학과정에서, 또 진사시 및 문과에 급제하기 이전 많은 사람들과 교류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시기 교류의 구체적 관계를 확인할 수 없다.4) 자료가 없기 때문이다. 다만 문과 급제 때인 1618년 『문과방목』을 통해 함께 급제한 사람들에 대해서만 어느 정도 파악이 가능하다.
1589년 그와 함께 진사가 되었던 동방(同榜)은 『사마방목』을 통해 확인이 가능하지만, 이때의 문건은 전하지 않는다. 다만 이때를 전후한 시기의 『문과방목』에서 이들의 명단을 확인할 수 있는데, 승지 박사제(朴思齊)․분병참(分兵參) 이성길(李成吉)5), 장령 남탁(南晫)․참찬 박동선(朴東善)6), 병조좌랑 민유부(閔有孚)․예조좌랑 이천(李)7), 도원수 장만(張晩)․직학 조정립(趙正立)8), 영의정 심열(沈悅)․판결사 이심(李)9), 강원감사 정곡(鄭)10), 공조판서 윤휘(尹暉)11), 부사 안창(安昶)․부제학 홍경신(洪慶臣)12), 대사헌 유경종(柳慶宗)13), 이조판서 심액(沈)․판돈녕부사 윤경(尹絅)14), 아산현감 조수인(趙守寅)15), 교리 소광진(蘇光震)16), 도원수 강홍립(姜弘立)17), 교리 유시행(柳時行)18), 필선 유기문(柳起門)․주부 전위(田)19), 사인 권흔(權)․응교 손척(孫倜)20), 동지중추 박재(朴)21), 부제학 이호신(李好信)22), 현감 조색(趙穡)․강진현감 이함일(李涵一)․지중추 전식(全湜)․동지 정대해(鄭大海)23), 분승지 민호(閔頀)24), 익산군수 이덕일(李德一)․사간 임건(林健)․장령 강익문(姜翼文)25), 6품 최전(崔)26), 병조좌랑 권득기(權得己)27), 울산부사 민여검(閔汝儉)28), 예조정랑 박돈(朴)29), 삼사사 안경심(安景深)30), 판교 정문회(鄭文晦)31) 등이 그들이다. 김확은 이들과 학문을 비롯한 제반에서 교류했을 것이지만, 그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다.
또 1618년 그와 함께 문과에 급제한 사람들은 김기종(金起宗)․최시량(崔始量)․유대화(柳大華)․유정립(柳鼎立)․박수홍(朴守弘)․박선(朴)․오준(吳竣)․이지굉(李志宏)․정결(鄭潔)․전대년(田大年)․이경인(李景仁)․양유인(梁有仁)․이의활(李宜活)․유속(柳)․안홍중(安弘重)․나만기(羅萬紀)․이원량(李元樑)․이경헌(李景憲)․한극겸(韓克謙)․민심(閔)․신서정(申瑞廷)․이경용(李景容)․유진정(柳震禎)․정사명(鄭四溟)․박광선(朴光先)․이민수(李敏樹)․허항(許恒)․성하연(成夏衍)․배홍우(裵弘祐)․김남중(金南重)․지성해(池成海)․심지명(沈之溟)․임기지(任器之)․이기(李耆)․최구(崔衢)․전대방(田大方)․이영구(李榮久)․김이일(金以一)․김원(金瑗) 등이다.32) 그는 이때 을과 5인으로 급제했는데, 그와 함께 진사시에 합격했던 동료는 없었다. 이는 그가 40대 중반이라는 비교적 고령으로 과거에 급제했기 때문인 것으로 짐작된다. 즉 그가 18세의 진사시에 합격한 이후 25년여 후에 늦은 나이로 비로소 과거에 이름을 올린 이유는 임진․정유 등의 국가적 위기에 따른 현실인식과 함께 부친상으로 인한 15년 동안의 부호(扶護) 때문이었다. 이는 부친상 이후 15년 동안 거친 싸라기 죽을 먹으며 수없이 통곡하는 모친의 부호(扶護)를 위해 허리띠를 풀지 않고 봉양했고, 상(喪)을 당하자 염습(殮襲)부터 반장(返葬), 묘역(墓域) 조성, 묘전(墓田) 마련에 이르기까지 정성을 다했다거나 선산을 멀리할 수 없어 가까운 동음현(洞陰縣) 하류의 물가에다 집을 지어 머물렀다는 묘지명의 내용에서 확인할 수 있다.33)
한편 그의 쓴 한 수의 시가 전하는데, 이는 과거에 급제하던 해인 1618년 장원한 김기종에게 보낸 것으로 바쁜 관직 생활과 멀리 떨어져 있음으로 인한 적적함을 읊고 있다.
奉次 狀元令鑒瓊韻呈案下/장원 영감의 운으로 올리다
秋來久斷故人書/오래전 가을이 왔는데도 옛 친구 편지 끊기고
簿領關心跡自疎/문서에 마음이 묶여 거동 역시 자연 소홀했네
未必重陽爲勝事/꼭 9월 9일에 좋은 일이 없다 해도
前溪何日不觀魚/어느 때인들 앞 계곡에서 고기를 볼 수 없기야 하겠나
기사년(1629) 중추(仲秋) 상순(上旬)
방하생(榜下生)
즉 이 시는 그가 상의원정(尙衣院正)과 철원부지사(鐵原府知使)를 지내던 말년에 지은 시로, 이때 김기종은 비변사 당상관에 있어 중앙의 요직을 차지하고 있었다.34)
1) 金起宗(1585∼1635).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강릉, 자는 仲胤, 호는 聽荷이다. 哲命의 아들이다. 1618년 증광문과에 장원급제하여 正字가 되었고, 이듬해 謝恩使의 서장관으로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인조반정으로 인조가 왕위에 오르자 李爾瞻이 私黨을 심기 위해 과거에 참여하여 장원하였다는 비난을 받아 淸議를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청요직에 허락되지 않았다. 1624년 關西元帥 張晩이 李适의 난을 평정할 때 종사관으로 종군하여 공을 세워 용서받고, 적극 등용되어 兩司를 거쳐 振武功臣 2등에 책록되었으며, 瀛海君에 봉해졌다. 청렴하고 조신하다는 평을 들었다. 편서로 『西征錄』이 있다. 시호는 忠定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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