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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확(金矱)과 관련한 시문(詩文)[1] *손곡 이달. 지봉 이수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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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7-05-09 12:36 조회1,611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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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확(金矱)과 관련한 시문(詩文)


『蓀谷詩集』(李達)권2, 오언율,

「次韻呈金沙」

京洛幾年別

今來千里遊

天涯長作客

關外又逢秋

落葉飛前浦

斜陽下晩洲

流離且貧病

獨立萬端憂

 

『芝峯先生集』(李晬光)권4, 칠언율시,

「次金正卿送韓體察[益之]韻」

雙旌初下五雲間

威壓扶桑左海安

邊月曉隨丞相府

福星春動使臣鞍

淸風攬轡曾千里

壯志封關只一丸

此去姓名寒賊膽

更從燕石上頭刊

公曾任嶺南方伯

[故第三聯云爾]


『芝峯先生集』권4, 칠언율시, 「

丁未重九日 金正卿第醉話 席上口占」

杜門驚却歲時忙

愁裏佳辰強擧觴

紅葉庭除新過雨

黃花院宇早迎霜

西風敗我登高興

世事何心落帽狂

邂逅莫辭今日醉

餘生能得幾重陽


『芝峯先生集』권18, 昇平錄[昇平 順天別名 起丙辰九月 止己未三月]

「別金正卿還洛」

樽酒天涯一夢間

客懷無限送君還

喚仙亭上梅花月

留作他時別後顏

 

이달(李達)1
1539(중종 34)∼1612(광해군 4). 조선 중기의 시인. 본관은 신평(新平). 자는 익지(益之), 호는 손곡(蓀谷)·서담(西潭)·동리(東里). 영종첨사 수함(秀咸)의 아들이나, 홍주의 관기(官妓)에게서 태어났으므로 서자로 자랐다.
제자 허균(許筠)이 그의 전기 〈손곡산인전 蓀谷山人傳〉을 지으면서 “손곡산인 이달의 자는 익지이니, 쌍매당 이첨(李詹)의 후손이다.”라고 밝혀 놓았다. 원주 손곡에 묻혀 살았기에 호를 손곡이라고 하였다.
처음에는 당시 유행에 따라 송시(宋詩)를 배우다가, 정사룡(鄭士龍)으로부터 두보(杜甫)의 시를 배웠다. 박순(朴淳)이 그에게 시를 가르치다가 “시도(詩道)는 마땅히 당시(唐詩)로써 으뜸을 삼아야 한다. 소식(蘇軾)이 비록 호방하기는 하지만, 벌써 이류로 떨어진 것이다.”라고 충고하면서, 이백(李白)의 악부(樂府)·가(歌)·음(吟)과 왕유(王維)·맹호연(孟浩然)의 근체시(近體詩)를 보여주었다.
그는 시도가 여기에 있음을 깨닫고, 손곡의 집으로 돌아와 당시를 익혔다. 《이태백집》과 성당십이가(盛唐十二家)의 글, 유우석(劉禹錫)과 위응물(韋應物)의 시, 양백겸(楊伯謙)의 《당음 唐音》 등을 외웠다. 이렇게 5년 동안 계속 당시를 배운 뒤에는 그의 시가 예전과 달라졌다.
한편, 시풍이 비슷한 최경창(崔慶昌)·백광훈(白光勳)과 어울려 시사(詩社)를 맺어, 문단에서는 이들을 삼당시인(三唐詩人)이라고 불렀다. 이들은 봉은사를 중심으로 하여 여러 지방을 찾아다니며 시를 지었는데, 주로 전라도 지방에서 많이 모였다.
임제(林悌)·허봉·양대박(梁大樸)·고경명(高敬命) 등과도 자주 어울려 시를 지었다. 서자였기 때문에 일찍부터 문과에 응시할 생각을 포기하였지만, 다른 서얼들처럼 잡과(雜科)에 응시하여 기술직으로 나가지도 않았다. 특별한 직업을 가지지도 않았고, 온 나라 안을 떠돌아다니면서 시를 지었다.
그러나 성격이 자유분방하여 세상사람들에게 소외당하였다. 한때 한리학관(漢吏學官)이 되었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생겨서 벼슬을 버리고 떠났다. 중국 사신을 맞는 접빈사의 종사관으로 일하기도 하였다.
그의 시는 신분제한에서 생기는 한(恨)과 애상(哀傷)을 기본정조로 하면서도, 따뜻하게 무르녹았다. 근체시 가운데서도 절구(絶句)가 뛰어났다. 김만중(金萬重)은 《서포만필》에서 조선 시대의 오언절구 가운데 대표작으로 그가 지은 〈별이예장 別李禮長〉을 꼽았다.
허균은 〈손곡산인전〉에서, “그의 시는 맑고도 새로웠고, 아담하고도 고왔다(淸新雅麗). 그 가운데 높이 이른 시는 왕유·맹호연·고적(高適)·잠삼(岑參) 등의 경지에 드나들면서, 유우석·전기(錢起)의 풍운을 잃지 않았다. 신라·고려 때부터 당나라의 시를 배운 이들이 모두 그를 따르지 못하였다.”고 평하였다.
그는 일흔이 넘도록 자식도 없이 평양 여관에 얹혀 살다가 죽었다. 무덤은 전해오지 않으며, 충청남도 홍성군 홍성군청 앞과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손곡리 손곡국민학교 입구에 시비(詩碑)가 세워져 있다.
시집으로 제자 허균이 엮은 《손곡집》(6권 1책)이 있다. 이밖에 최경창의 외당질 유형(柳珩)이 엮은 《서담집 西潭集》이 있었으나 현재 확인되지 않고, 1623년 이수광(李睟光)이 지어준 서문만이 전한다.

 

 

이수광(李睟光)
1563(명종 18)∼1628(인조 6). 조선 중기의 유학자·문학자.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윤경(潤卿), 호는 지봉(芝峯).

1. 가계

아버지는 병조판서였던 희검(希儉)이며, 어머니는 문화유씨(文化柳氏)이다. 부인은 안동김씨 김대섭의 딸이다.
16세 때 초시에 합격하였고, 17세에 아버지를 여의었다

 

2. 관직

20세에 진사가 되었고, 1585년(선조 18)23세에 승문원부정자가 되었으며, 27세에 성균관전적을 거쳐 그 이듬해에는 호조와 병조의 좌랑을 지냈고, 성절사(聖節使)의 서장관으로 명나라를 다녀왔다.
30세 되던 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상도방어사 조경(趙儆)의 종사관이 되어 종군하였으나, 아군의 패배 소식을 듣고 의주로 돌아가 북도선유어사(北道宣諭御史)가 되어 함경도지방의 선무활동에 공을 세웠다.
1597년 35세에 성균관대사성이 되었는데, 그해 정유재란이 일어나고 또 명나라 서울에서 중극전(中極殿)과 건극전(建極殿) 등 궁전이 불타게 되자 그는 진위사(陳慰使)로서 두번째 명나라를 다녀왔다.
이때 명나라 서울에서 안남(安南:베트남)의 사신을 만나 화답하면서 교유하였던 사실이 주목된다.
39세에 부제학으로 《고경주역 古經周易》을 교정하였고 그 이듬해 《주역언해》를 교정하였으며, 41세에는 《사기》를 교정하였다.
1605년 43세에 조정 관료들과 뜻이 맞지 않아 안변부사로 나갔다가, 이듬해 병으로 사직하고 돌아와 1607년 겨울 다시 홍주목사로 부임하였다가 1609년(광해군 1)돌아왔다.
1611년 왕세자의 관복(冠服)을 주청하는 사절의 부사로 세번째 명나라을 다녀왔다.
이때에 유구(琉球)사신과 섬라(暹羅:타이)사신을 만나 그들의 풍속을 듣고 기록하였다. 정국이 혼란하여지자 1616년 순천부사가 되어 지방관으로 나가 지방행정에 전념하였다.
57세에 임기를 마치고 돌아와서는 수원에 살면서 모든 관직을 사양하여 나아가지 않다가, 1623년 인조반정이 되자 도승지 겸 홍문관제학으로 임명되고 대사간·이조참판·공조참판을 역임하였다.
1625년 대사헌으로서 왕의 구언(求言)에 응하여 12조목에 걸친 〈조진무실차자 條陳懋實箚子〉를 올려 시무를 논하여 당시 가장 뛰어난 소장(疏章)이라는 평을 받았다.
1628년 7월 66세에 이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그해 12월에 세상을 떠났다.

 

3. 사회상황

그는 일찍이 관직에 나아가 중요한 관직을 모두 지냈으며, 세차례나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던 일만으로 보아도 관료로서의 구실을 충분히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그의 활동 시기에는 임진왜란과 정묘호란을 치르고, 광해군 때의 정치적 갈등과 인조 때의 이괄(李适)의 반란을 겪었던 어려웠던 정국에 살면서도 당쟁에 휩쓸리지 않았으며, 언제나 강직하면서도 온화한 입장을 지켜 그 시대의 성실하고 양식 있는 관료요 선비로서의 자세를 지켰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면모는, 사회적 변동기에 새로운 사상적 전개 방향을 탐색하고 개척한 학자로서의 구실에서 찾아볼 수 있다.
즉, 그는 조선사회가 전기에서 후기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사회변화와 더불어 발생하게 될 실학파의 선구적 인물로, 사상사 내지 철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가지는 것이다.
이수광이 두드러지게 활동하던 반세기 초기는 이미 16세기후반에 있어 이황(李滉)과 이이(李珥)로 정점을 이루는 성리학의 이론이 성숙되었던 다음 시대로서 김장생(金長生)·정구(鄭逑) 등에 의하여 예학(禮學)이 융성하게 일어났던 시기이다.
이와같이, 도학(道學)의 정통성은 확립되었지만 임진왜란의 충격 속에 사회질서의 변화가 진행되었을 때는, 사상적으로도 정통적 도학의 성리학적 관심에서 벗어난 새로운 요구가 대두되었던 시기이다.
그것은 곧 한백겸(韓百謙)의 《기전유제설 箕田遺制說》에서 보여준 실증적 고증에 의하여 고대의 전제(田制)에 있어서 주자의 견해도 추측에서 나온 것에 지나지 않음을 밝혔던 사실이나, 남언경(南彦經)·이요(李瑤) 등 양명학의 이론에 호의를 가지는 태도의 출현을 들 수 있다.

 

4. 사상성격
이때의 이수광의 사상적 성격을 분석하여 보면, 주자학을 존중하는 입장에 있으면서도 그 당시 주자학의 기본문제인 태극·이기·사단·칠정 등 성리학의 이론에 뛰어들지 않고, 심성(心性)의 존양(存養)에 치중하는 수양론적 문제를 학문적 중추문제로 삼고 있는 데 그 특징이 있다.
비록 성리학의 이론적 분석이나 논변은 조선 후기를 통하여 지속적으로 발전하였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수광은 이러한 전통적 성리학파의 입장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새로운 방향을 탐색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그의 철학적 기본문제가 심성의 이기론적 개념분석이 아니라 수양론적 실천방법의 탐색이라는 것은, 그만큼 그의 철학이 관념철학을 벗어나 실천철학적 성격을 지니는 것임을 말하여준다.
그의 저술 《지봉유설》 가운데 유도부(儒道部)에서, 학문·심학(心學)·과욕(寡慾)·초학(初學)·격언의 5항목으로 분류하고 있는 사실도 주자학에서 존중되는 도체(道體)의 문제나 성리학적 과제를 젖혀두고, 심성의 수양론적 관심 속에서 유학을 분류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는 〈조진무실차자〉에서 정치의 효과를 이루지 못하고 사회가 어지러워지는 것은 모두 부실한 병 때문이라 지적하였고, 모든 일을 처리하는 관건은 성(誠)에 있으며 성이 곧 실(實)임을 밝히고, 실심으로 실정(實政)을 행하고 실공(實功)으로 실효를 거둘 것을 주장하면서, 생각마다 모두 실하고 일마다 실할 것을 요구하는 무실(懋實)을 강조하였다.
그의 무실론은 구체적 현실의 성이면서 동시에 도덕적 성실성의 요구이다. 성을 모든 것에 일관하는 원리로 삼고, 이 성의 현실적 실현을 추구하는 것은 실학정신의 근원적 사유방법임을 확인할 수 있다.
또, 그는 학(學)은 활쏘기와 같아서 과녁을 지향하는 것이라 밝히면서, 학문은 입지(立志)와 지향하는 바(所向)가 중요함을 강조하는 것도 진리의 기준에 대한 끊임없는 요구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그의 학문적 개방정신과 더불어 학문의 수양론적 기능에 대한 요구에서, 학문은 습(習)을 귀하게 여기며 습을 통하여 숙(熟)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학습론(學習論)을 엿볼 수 있다.
함양성찰(涵養省察)하는 수양의 과정이 곧 학습이요 살아 움직이는 마음의 배양, 즉 성숙인 것이다.
이수광의 이러한 사상적 성격을 통하여 그의 철학적 특성이 도학의 정통성을 발판으로 하면서도 성리학의 이론적 천착에로 나가는 방향이 아니라, 인격과의 구체적 실현을 추구하는 실학정신의 발휘에로 지향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이수광은 한 선구적 위치와 구실을 감당하고 있는 비중을 지니고 있다 하겠다.
이수광은 66세로 세상을 떠난 뒤에 영의정으로 추증되었으며, 수원의 청수서원(淸水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술로는 《지봉집》 31권, 부록 3권이 있으며 《찬록군서 纂錄群書》 25권이 있다고는 하나 확실하지 않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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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영관리자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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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감사합니다. 홈에 올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