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확 묘갈명-동주 이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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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7-05-15 10:12 조회1,612회 댓글1건본문
尙衣院正金沙金公墓碣銘
鷄圖旣訖。金世則延。方慶中奮。九容嗣聞。胤宗用武。節度二軍。有諱震紀。爰曁大涉。惟祖惟禰。宦未成業。公承其積。矱字正卿。魁顏偉度。不矜不盈。始齡十八。進士揚名。迨其釋褐。四紀以晩。國學倉曹。官卑身蹇。乃贊帥幕。乃佐騎省。儒師講藝。太官是正。亦長軍資。屛斥廚供。尙方之化。胥以慕從。敷政于原。小出大治。凡厥廨宇。庠序缺隳。更脩茨墍。莫不完好。農興于野。歌詠載道。伶紳游校。辯術有程。環封四疆。孔惠孔寧。民營其私。謂公謂何。吏有欺冒。父笞于家。騰聲上徹。有光賜帛。有遺其愛。有揭頌石。南淳東鐵。踵典二邑。循其故蹟。淑問愈洽。經三外庸。日計則少。百世之思。其杜其召。逮公傾逝。自遠將賻。有事于京。其人哭路。其歲癸酉。年六十二。塴于洞陰。先兆之次。配鄭以祔。考相彥信。一子鼎之。生員夙殞。是又單傳。奐實脩墓。貞珉載勒。曷不千古。我瞻渭陽。崇丘盤鬱。陳詳擧槩。有雙誌碣。維行有人。或哲或否。盍睹斯刻。薄夫顏厚
상의원정(尙衣院正) 금사(金沙) 김공(金公) 묘갈명(墓碣銘)
계도(鷄圖)가1) 이미 다했어도 김씨의 세계(世系)는 장구하게 이어졌으니 김방경(金方慶)은 중고에 분연(奮然)히 일어났고, 김구용(金九容)은 뒤를 이어 문달(聞達)하였다네. 윤종(胤宗)은 무장(武將)으로 2군(軍)을 지휘했고, 휘(諱) 진기(震紀)가 있었고 대섭(大涉)에게 이어졌으니 공의 할아버지와 아버지였다. 벼슬을 크게 이루지 못하니 공은 그 적습(積習)을 이었다.
확(穫)의 자는 정경(正卿)으로 큰 체격과 기량이 있어 자만하지도 영만(盈滿)하지도 않았다. 비로소 나이 18세에 이르러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했고, 석갈(釋褐; 처음 벼슬살이를 함)함에서는 4년여 동안 국학(國學; 성균관)과 창조(倉曹; 廣興倉奉事)를 지냈는데 관직은 높지 않았으나 몸으로는 건건(蹇蹇; 충성을 다하는 모양)하였다. 곧 수막(帥幕; 원수의 군막)을 도왔고 기성(騎省; 병조)를 보좌하기도 했으며, 유사(儒師)로 강예(講藝)하기도 태관(太官)으로 시정(是正)하기도 했다. 또한 군자감(軍資監)의 수장[軍資監正]이 되어서는 주공(廚供)을 병척(屛斥)하여 상방(尙方; 천자가 쓰는 器物을 맡은 벼슬 또는 기물을 만드는 관청으로 군자감을 지칭함)을 개선시키니 서리(胥吏)들이 모종(慕從; 우러러 받들고 본받음)하였다.
철원에서 부정(敷政; 施政)하면서는 적은 것에서도 큰 공적을 이루었다. 대략 그 해우(廨宇; 관아)․상서(庠序; 학교)가 결휴(缺隳; 무너지고 이지러짐)됨에 서리들은 풀이나 띠로 지붕을 잇거나 흙으로 벽을 보수하여 완전하게 갖추어지지 않은 것이 없었고, 야경(野坰; 성밖의 들)에서는 농사를 일으켜 영가(詠歌)가 길에 가득했다. 영신(伶紳; 벼슬이 높고 낮음을 의미함)에 관계없이 교유했고 말하는 방법에도 정도가 있었으며, 여러 곳의 지방직을 지내면서 많은 혜무(惠撫)를 베풀어 편안하게 했는데, 어찌 공이 민영(民營)을 사사롭게 했다고 하겠는가! 서리가 기모(欺冒; 속임)하여 아비가 가속(家屬)을 매질했다는 소문이 번져 왕에게 전달되니 그 처리함을 칭찬하여 비단을 하사하기도 했고, 그 애뜻함을 남기기 위해 송덕비(頌德碑)에 이를 기록했다. 남쪽 지방의 순창과 동쪽 지방의 철원, 두 고을의 지방관을 지내면서 그 고적(故蹟)을 순수(循守)하고 숙문(淑問; 선량하다는 소문)이 더욱 흡연(洽然)하였다. 3년여 동안 외직에 있으면서 눈앞의 이익은 적었지만 백세(百世)를 전할 사련(思戀)이 있었다.
벼슬이 막히고 다시 부름을 반복하다 공이 죽음에 이르자 멀리서까지 부의(賻儀)가 있었으며 한양에서 장사를 치루는데 사람들의 곡(哭)이 거리를 메웠다. 그해는 계유년(癸酉年; 1633)이니 나이 62세였다. 동음현(洞陰縣)에 장례하니 선영(先塋)이었다. 부인 정씨(鄭氏)를 부장(祔葬)했는데, 아버지는 상신(相臣) 언신(彦信)이었다.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정지(鼎之)로 생원(生員)으로 일찍 죽었는데, 이 또한 단전(單傳)이었다. 환(奐)이 실로 수묘(脩墓)하며 돌을 다듬어 명(銘)을 새기니 어찌 천고(千古)를 지탱하지 않겠는가!
내가 위양(渭陽; 외숙)을2) 존경하기를 숭구(崇丘; 높은 산)이 울반(鬱盤)한 것처럼 하여 그 진상(陳詳)의 거개(擧槪)가 한 쌍의 묘지(墓誌)와 비갈(碑碣)에 갖추었다. 지나는 행인이 혹 공(公)을 알거나 그렇지 못하더라도 대개 이 비갈을 본다면 알 것이라.
박부안후(薄夫顔厚; 薄夫는 경박한 사람을, 顔厚는 顔甲과 같은 뜻으로 뻔뻔스럽고 염치를 모르는 사람을 지칭하여 묘갈명 찬자인 李敏求가 스스로를 낮추어 부른 겸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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