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당쟁사(3)-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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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작성일07-05-18 08:39 조회1,445회 댓글0건본문
▧붕당정치(朋黨政治)
붕당대립의 직접적인 발단은 선조 8년(1575) 이조전랑직을 둘러싼 김효원과 심의겸의 반목에서 비롯되었다. 전랑직은 그 직위는 낮으나(정5품) 인사권을 쥐는 직책으로, 판서나 국왕이 임명하는 것이 아니고, 전임자가 후임자를 추천하면 공의에 부쳐서 선출하였으므로 관료들 간의 집단적인 대립의 초점이 되었던 것이다.
김효원을 중심으로 한 동인은 허엽이 영수로 있었고, 심의겸을 중심으로 한 서인은 박순이 영수가 되어 대립이 본격화되었다. 처음에는 동인이 우세하여 서인을 공격하였으나, 동인은 다시 서인에 대한 강온 양론으로 갈라져 강경파인 북인과 온건파인 남인으로 분파되어 임진왜란 이전에 이미 서인, 남인, 북인의 삼색이 형성되었다.
남인은 우성전, 유성룡이 중심이 되었고, 북인은 이발, 이산해 등이 중심이 되었으나, 임진왜란 후에 남인 유성룡은 화의를 주장하였다는 이유로 실각되자 북인 남이공이 정권을 잡게 되어 남인은 몰락하였다.
득세한 북인은 다시 선조의 후사문제로 대북과 소북으로 갈라져 대립하다가, 대북파가 옹립하는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자 정권을 장악하고, 소북파를 일소하기 위하여 영창대군을 모함, 살해하는 한편, 외척인 김제남과 그 일족을 처형하였다.
광해군과 대북파의 이러한 폭정은 오랫동안 대북파에게 눌려 지내던 서인에게 집권할 기회를 주었으니, 곧 능양군을 왕으로 옹립한 인조반정(仁祖反正)이 바로 그것이다. 인조가 왕위에 오르자 천하는 서인의 수중으로 들어갔으며, 이이첨, 정인홍 등 대북파 수십 명이 처형되고, 수백 명이 유배되었다.
서인이 집권하는 동시에 남인 이원익이 입상하게 됨으로써 남인이 제2의 세력으로 등장하여 숙종 때까지 100여 년 동안 서인과 남인의 공존을 바탕으로 한 대립이 계속되었다.
즉, 효종이 즉위하자 서인 김자점은 역모로 실각하였으나 같은 서인인 송시열파가 등장하여 서인의 집권은 현종 초까지 계속되다가 현종 즉위 후 효종의 모후 조대비의 복상 문제를 놓고 서인의 주장인 기년설(朞年說:1주년설)과 남인의 주장인 3년설(2주년설)이 대립하는 이른바 기해복제문제가 발생하였다. 처음에는 서인의 송시열과 남인의 윤휴 사이에 벌어진 예학논의에 불과하던 것이 점차 당론으로 전환되면서 양파는 여기에 정치적 운명을 걸었고, 결국 서인의 주장이 채택됨으로써 정권에는 변동이 없었다.
그러다가 현종 15년(1674) 효종의 비(妃) 인선왕후의 상(喪)을 당하자 다시 복상문제가 터져 남인은 기년설을 주장하고 서인은 대공설을 주장하여, 이번에는 남인의 주장이 채택되었다.
이 때, 남인은 송시열 등에 대한 극형을 주장하는 과격파와 이에 반대하는 온건파로 갈리어 이들을 청남, 탁남이라 불렀다. 새로 정권을 잡은 남인은 그 전횡이 심하여 집권한 지 몇 년 만에 쫓겨나서 많은 사람이 죽음을 당하였고, 송시열을 비롯
한 서인이 재등용되었다.
그러나 서인 사이에도 분열이 생겨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노론과 윤증을 중심으로 한 소론(少論)으로 갈리었다. 그러던 중 숙종 15년(1689) 서인이 물러나고, 송시열이 사사되는 이른바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다시 등용되었다.
그러나 숙종 20년(1694)에는 왕에 의하여 남인이 다시 쫓겨나고 서인이 재등용되는 갑술환국(甲戌換局)이 벌어져, 남인은 재기불능의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이후로는 노론, 소론이 대립의 중심을 이루게 되었다.
그 후 숙종의 후사문제로 인한 신임사화가 일어나 노론의 김창집, 이건명등은 대역죄로 몰려 죽게 되고, 노론은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이러한 당쟁을 몸소 체험한 후 왕위에 오른 영조는 당쟁의 완화와 각 파에 걸친 공평한 인재등용에 힘쓰는 이른바 탕평책, 을 내세워 재위 52년간에 정쟁이 크게 완화되었다.
그러나 이 탕평책의 반작용으로 대간의 기능은 크게 위축되고, 언로(言路)는 모든 시비와 공격이 당쟁완화라는 명분으로 억제되어, 앞 시기의 긴장과 혈기가 풀리는 반면 공리주의, 이기주의의 새로운 시대풍조를 조장하는 결과가 되었다.
이러한 탕평책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권세는 주로 노론의 수중에 있었다. 영조 말년부터 싹트기 시작한 새로운 대립은 영조 38년(1762) 임오사건, 즉 사도세자사건을 둘러싸고, 세자를 동정하는 홍봉한 중심의 시파와 세자의 실덕을 지적하고 영조의 처사를 옳다고 보는 김구주중심의 벽파의 대립이 생기게 되었다.
그 후 남인과 소론도 시, 벽으로 분파되었다. 이 시, 벽파의 대립은 사도세자의 문제를 분쟁의 표면구실로 삼아 대립하게 되었고, 또한 남인의 시, 벽파는 당시 전래하기 시작한 가톨릭을 믿는 신서교파와 반서교파로 분열되었다.
정조 때에는 지금까지 소외되었던 남인의 세력이 왕에 의하여 적극 옹호, 신장되어 이가환, 정약용과 같은 남인 시파의 명사가 등장하였다.
그러나 순조(純祖)가 즉위하면서 노론의 벽파가 대거진출하여 순조 1년(1801) 신유사옥(辛酉邪獄)을 일으켜 사학일소(邪學一掃)라는 명목 아래 많은 시파의 가톨릭교인이 변을 당함으로써 당쟁의 한 변형이 연출되었다. 특히 시, 벽의 대립으로 인한 가톨릭교의 박해는 서학도(西學徒) 내지는 실학자(實學者)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남인을 말살시켜 버린 결과를 가져왔다.
권력에서 밀려난 남인이 서학이나 실학에 전념하게 된 이유는 숙종 때의 갑술환국 이래 남인은 대개 폐족원국의 무리가 되어 과거를 위한 유학이란, 그들에게 무의미한 것이 되어버렸기 때문이었다.
▧ 당의통략
신활자본. 1책. 선조 때 김효원과 심의겸에 의한 동서분당에서 시작하여 영조의 탕평책에 이르기까지의 내용을 기록하였다. 저자의 조부 이시원이 소론(少論)에 속하였으나, 어느 당론에도 치우치지 않고 비교적 공정하게 서술되어 있어, 당쟁연구에 좋은 자료가 된다. 순한문으로 된 조선광문회판 외에 여러 종류의 국역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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