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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난설헌 생가 방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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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작성일02-05-25 02:08 조회1,82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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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는 개교기념일이었다. 5월의 좋은 계절에 절호의 기회가 왔다. 몇 사람을 태운 나의 승용차는 아침 일찍 중부고속도로를 경유하여 영동고속도로를 따라 멀리 강릉을 향하여 내달리고 있었다. 이른 아침, 싱그런 5월의 바람을 가르는 차량들의 질주로 시원한 고속도로는 더없이 상쾌하기만 했다. 새로 뚫린 대관령의 터널 덕에 서울을 떠난 나는 불과 2시간 40분만에 강릉 오죽헌을 지나 선교당(배다리집)에 도착했다.

  선교당 입구에서 성기를 은근히 드러내 놓고는 멋쩍어 헤헤거리고 있는 총각 장승과 이에 부끄러워 어쩔 줄 몰라 눈감고 있는 처녀 장승의 환대를 받고 들어서니 커다란 연못에는 연꽃이 자라고 있다. 1700년대에 지어진 멋들어진 전주이씨의 대갓집 위용에 당시 왕족의 권세를 가늠해 보았다. 안채에 있는 <悅話堂>(열화당)은 도연명의 귀거래사에 나오는 말을 인용하여 지었다 한다. 가족끼리 둘러앉아 다정하게 담소하는 즐거움이 있는 집이란다. 내 형제들도 이렇게 모여 즐거움을 가질 서울의 아담한 공간이 하나 있었으면...

  기념관에 들러 조선조 중기 이후의 궁중 복식과 여염집 복식을 잘 감상하고 나와 다시 차를 몰아 경포호수 옆을 따라 해변으로 달렸다. 정철이 읊은 관동별곡을 몇 구절 되새겨 본다. "羽蓋芝輪(우개지륜)"이라. 이에 대신 타는 승용차도 괜찮았다. "十里 氷紈(십리빙환)을 다리고 고텨 다려"라고 했는데 역시 경포의 물은 언제 보아도 고요하기 이를 데 없고, "長松(댱숑) 울흔 소개 슬카장 펴뎌시니, 믈결도 자도 잘샤 모래를 혜리로다."했는데 물은 역시 참으로 맑고 깨끗했다. 강문교를 건너가며 "紅粧古事(홍장고사)를 헌사타 하리로다" 했는데 홍장이란 기생에게 마음을 뺐겨 온 좌중의 웃음거리가 된 고려때의 관찰사 박신의 해학을 나도 한번 해 보고 싶은 객기도 생긴다.

  횟집에 들러 점심을 겸하여 거나하게 한 잔 걸치고 초당으로 향하니 수 년 전에 왔던 허균, 허난설헌의 생가 집 동네가 눈에 익었다. 들어가는 길목에는 부친 허엽, 오라비 허균의 한시들이 돌에 새겨져 여기 저기에 詩香 내음을 피우고 있다. 생가 옆 쪽문 앞에는 우물이 옛모습 그대로라 한다. 물긷는 난설헌의 옷소매에는 맵시있게 꾸민 끝동이 보이는 듯하다. 난설헌의 치맛자락이 무수히 스쳐갔을 느긋하고 둥글게 파인 문지방을 지나 안채로 들어가니 사람이 살고 있어 다소 지저분했던 전에 비해 생활하는 사람 하나 없이 잘 단장돼 있다. 지나는 사람에게 물으니 관리인이 상주하여 정식으로 관리하고 있단다. 곧 관리인을 찾아가 공손히 인사하고 안내를 부탁했다.

  널찍한 입구자(口)의 전형적인 대갓집 규모에 감탄했다. 담장을 연하여 가꾼 화단에는 작약과 목단 꽃들이 연분홍과 붉은 색의 소담한 꽃잎으로 아름답게 피어있다. 또 잘 가꾼 소나무와 향나무에는 선비의 자태가 고스란히 배어 있어 더없이 고아하기만 하다. 난설헌이 살았음직한 방안에 들어가 본다. 체온이 남아 있을까 하는 나의 응큼에 부끄러워 얼른 나왔다. 안채 앞 원형 화단에는 커다란 모란과 목단, 둥글레차 여러 그루, 소나무 한 그루 등이 조화를 이루고 곱게 가꾸어져 있다. 옛부터 있어 왔던 것이라 한다. 이것들이 그 님에게 무슨 시심을 심었을까? 

  한참을 넋놓고 바라보다가 쪽문으로 돌아나와 사랑채로 나왔다. 마당에는 은근한 자태의 소나무가 푸른 솔잎색을 뽐내고 있다. 사랑채의 너른 마루와 방에서는 독선생인 이달의 가르침을 받으며 오라비들 속에서 글 읽고 있는 난설헌의 청아한 소리가 들리는 듯, 고운 치마저고리 입은 여인의 모습이 보이는 듯하다. 님이 앉았음직한 벤취위에 앉아 보기도 했다. 내 머리속에는 온통 고운 님의 모습뿐이다. 그 잔영을 따르느라 이곳 저곳 사진찍기에 바쁘다.

  사랑채 앞의 대문을 나오니 넓은 마당 건너편에는 방풍림인 듯 하늘을 덮어버린 적송숲이 더없이 속세가 아닌 듯하다. 여기서 잡풀을 깎는 관리인은 작년에 처음으로 지정되어 왔단다. 지난 2년전 부터는 공공 근로원들이 겨우 청소만 했단다. 이광노교수가 허균 생가를 개인 소유로 하고 있던 것을 4년 전(1998년)에 강릉市에서 매입했다 한다. 강릉시에서는 허균, 허난설헌 축제를 4회째 계속해 오고 있단다. 관리인(이인근. 강릉시 초당동사무소 소속. 2002. 1. 부터 근무)과 연락처를 주고받아 놓고, 옆에 있는 관리 사옥터 자리에 앞으로 건물이 들어서면 우리 안.사.연 식구들과 하루밤 묵을 수 있는지 은근히 묻기도 했다.

  4시에 출발하여 서울로 향하는 귀가길…. 중부고속도로 터널 옆 허난설헌 묘소 근처를 지나자 난설헌의 아름다운 모습을 덮고 있는 묘소를 찾아보려는 내 눈이 바쁘기만 하다.

  아! 오늘 내가 이렇게 살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복된가?

  오늘밤 꿈속에선 님의 옆모습만이라도 한 번 뵐 수 있을까?




▣ 김윤만 - 뜻있고 의미있는 하루 보내셨네요. 남기신 글 잘보았습니다. 염치없이 편히 앉아서. . . .
▣ 김영환 - 행복한 하루이셨겠습니다. 부럽습니다.
▣ 김재익 -
▣ 김주회 - 부럽고 감사합니다. 동행하면서 여행하는 행복함을 맛보았습니다.
▣ 김정중 - 잘 읽었습니다 현장감 있게...
▣ 김은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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