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 육우당터(본 홈 자료)-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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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작성일07-06-04 10:43 조회1,348회 댓글0건본문
*<원문> 六友堂賦
瞻彼驪江之域。 有新堂兮翼翼。 繄卓犖之高人兮。 於爲會其嘉客。 其所友者伊六兮。 匪庸流之可親。 高人與之有素兮。 胸襟以之絶塵。 噫嘻美哉。 彼洋洋而流惡兮。 行有尙而不息。 彼峨峨之厚下兮。 高不危而安宅。 彼芬葩之灼灼兮。 於含章以時發。 彼望舒之娟娟兮。 粵無私之遐燭。 巽二申命兮穆若。 滕六便嬛兮掩慝。 自選兮南北。 悉夸耀其令德。 宛主賓之相接。 何笑聲之啞啞。 交談鋒其若雷。 式崇日而竟夕。 若乃原其居則家于大極。 稽其旌則遍于六幕。 自混沌之旣闢。 形象著兮維式。 羌世俗之懵若。 常與共而不誠。 于嗟儂之涽兮。 與夫育而奚▓。 猗上洛之元▓。 早研思於大易。 知良朋以固結。 蓋由中之有得。 爰有六一老人。 迅其行之無迹。 旣周覽乎八區。 過里閭而▓▓。 遂登堂而揖客。 進主人而告之曰。 賢哉。 子之友于六也。 信莫然而出俗。 然其得失豈▓說乎。 方其倚柱兮波明。 鉤簾兮岑碧。 春園其紅綠。 掛秋空兮皎潔。 方暑溽而淸▓。 ▓冬溫兮洒白。 於斯時也。 或對▓兮彊▓。 或憑欄兮▓笛。 神怡志▓。 此樂何極。 至若樂近乎瀰則濡裳。 數乘乎巇則折屐。 色愛之酷也伐性。 明翫之尤也傷覿。 好觸乎爽也生疾。 恒犯乎寒也患▓。 予嘗聞諸夫子。 朋友數斯疏矣。 其在咸而憧憧。 匪聖人之所美。 烝俗情之相好。 方寸險其莫測。 始其交也若漆。 忽焉怒兮反目。 乃乘除其因由兮。 緣物我之成敵。 雖六者之淸兮。 迨爲敵則一也。 有一德之大人兮。 超兩儀而獨立。 艮其皆不見其身兮。 矧來撓之可矚。 盍捐子之友六。 從大人以學焉。 主人乃廻望隰原。 苑爾笑而颺言。 吾子之云。 異乎我聞。 夫方之與物。 類聚群分。 莫不有則。 夫豈大人之學。 必也廓乎虛寂。 吁彼朋之若否。 其自我而損益。 與其退藏於無物。 寧出而與客樂兮。 乃歌曰月出照兮山之阿。 風徐來兮江自波。 花之解語者益佳。 雪水可以煎茶。 於是相與嗢噱。 竟莫知其孰主孰客。
(4)<육우당 터> 찾기 단서 (2003. 4. 29. 태영(군) 제공)
신 동국여지승람 여주목
고적 천녕폐현(川寧廢縣) :- 중략 - 마암(馬巖) : 주 동쪽 1리에 있다. 속담에 전하기를, "황마(黃馬)와 여마(驪馬)가 물에서 나왔기 때문에 군을 이름하여 황려라 하였다." 한다. 바위가 마암으로 이름을 얻음도 이때문이라 한다. 이규보(李奎報)의 시에, "웅건하고 기특한 쌍마(雙馬)가 물가에서 나오매, 현 이름을 이로부터 황려라 하였네. 시인은 옛것을 좋아하여 번거로이 증거를 캐물으나, 오 가는 고기잡이 늙은이야 어찌 알리." 하였다. 사우당(四友堂) : 마암(馬巖)에 있다. 임원준(任元濬)이 당(堂)을 짓고, 이름을 사우(四友)라 하였다. - 중략 –
근자에 김선생 경지(敬之)가 여강(驪江)에 계셔 그 당(堂)을 이름하여 사우(四友)라 하였으니, 이것은 설(雪)ㆍ월(月)ㆍ풍(風)ㆍ화(花)를 위한 것이었는데, 뒤에 강(江)ㆍ산(山)을 더하여 육우(六友)로 하였다. – 중략 –
침류정(沈流亭) : 천녕(川寧) 금사리(金沙里)에 있다.
이색(李穡)의 기(記)에, "염동정(廉東亭 이름은 흥방(興邦))이 귀양살이 할 때, 안으로 천녕현(川寧縣)에 옮기어 물에 걸쳐 정자를 짓고, 그 위에서 노닐며 쉬었다. - 중략 –
김구용(金九容)의 시에, "멀리 남국에 놀음이 이미 3년인데, 깃발을 예천(醴泉)에서 금사로 옮겼네. 이암(伊菴)의 유적이 있으니, 침류정 위에서 책을 베고 조노라." 하였다.
육우당(六友堂) : 천녕현에 있다. 척약재(惕若齋) 김구용(金九容)이 여강에 귀양와 당(堂)을 짓고 육우(六友)라 이름하였다.
정추의 부에 “저 여강 지역을 바라보니, 새로운 당(堂)이 있어 장려하구나. 아, 탁월한 높은 사람이여, 여기에 아름다운 손을 모았구나. 그 벗함은 오직 여섯인데 보통 사람이 친할 만한 것이 아니네 - 중략 – 달이 비침이여, 산 언덕이로다, 바람이 슬슬 불어 옴이여, 강이 스스로 물결치누나. 꽃은 말을 아는 것이 더욱 아름답고, 눈 물[雪水]은 차를 끓일 수 있네. 이에 서로 크게 웃으니, 누가 주인이고 누가 손인지 알 수 없네.‘ 하였다.” 했다.
금사면은 여주군의 서북쪽에(지금의 이포대교주변) 위치하고 있으며 북으로는 양평군 강상면, 광주군 실촌면에 접하고 있고 동남단은 흥천면 내사리, 문장리, 계신리와 이천시 신둔면, 백사면과 접경을 이루고 있다. 지리적으로 금사면은 남한강을 통한 수운이 편리하고 서울과 육상교통로 접근이 용이하여 조선시대 관료들의 피난지 및 낙향지역으로 이용되어 아직도 그 자취가 많이 남아있어 고장의 전통과 품위를 보여준다.
(5)육우당 터 인근의 마애불 내용 (2007. 3. 22. 영환(문) 제공)
출전 : 경향신문
[한강을 걷다](32) 계신리 마애여래입상·이포 | ||||||
입력: 2007년 03월 16일 15:08:24 | ||||||
-새기다만 얼굴하나, 헛 살았구나-
비 그친 뒤의 봄은 겨울과도 같았다. 바람은 한없이 모질었으며 감탕처럼 녹았던 땅은 다시 꽁꽁 얼어붙고 말았다. 황려, 곧 여주가 고향인 이규보는 ‘꽃샘바람(妬花風)’이라는 시에서 노래한다. 꽃필 땐 모진 바람도 많다고 말이다. 마치 비단을 가위질하듯이 섬세하게 아름다운 꽃을 피워 놓고 또 미친 것 같은 거센 바람을 몰고 와서는 꽃을 떨어뜨리는 아이러니 앞에서 그는 다시 노래한다. 바람의 직책은 만물을 고무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이미 핀 꽃만이 아름다워 바람조차 불지 않는다면 그 나머지는 어떻게 할 것이며, 꽃 피는 것도 아름답지만 꽃 지는 것 또한 자연의 이치이니 슬퍼할 일 아니라고 노래하니 그 말 틀리지 않은 것 같다. 흥천면을 지나 금사면으로 향하는 물줄기는 여강 중에서도 하류인 기류(沂流)이며 예전에는 천령(川寧)이라고도 했다. 여말 선초의 많은 시인묵객들이 앞다투어 살기를 청했으니 당연히 그들이 노래한 아름다운 풍광이 강물에 넘실거린다. 또 이곳을 통틀어 백애촌(白厓村)이라고도 했다. 다산(茶山)은 ‘택리지에 발함(跋擇里志)’이라는 글에서 남한강 물길을 따라 사람이 살기 좋은 곳으로 두 곳을 꼽았는데 그 한 곳은 충주의 목계이며 다른 곳이 백애이다. 이중환(1690~1752)은 ‘택리지’에서 백애촌을 일러 말하기를 “강가에서 가장 이름난 마을이며, 주민들은 오로지 배로 장사를 하는데 그 이익이 농사를 짓는 것보다 낫다”고 했다.
더구나 목은이 그 기문을 지을 당시는 이미 부모님을 모두 여의었을 때였으나 천령이 외가였던 척약재는 귀양을 살면서도 어머니를 모시고 있었다. 목은은 그것이 몹시도 부러웠던 모양이다. “경지(敬之, 김구용의 자)는 어버이를 모시는 여가에 강물에 배 띄우고, 산에는 나막신으로 올라, 맑은 바람 앞에 서서 떨어진 꽃잎을 헤아리도다. 눈을 밟아서 중(僧)을 찾고, 달을 대하여 손(客)을 청하니 사시로 즐거움이 역시 지극하도다”라고 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 육우당은 어디에 있는지 흔적은 물론 그 자리조차 가늠하지 못한다. 그것은 ‘동몽선습(童蒙先習)’을 지은 조선 중기의 문사 모재(慕齋) 김안국(1478~1543)의 범사정(泛사亭)과 동고정(東皐亭) 또한 마찬가지이다. 모재는 유난히 이 일대를 사랑하여 ‘이호(梨湖)16경’을 읊었는데 상서로운 아지랑이와 우거진 숲, 떠도는 남기(嵐氣)와 쌓인 취미(翠微), 연꽃을 구경하고 매화를 찾고, 물놀이와 들놀이, 눈 위에 가는 나귀와 비올 제 도롱이, 밭갈이 노래와 목동의 피리소리, 안개 낀 나무와 달 아래 배, 바람 안은 돛과 고기잡이배의 불이 그것이다. 그런가하면 집 안에는 팔이당(八怡堂)도 지었다. 회암당(晦庵塘)은 주자(朱子)의 못을 일컫고, 염계련(濂溪蓮)은 주돈이의 연꽃, 강절풍(康節風)은 소강절의 바람, 장주어(莊周魚)는 장자의 물고기, 장한순(張翰蓴)은 장한의 순나물, 영운초(靈運草)는 사영운의 풀, 연명류(淵明柳)는 도연명의 버드나무를 말하며 마지막으로 태백월(太白月)은 이태백의 달을 뜻하는 것이니 풍류가 넘치고도 남았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 남은 것은 없다. 다만 그들의 문집에 지워지지 않는 시구만 남아 전할 뿐이니 씁쓸함이 강물에 배어있다. 빼어난 경치는 사라지고 정자마저 자취가 없으니 강을 따라 걷는 나그네가 발길 멈출 곳은 그 어디인가. 이제 더 이상 배가 다니지 않는 빈 나루터에는 표지석만 쓸쓸하게 서 있을 뿐 서먹하기만 했다. 겨우 한 곳, 다리 쉬며 마음 내려놓을 수 있는 곳은 계신리 부처울 마을의 석불사이다. 절이라기보다 쇠락한 암자라고 해야 마땅할 절 마당에서 강으로 나가면 그곳에 마애불이 있다. 무학대사(無學大師·1327~1405)가 한양과 신륵사를 오가는 배 안에서 긴 삿대로 단숨에 새겼다고 전해지는 마애불이다. 오후 햇살을 받은 마애불은 은은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충주의 창동 마애불과 함께 남한강 물길을 오가는 사람들을 지켜주던 수호신이건만 우락부락하지 않고 단아하다. 이 마애불 또한 창동 마애불과 마찬가지로 바로 강과 잇대어 있는 바위에 부처님을 새겼으니 이처럼 강물이 철썩이는 곳에 새겨진 부처님은 나라 안에서 창동과 이곳 두 곳밖에 없는 것이다. 앞서 말한 대로 마을 사람들 사이에는 여말 선초의 선승인 무학대사가 새겼다는 설화가 전해져 오지만 마애불의 양식은 나말 여초의 양식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통일신라의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가 하면 세 겹으로 된 광배를 둘러싸고 있는 화염문(火炎紋)은 고려 초기의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무심코 찾아든 오후에 나는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새벽녘에 수십 번을 찾았던 곳이건만 단 한 차례도 만나지 못했던 얼굴 하나가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눈과 코만 있는 얼굴을 하고 말이다. 그러나 더욱 기가 막혔던 것은 그 얼굴이 마애불의 상호와 불과 1m 남짓 떨어진 곳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보지 못했다는 것은 사물을 대할 때 늘 대롱을 통해 봤다는 것과도 같다. 그날, 자책이 심했다. 더불어 나그네란 관견(管見)도 필요하지만 조감(鳥瞰) 또한 동시에 갖춰야 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우친 날이기도 했다. 길을 가다가 만나는 것들, 그 무엇을 보든 늘 다른 사람들보다 세세히 살피는 눈을 자랑으로 여기며 자만에 젖어 있었던 내가 보기 좋게 한방 먹은 꼴이었다. 그날, 해가 저물 때까지 바라본 것은 바위에 못다 새긴 그 얼굴이 아니었다. 오히려 허튼 눈을 달고도 밝은 눈을 달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며 살아 온 내 모습이었다. 그날 이후, 남한강의 이호가 한 눈에 바라보이며 마애불이 있는 이 바위벼랑은 마음 흐트러질 때마다 찾는 비장처가 되었으니 적어도 나에게는 드물게 아름다운 곳이기도 하다. 오늘 또한 다르지 않다. 해가 기울어 갈수록 철새들이 무리지어 날고 마애불은 더욱 빛나건만 나는 마치 숲속에 은닉해 둔 둥지에 깃든 새 마냥 웅크리고 있을 뿐이다. 강이란 숨을 곳이 없는 곳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물속으로 들어가지 않는 한 강을 걷는다는 것은 나를 드러내기만 할 뿐 감출 곳이 마땅치 않은 것이다. 그러나 이 마애불이 있는 부처바위는 강을 걷다 지친 나그네가 스스로를 숨길 수 있는 안가(安家)와도 같은 곳이다. 그러니 해가 아직 멀쩡하여 파사성에 오를 수도 있겠건만 강변으로 내려가 새 발자국을 좇으며 게으름을 떨 뿐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어쩌면 그것은 이제 여강이 끝나는 것에 대한 아쉬움의 표현이었을는지도 모른다. 이제 내일이면 파사성에 올라서 지나온 여강을 되돌아보고 앞으로 가야 할 양강(楊江)의 구비를 가늠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지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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