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우당터(본 홈 자료)-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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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작성일07-06-04 10:38 조회1,648회 댓글0건본문
*이번 안사연 여주지역 탐방과 관련하여 본 홈에 실려 있는 관련 내용을 다시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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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六友堂터’ 推定地를 찾아서 (2005. 8. 8. 윤만(문) 제공)
1992년(임신) 발행한 안동김씨문온공파세보권1(pp21--211)에 “육우당은 현 경기도 여주군 금사면 이포리 금사지서 앞산 위에 위치하며 김구용이 귀양살이 할 때에 그 곳 여강가에 집을 짓고 육우당이라 이름하였음”이라 기록되어 있다.
2005. 8. 7. 나는 신륵사 보제존자석종 및 석종비를 답사한 후 이어서 육우당터 추정지를 찾아볼 양으로 양평방향으로 차를 몰아 이포대교를 건넜다. 다리를 건너자마자 좌회전하여 久(구) 길로 접어들어 1-2분정도 가니 우측에 금사지구대(옛 금사지서)가 보이고 그 앞에 주차를 하였다.
정말 금사지구대 앞산은 낮은 산이었으며 들머리엔 ‘江崖山(강애산)공원’이란 비석과 공원 조감도가 설치되어 있다. 땀을 비오듯 흘리며 2-3분 단숨에 산정에 올라서니 넓은 공원이 펼쳐지고 게이트볼 장에는 노인 몇 분이서 더위도 잊은 채 공을 치고 계신다. 공원 안에는 지은지 얼마되지 않아 보이는 삼신당과 그 뒤편에 정자가 세워져 있는데 그곳에서 내려다보는 驪江(려강)의 풍경은 가히 절경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런 곳이라면 나라도 집 한 채 지어 ‘○○당’이라 붙여놓고 음풍명월하며 지내고 싶은 생각이 저절로 든다. 혹시나 더 좋은 장소는 없을까하여 강가로 내려가기도 하고 산등성이를 이곳저곳을 둘러보았으나 이만한 곳이 눈에 뛰지를 아니한다.
금사지구대에 들러 당직 경찰관에게 혹시 현 금사지구대가 예전부터 이곳에 있었는지 아니면 다른 곳에서 이전하여 왔는지를 문의하니 삼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경찰관은 이곳이 고향인데 어려서부터 금사지구대가 이 자리에 있었다고 답변하는 것으로 보아 임신세보 편찬 당시 금사지서 앞산이라 함은 이곳 강애산공원을 말하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오늘 이곳 강애산공원으로 육우당터 추정지를 찾은 나의 기분은 뿌듯하거나 기쁘지가 아니하고 무언가 답답하고 죄스러운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이제부터라도 더욱더 정진하여 정확한 육우당터를 찾아 척약재 할아버지의 숨결을 느껴보고 싶다. 아쉬움 속에 이러한 다짐을 하면서 귀경 길을 재촉한다. 장대같은 빗줄기가 차창을 때리고 있다.

육우당터찾기 자료<금사면 이포리>
여주군 금사면지에 혹시 육우당터찾기와 관련된 정보가 있지 않을까하여 정보공유 차원에서 척약재·육우당·금사면 이포리 부분을 중심으로 워드화 하였습니다. 참고와 함께 좋은 소식 기대합니다.
● (사진②) 기천서원 : 소재지 - 금사면 이포리 26-1, 지정번호 - 민속자료 제175호
● (사진④) 모재선생 사당 : 소재지 - 이포리 수굿말(봉서정 위쪽)
● (사진②) 봉서정 : 소재지 - 이포리 수굿말
● (사진③) 삼선당 : 소재지 - 금사면 이포리 192
● (사진①) 침벽루 : 소재지 - 금사면 이포리 192
● (사진①) 금사면사무소 : 소재지 - 금사면 이포리 197-3
● (사진④) 금사파출소 : 소재지 - 금사면 이포리 189
● 연혁 및 통사
지금의 여주는 1469년<☞세종대왕 영릉을 능서면 왕대리로 모시면서 여주목으로 고침>에 금사였던 천령현과 여흥을 합병시킨 것인데 합병하기 전 천령의 지명은 술천(述川 일명 성지매)이었고 여주의 지명은 골내근(骨乃斤)으로 기록되어 있다.(중략)
삼국의 경계에 위치하였던 천령의 옛 땅 술천은 백제·고구려·신라의 순으로 차지하였다. 신라 경덕왕(742-764)이 행정구역을 정비하면서 술천은 기천(沂川)이라고 지명을 고치고 골내근(骨乃斤)은 황요라고 지명을 고쳐서 황요현을 기천의 영현(領縣)으로 삼아 기천현의 지시를 받도록 하였다.(중략)
그리고 육로보다는 수로의 이용이 훨씬 편리하였던 시대에 서울에서 가까운 기천이 황요보다는 여러 면에서 핲설 수 있는 조건을 지녔다. 때문에 시장(천령장)이 번창하였고 관내에 양자산·산두산·추읍산·파사산에 사찰이 많았다. 또 사람의 왕래가 많고 산수가 좋다보니 정부 요인들의 루당(樓堂)이 많아 정치적으로도 주요한 의미를 지녔으며술천성과 파사성은 군사적 요충지였다.
그와 옛부터 등신면에 등신장(登神莊)이 있었고 같은 지역에 어량현이 관내에 있었고 고려 말기에 들어서면서 강변에는 척약재(惕若齋) 김구용(金九容)·동정(東亭) 염흥방(廉興邦)·둔촌(遁村) 이집(李集)을 비롯한 많은 명신들이 은거하게 되었다.····
● 사회 경제적 환경
(상략)
(금사)는 넓은 강이 남북으로 흐르고 있어 관망이 좋을 뿐 아니라 인심이 후덕하여 비록 부자는 없었다 하더라도 사회적 상류층은 사류(士類)의 은거(隱居)가 많았던 곳이다. 특히 강변이 그러했고 심산에는 사찰이 많이 집중되어 있었다. 고려 말기의 정객들이 이곳에 루당(樓堂)을 많이 지었으니 동정(東亭) 염흥방(廉興邦)·목은(牧隱) 이색(李穡)·석탄(石灘) 이존오(李存吾)·둔촌(遁村) 이집(李集)·척약재(惕若齋) 김구용(金九容)· 송암(松菴) 이충원(李忠元)·졸옹(拙翁) 홍성민(洪聖民)·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기천(沂川) 홍명하(洪命夏)·나재(懶齋) 홍명구(洪命耈)·택당(澤堂) 이식(李植)·북곡(北谷) 홍치중(洪致中)외 조선 말기 우당(藕堂) 민응식(閔應植)에 이르기 까지 이 곳에 은거하였다.
● 문화유적
10. 범사정(泛槎亭)
금사 이포리에 있던 정자로 모재 김안국이 벼슬에서 물러난 뒤 내려와 거처하던 곳인데 폐허가 되었다.
11. 봉서정(鳳棲亭)
광주이씨 시조인 둔촌(遁村) 선생이 고려의 기울어져 가는 국운을 바라보며 비분강개한 회한을 안고 그 때까지 봉직하였던 정삼품의 벼슬 판전교시사의 벼슬을 버리고 천령현으로 내려와 천령사와 봉서정을 짓고 주경야독과 논시강학하며 국가의 장래를 우려하며 포은·목은·야은을 비롯한 척약재 김구용·우현보 등과도 교류했으며 특히 포은 정몽주 선생은 봉서정의 둔촌 선생을 탐방하여 국정에 대한 자문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언제인가부터 소멸되어 폐허가 되었는데 정자를 광주이씨 후손인 송암 이형재 선생 등이 발의하여 막대한 경비를 들여 현재의 이포 수부촌(☞수굿말)에 1996년 6월16일에 복원하였다.
13. 삼선당(三僊堂)
일명 삼선당(三仙堂)으로도 불리우는데 금사면 이포리 192번지(면사무소로부터 약 200m-300m 지점에 150m 높이의 야산 침벽루 옆)에 위치하고 있으며 지금으로부터 약 500년 전 고려 말에 건립되었다. 동민의 안녕과 무환을 비는 수호신인 천령최씨 시조 부부를 제사하는 집이며 이곳에 봉안된 수호신의 묘는 이포리 188번지(삼선당으로부터 오른쪽 끝 언덕)에 있는데 「통정대부최공수(독)상지묘(通政大夫崔公秀(禿)象之墓)」라고 쓰여 있으며 숭정 9년 병자(1636년)에 수립하였다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구려 우왕 2년 병진년 4월에 양주 회암사의 고승 나옹이 밀양의 영원사로 옮길 때 여주에 이르러(중략)
차량이 통행하자 지금으로부터 60-70년 전에 그 후손들이 모두 이포를 떠났고 묘는 폐허가 되다시피 하였다. 현재 그 후손인 최수만씨 한 집만 살고 있으며 그 당시 나옹 선사가 집고 다니던 지팡이를 꽂은 것이 싹이 나고 자라서 큰 은행나무가 되어 현재까지 잎이 무성하여 많은 은행이 달리고 있다.
16. 육우당(六友堂)
옛 문헌에 천령현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을 뿐 현재 그 원래의 위치를 찾기가 어렵다. 이 당(堂)은 고려 공민왕 때의 학자 척약재(惕若齋) 김구용(金九容 : 1338-1384)이 고려(高麗)와 명(明)의 국교가 난관에 부딪히자 행례사(行禮使 : 사신)로 명나라에 들어가다가 요동에서 체포, 남경으로 압송되어 명제(明帝)의 명령으로 대리(大理)로 귀양간 뒤에 천령(川寧 : 여주)에 와서 육우당(六友堂)을 짓고 은거하다가 이 곳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색이 기문(記文)을 짓고 정추(鄭樞 : 호는 원옹 : 圓翁, 우왕의 사부 : 師傅)가 부(賦)를 지었다.<제영과 지기 참조>
☞ 척약재(惕若齋) 할아버지께서는 중국 윈난성 따리(대리)로 귀양을 가시다가 1384년(우왕 10) 사천성 노주 영녕현 강문점(氵+盧州 永寧縣 江門坫)에서 병환이 나시어 47세를 일기로 돌아가셨고, 육우당은 1375년(우왕 1) 언사로 죽주(竹州)로 유배(流配)되었다가 어머니의 고향인 여흥군(驪興郡)으로 이배되었을 때 지으셨다.《출처 : 가보》
22. 침류정(沈流亭)
고려 말기의 명재상 염제신(廉悌신)이 있었다. 공민왕의 극진한 총애를 받았고 우왕의 절대 신임을 받았기 때문에 나라에 크나큰 공훈을 남겼고 또 그의 딸이 신비(愼妃)가 되어 벼슬은 영문하부사(領門下府事 : 수상)에 오르고 곡성부원군(曲城府院君)에 봉해졌는데 그 아들 염흥방(廉興邦 : 호는 동정 : 東亭)이 고려 조정의 요직으로 있으면서 당시의 상대적인 권신(權臣) 이인임(李仁任)의 폭정과 횡포에 대립하다가 한때 파직되어 예천으로 유배되었다가 석방되어 서울 가까운 천령(川寧 : 여주)에 와 있으면서 천령 금사리(川寧金沙里 : 현재의 금사면 금사리) 강변에 당(堂)을 짓고 당호(堂號)를 침류정(沈流亭)이라고 편액하고 목은(牧隱) 이색(李穡)에게 기문(記文)을 받았다. 금사에서 은거하다가 석방된 후에 벼슬에 재 등용된 후 권세로써 조반(趙半)의 토지를 몰수하는 등 불의를 저지르다가 이른바 조반의 투옥사건이 일어나 종내는 처형을 받았고 가산이 몰수되었으며 처자(妻子)는 종(奴)이 되는 비참한 최후를 마쳤으니 침류정(沈流亭)의 주인은 끝나고 정각(亭閣)은 오랜 세월 뒤에 폐허가 되었다.<제영과 지기 참조>
23. 침벽루(枕碧樓)
이포리 산 192번지 남한강 연안에 옛날 나옹선사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꽂은 것이 싹이 나서 자랐다는 은행나무가 서 있는 곳에서 약 200m 정도 올라가면 침벽루라 불리우는 큰 누각이 있다. 많은 향유(鄕儒)들과 인근 각처에서 모여드는 시인묵객들이 여강과 그 위를 나르는 백로들의 모습을 보고 이태백과 두자미에 버금가는 명시를 많이 남겼다. 일설에 의하면 임진왜란 당시 왜병들이 여주에서 목선을 타고 와서 이포(川寧 : 천령)를 공격하러 온다는 정보를 탐지한 우리 의병들이 침벽루 근처에 은신하여 진을 치고 왜군을 섬멸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하여 내려오고 있다. 현재의 침벽루는 원래의 모습은 아니고 1994년에 군비 5,000만원을 들여 복원한 것인데 목조 건물이 아닌 시멘트로 복원한 것이 아쉽기만 하다.
● 인물
1. 김구용(金九容) : 1338년(충숙왕 복위 7)-1384년(우왕 10)
고려시대의 학자로 초명은 제민(齊閔), 자는 경지(敬之), 호는 척약재(惕若齋)이다. 본관은 안동(安東)으로 상락군(上洛君) 묘(昴)의 아들이다. 공민왕 때 16세로 진사(進士)가 되었고, 그 후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덕녕부주부(德寧府注簿)를 거쳐 민부의랑겸성균직강(民部議郞兼成均直講)이 되었다. 1367년(공민왕 16) 성균관이 중영(重營)되자 정몽주(鄭夢周)·박상충(朴尙衷)·이숭인(李崇仁) 등과 함께 정주학(程朱學)을 일으키고 척불양유(斥佛楊儒)의 선봉이 되었다. 친명파(親明派)로서 1375년(우왕 1)에 삼사좌윤으로 있을 때 이숭인(李崇仁)·정더전(鄭道傳)·권근(權近) 등과 북원(北元)에서 온 사신의 영접을 반대하다가 죽주(竹州)에 유배되었다가 1381년(우왕 7)에 다시 풀려나와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가 되었고 이듬해 대사성(大司成) 이어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가 되었다. 고려와 명의 국교가 난항에 부딪치자 1384년 행례사(行禮使)로 명나라에 가던 중 요동(遼東)에서 붙잡혀 남경(南京)으로 압송된 뒤 대리(大理)로 유배되어 가다가 여주 천녕현(驪州 川寧縣)에서 병사하였다.
☞ 척약재(惕若齋) 할아버지께서는 여주 천녕현(驪州 川寧縣)에서 병사하신 것이 아니고 노주 영녕현(氵+盧州 永寧縣)에서 돌아가셨다.
2. 김안국(金安國) : 1478년(성종 9)-1543년(중종 38)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국경(國卿), 호는 모재(慕齋)이다. 본관은 의성(義城)으로 참판(參判) 정국(正國)의 형으로 김굉필(金宏弼)의 문인이다.1501년(연산군 7)에 생원시(生員試)·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고, 1503년(영산군 9)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에 등용되었고 이어 박사(博士)·부수찬(副修撰)·부교리(副校理) 등을 역임하였다. 1507년(중종 2) 문과중시(文科重試)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지평(持平)·장령(掌令)·예조참의(禮曹參議)·대사간(大司諫)·공조판서(工曹判書) 등을 지내고 1517년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가 되어 각 향교에 소학(小學)을 권하고 농서(農書)·잠서(蠶書)의 언해(諺解)와 벽온방(辟瘟方)·창진방(瘡疹方) 등을 간인(刊印)하여 보급하였다. 1519년 을사사화(乙巳士禍) 때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로 나가 있어 화는 면하고 파직되었으며, 1537년에 다시 기용되어 예조판서(禮曹判書)·대사헌(大司憲)·병조판서(兵曹判書)·좌참찬(左參贊)·대제학(大提學)·찬성(贊成)·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세자이사(世子貳師) 등을 역임하였다. 1541년 병조판서(兵曹判書)로서 천문(天文)·역법(曆法)·병법(兵法)에 관한 서적의 구입을 상소하고 수태(水苔 : 물이끼)와 저(楮 : 닥나무)를 화합하여 태지(胎紙 : 종이)를 만들어서 왕에게 바치고 이 생산을 권장하였다. 조광조(趙光祖)와 함께 지치주의(至治主義)를 주장했으나 급격한 개혁에는 반대하였다. 성리학 뿐만 아니라 천문(天文)·주역(周易)·농사(農事)·국문학(國文學)에도 조예가 깊었다. 관직에서 물러나서 여주로 내려와 여생을 마쳤으며 인조의 묘정(廟廷)에 배향되었고 여주의 기천서원(沂川書院), 이천의 설봉서원(雪峯書院), 의성의 빙계서원(氷溪書院) 등에 제향되고 있다. 시호(諡號)는 문경(文敬)이며 저서로는 『모재집(慕齋集)』『동몽선습(童蒙先習)』등이 있다.
☞ 안동김씨 문온공파 직제학공계 음성공 후손 가보에 김시정(1680-1752)이 쓰신 육우당구기기(六友堂舊基記)가 있다. 그 내용은 ‘(상략)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지금 종형(從兄) 시경(始慶 1659-1735)씨가 황려(黃驪)에 가서 살면서 우연히 마을 사람과 시사(時事)를 말하게 되었고, 이호(梨湖)에서 한 유지(遺址)를 얻게 되었는데 곧 선조(先祖)께서 선정하여 집을 지었던 곳이다. 지금은 달관(達官) 김모(金某)의 점유가 되었으니 추심(推尋)하여 얻을 수가 없다. 비록 그러하나 지금 선조께서 노닐던 곳을 분명히 알았으니 그 땅은 마음에서 떠나기 않고 가슴에 차 있을 것이다.
더구나 종형(從兄)이 거주하는 곳과 선조의 고기(古基)가 불과 하루아침에 다다를 가까운 곳이니, 그 우러르고 탄식하고 또 기뻐하고 느끼는 것이 다른 고을에 견줄 바가 아니다. 아! 지난날 나의 소유(所有)였던 것이 지금은 타인의 소유가 되었으니 오늘 타인의 소유가 후세에 우리 집 물건이 되지 않을지 어찌 알겠는가. 무릇 우리 동종(同宗)은 나의 말을 잊지 말고 후일을 기다리는 것이 좋겠다.‘
여기서 ‘달관 김모’란 모재 김안국을 비롯한 그 후손이 아닐까하며 이들과 연관지어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 전설과 민담, 민속
1. 천령최씨 시조묘와 삼선당(三僊堂)
금사면사무소의 맞은편 약 300m쯤 거리에 150m 정도 높이의 야산이 있다. 또한 산의 동쪽 벼랑 밑으로는 남한강물이 굽이쳐 흐르고 있으며 서북쪽으로는 인가(人家)가 밀집해 있다. 그리고 이 산의 북쪽 산록(山麓)에는 봉분 둘레가 15m 가량되는 잘 손질된 묘소가 있는데 이 묘가 바로 천령최씨의 시조로서 통정대부최공독상지묘(通政大夫崔公禿象之墓)이다.<비문에는 숭정 9년 병자(1636)년에 세웠다고 새겨져 있음>
이 묘에서 남쪽으로 30m쯤 가면 약 3평 가량되는 목조와가(木造瓦家)의 사당(祠堂)이 있는데 이 동네에서는 이름하여 삼선당이라고 부르고 있다.
전설에 의하면 이 사당과 묘와는 서로 밀접한 연관 관계가 있으며 여말선초(麗末鮮初)의 고승 나옹선사와도 관계가 있다고 한다.
600여년 전 옛날 이 마을에는 최씨의 부자(父子)가 살고 있었는데 서울을 오가며 낡은 거룻배 한척을 가지고 남의 짐을 운반하여 주며 그 품삯으로 어렵게 살아가고 있었다.(중략)
당시 이포에는 현재의 면소재지 뒤편 속칭 수굿말이라는 곳에만 몇 호의 인가가 있었을 뿐 이 묘지 쪽으로는 인가가 없었다고 한다. 이포는 주변이 험한 산으로 둘러쌓여 있어 육로는 험하였지만 바로 앞을 남한강이 흐르고 있어 옛부터 강을 이용한 수상교통이 발달하였었다. 도사(道士)가 묘자리를 잡아준 이후 인가가 늘어 마을이 형성되고 번창하게 되었다고 한다.
2. 삼선당(三僊堂)의 전설
“여강(驪江)은 넓고 아득하여 용문산을 둘렀는데 언덕 맞은편에 고기잡이 먼 마을 있음을 알겠네.”라고 옛 시인 염흥방(廉興邦)은 읊조렸다.
바로 여주군 금사면(金沙面)은 본래 고구려 술천군(述川郡)인데 옛 지명이 일명 성지매(省知買)이다. 신라 때 기천(沂川)으로 고쳤다가 고려 때 지금의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다. 한다.
질펀한 들녘과 낮은 산의 협곡진 계곡을 가로지르며 천년 회억을 번가르듯 유유히 흐르는 강물과 들녘이 삼천당이 있는 언덕에서 멀리까지 내려다보이는 경관은 참으로 아름다운 풍광을 물들인 절경이다.
운치있는 산세와 덥수그러진 나무를 물그림자 지며 지저귀는 산새소리, 날아가는 물새소리 운율과 경관이 조화롭게 어울려 고려의 시인 척약재(惕若齋) 김구용(金九容)은 외가 동네에 유배되어 와 육우당(六友堂)을 짓고 이르기를 “조각배 짧은 노로 가시사립 두들기니(片舟短棹款紫門)/ 비오는 밤에 도리어 물위 마음이 아득하구나(雨夜環迷水上村)/ 묻노니 금사가 어느곳이뇨(爲問金沙何處是)/ 수풀 사이로 등불만 깜박거리네(一燈明暗隔林原)”라고 하였다.(하략)
<문온공의 가계 요약> (2005. 8. 16. 주회(안) 제공)
○김흔 장군 사위 민적, 외손자 민사평,
○척약재 외가(민사평) 동네 = 천령현(현 금사면) 육우당,
○외조부 민사평(1295-1359) 묘 : 1359년 65세, (?여흥) 대덕산(大德山) 감응사(感應寺) 남쪽 둔덕에
○외조모 김씨(김륜의 딸) 묘 : 1374년 73세, (여흥) 고을 남방에 있는 발산(鉢山) 서쪽 (驪江之西) 기슭에
○어머니 민씨(민사평의 딸, 김묘 배위) : 1361년부터 여흥(驪興)에 살면서 친정 어머니 김씨(김륜의 딸)를 모셨고, 1379년 56세 돌아가시니 척약재가 조모 김씨(金氏) (◀김혼1239-1311 여, 김승택 배위)의 무덤 곁 (추정 : 여주 남 십리 발산 근처)에 장사하였는데, 거리가 십 몇 보나 되었다.---
○그리고 안정공파 김구덕-김오문-김중엄-김뉴, 군사공파 김전, 안렴사공파 김환 등등
여주 일대는 고려시대 조선초기 우리 가문과의 수수께끼가 있는 듯 합니다. 우리들의 발걸음이 계속 이어져야 할 듯...
2) 육우당 관련 기록 자료
(1)<신증동국여지승람>내 기록 (2001. 3. 4. 영환(문) 제공)
**신증 동국여지승람 제7권여주목(驪州牧) 山川--勝山- 주 남쪽 10리에 있다.
고려 김구용(金九容)의 시에 "깨끗한 청산에 들불이 침노하여,소나무 삼나무 다 타버리어 다시 마음만 상하는구나. 지난해 철쭉꽃이 피던 곳, 도리어 잡목만 울창하게 우거졌네"라고 하였다.
**척약재 학음집 "驪江勝山有感 "척약재 김구용의 문학세계(성범중저.울산대츨판) 405쪽
佛宇- 報恩寺-여강 동쪽 기슭 봉미산에 있다. 옛 신륵사인데, 벽돌탑이 있어 벽절이라 속칭한다. ---------
김구용의 시에 "참나무 돛대는 갈대 여울을 돌고,
소나무배는 돌다리에 매었구나. 맑은 바람은 늙은 나무에 불고,
밝은 달은 긴 강에 가득찼네, 설법하니 용도 응당 들을 것이요,
참선하니 범도 스스로 엎드리네. 오가며 그윽한 정취 있으니,
이끼 짙은 배창에 어울렸네"라고 하였다.
*참고 척약재 학음집 "정사 팔월 경오일에 ...." - 김구용의 문학세계 -181 페이지
川寧廢縣 -주 서쪽25리에 있다. -四友堂---마암에있다--(馬巖-州 동쪽 . 1리에있다) ------근자에 김선생 경지(敬之=김구용의 字)가 여강에 계셔 당을 이름하여 四友라 하였으니 이것은 雪,月,風,花를 뜻한 것이었는데 후에 江,山을 더하여 六友堂이라 하였다. 그 벗함이 어찌 뜻이 깊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 숭상하는 것이 다 선생이 벗한 바가 인륜일용(人倫日用)의 떳떳한 데 있고, 형색이 玩好한 데 있지 아니한 것만 같지 못하니, 벗을 취하는 도리가 이에 극진하였다........ 국역 신증동국여지승람 여주목 83 페지 참조
沈流亭- 천령 금사리에 있다.
----김구용의 시에 "멀리 남국에 노닐기를 이미 삼년인데, 깃발을 예천에서 금사로 옮겼네
伊庵의 유적이 있으니 침류정에서 책을 베고 잠드노라"하였다
*奉和東亭相公沈流亭四絶... 김구용의 문학세계 321쪽 참조
六友堂:천령현에 있다. 척약재 김구용이 여강에 귀양와서 당을 짓고 육우라 이름하였다.
李穡의 六友堂記에...
정추(鄭樞)의 六友堂賦에.....
(2)육우당(문온공 김구용의 당호)기-목은 이색 (2001. 6. 15. 영환(문) 제공)
목은선생께서 지으신 육우당기(六友堂記)를 올립니다. 육우당은 척약재선조께서 여흥(지금의 여주)에 계실때 계신 당호입니다. 당시 천녕현(川寧縣)에 있었다고 되어 있으나 현재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지만, 여러가지 정황으로 보아 현재 금사면 금사리 이포대교 근처일 듯합니다. 현지에 답사도 하여보았지만 바위와 5-600년된 은행나무가 있는것도 확인하였습니다. 신륵사 옆에 있는 마암위의 정자는 아닌 것이 틀림없을 듯 합니다. 앞으로 이에 관한 자료가 있으시면 연락 바랍니다.
육우당기 원문 볼 수 있는 곳; 척약재학음집,목은집,동문선,신증동국여지승람,
육우당기 번역문(울산대 성범중 교수 번역)
六友堂記.(이색.목은문고 권3)
永嘉 金敬之(척약재,김구용의 字)가 그 당을 아름하여 四友라 하였으나, 대체로 康節선생의 雪.月.風.花를 취한 것이다. 나에게 설명하기를 청하였으나, 내가 그것을 배우기를 원하지 않았고, 또 그럴 겨를이 없어 응하지 못한 지가 오래 되었다. 그가 여흥에 있으면서 글을 보내와 말하기를, "지금 우리 외가에 있는데 강산의 아름다움이 나를 아침.저녁으로 위로하는 것이 유독 설.월.풍.화.만이 아닌 까닭에, 여기에 江.山.을 六友라 하였으니, 선생은 가르침을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내가 쇠약하여 병든 지 오래였다. 위로 天時가 변하여도 내가 모르고 아래로 地理가 허물어져도 나는 모를 뿐이다. 康節의 학문은 數理에 깊은 것인데, 이제 비록 '江.山'두 글자를 그 위에 더 써서 강절과 같지 아니함을 보인다 하나 易이 六龍.六虛는 강절의 학문에서 나온 것이니, 이 또한 강절에게 돌릴 뿐이다. 비록 그러나 이미 배우기를 원하지 않는다 하였으나, 이것을 버림에 어찌 말이 없겠는가? 말하자면 산은 우리 仁者가 즐기는 것이니 산을 보면 내 仁을 보존하고, 물은 智者가 즐기는 것이니 강을 보면 내 智를 보존하는 것이다. 눈이 겨울의 따뜻함을 누르는 것은 나의 기운을 가운데 보존시킴이요, 달이 밤에 밝은 빛을 내는 것은 나의 몸의 평안함을 보존하는 것이다. 바람은 팔방이 있어 각기 철마다 나의 망녕된 움직임이 없으며, 꽃은 사시가 있어 각각 類로써 모이니, 나의 차례를 잃음이 없는 것이다. 또 더욱 敬之씨는 마음이 깨끗하여 한 점의 티끌도 없고, 또 사는 곳이 사잉 밝고 물이 푸르니, 맑은 거울고 비단 병풍이라 하여도 욕됨이 없을 것이다. 눈이 오면 孤舟衰笠이 더욱 아름 답고 , 달이 뜨면 높은 누각에서 술을 마시는 것이 더욱 아름답다. 뜻은 書榻에서 그 그윽하여지는 것으로 네 절의 좋은 경개가 각각 그 극치를 다하여, 강산의 사이에 經緯하였다. 敬之는 어머니를 모시는 여가에 강에서 배를 타고, 짚신 신고 산에 올라 落花를 세고, 淸風에 서서 눈을 밟고 중을 찾으며, 달은 대하여 손님을 부르니 사시의 즐거움이 또한 그 극치를 다함이니, 경지씨는 일세에 獨步하는 분이다. 同志를 벗함에 있어서도 위로 옛사람을 벗으로 하니, 옛사람을 하나 둘로 셀 수 없는 것이요, 벗을 現今에서 구하면 우리 같은 이로 어찌 적다고 하겠는가. 그러나 경지씨가 취한 것이 이와 같으니, 경지씨는 일세에 독보하는 분이다. 비록 그러하나 천지는 부모요, 物은 나와 한 편이니 어디에 가서 벗하지 못하이요? 더욱 大畜의 산과 習坎의 물은 강습하여 많이 아는 것이랴? 참으로 나의 유익한 벗이다"이라 하고 이 육우당기를 짓는다.
(3)六友堂賦- 정공권(정추) (2005. 11. 29. 영환(문) 제공)
육우당부 정추(정공권) 원재집
저 여강 바라보니
새로운 堂이 장려하네
아, 탁월히 높은 분이여
여기에 아름다운 벗들을 모았네
그 벗함이 오직 여섯인데
보통사람은 친할만한 것이 아니라네
高人이 더불어 평소에 그들과 어울리니
흉금을 그들로부터 속세티끌을 끊었구나
아, 아름답구나
저 양하게 긴 흐름이여
흐름의 근원이 있어 쉬지를 않네
저 까마득하고 아래가 두터움이여
높아도 위태롭지 않아 편안한 집이로다
저 꽃봉오리의 찬란함이여
아름다움 품었다가 때가 되면 피어나리
저 달의 곱디고운 모습이여
치우침없이 멀리 비추는 촛불이구나
巽二가 맑을 바람을 명하고
滕六은 나쁜 것을 숨겨주네
동서남북이
모두 그 어진 덕을 자랑하고 빛내네
손님과 주인이 서로 마주함이여
웃음소리도 장쾌하지 않던가
주고받는 말씨는 우뢰같고
낮이 다가고 밤늦도록 지내네
만일 그 거처를 말하자면 太極으로 집을 지었고
그 족속을 상고하면 천지사방에 두루하였네
천지가 이미 개벽되고
형상이 나타나 법도 그대로이네
세속이 어두워서
늘 함께 하면서도 알지 못하네
아, 나의 혼미함이여
눈못보는 장님과 무엇이 다르랴
아름답도다 洛의 元孫이여
일찍이 周易을 연구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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