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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우당 터 단서 찾기 - 이존오의 고산사(孤山祠) 상량문(上樑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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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영 작성일07-06-05 09:56 조회1,571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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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산사(孤山祠) 상량문(上樑文)

己未十一月  日 (1679년 숙종5)


엎디려 생각하건대 도학을 해동(海東)에 선창하였으니 모두가 염완기나(廉頑起懦)의 풍화를 우러러 보게하고 사우(祠宇)를 강상(江上)에 건립하였으니 마땅히 정성을 다하여 영령을 모시리로다.

-중략-

선생의 풍도 보게나 산 높고 물 길게 흐르니 사문(斯道)은 없어지지 않으리. 모든 학문을 하는 사람들 어찌 힘쓰지 않을소냐. 연하(燕賀)의 글을 외워 상량(虹樑: 채색을 말함)의 일을 도와주노라.


어기어차와 들보 동쪽으로 떡을 던지네.(아랑위兒郞偉 포량동抛樑東)

묵은 구름 걷히자 아침 햇살 붉으니 쌍 봉우리 중천(中天)에 우뚝하다 자랑마오. 드높은 그 기개 홍수 막아낸 이 산과 같다네.

어기어차와 들보 서쪽으로 떡을 던지네.(아랑위兒郞偉 포량서抛樑西)

넓고 먼 큰 들판에 넘는 해 낮으막하니 우리 고을 옛부터 군자 많으니 육우(六友: 척약재 김구용의 당)의 남긴 기지 봉서(鳳棲: 둔촌 이집의 정자)에 근접했다네.


어기어차와 들보 남쪽으로 떡을 던지네.(아랑위兒郞偉 포량남抛樑南)

마암(馬岩)의 겹겹 쌓인 그림자 강 속에 거꾸로 잠겼는데 바람 솔솔부는 나룻터에 푸른 놀 거두니 멀리 가르키는 장림(長林:길게 이어진 숲)다섯 또는 셋이라네.


어기어차와 들보 북쪽으로 떡을 던지네.(아랑위兒郞偉 포량북抛樑北)

난간 밖 비개인 봉우리 씻은듯이 깨끗한데 한줄기 시냇물 계림(桂林) 싸고 돌으니 행인들아 이곳이 이장사(李長沙)의 제택인줄 알게나.


어기어차와 들보 위쪽으로 떡을 던지네.(아랑위兒郞偉 포량상抛樑上)

日月이 중천에 오르자 한치의 장애물도 없으니 하늘에 부끄럽지 않은 당당(堂堂)대절 알겠노라 백대 후에도 그 정신 왕성하겠지.


어기어차와 들보 아래쪽으로 떡을 던지네.(아랑위兒郞偉 포량하抛樑下)

끝 없이 출렁이며 흐르는 강물 잠시도 멈추지 않누나 많은 선비들 제물 받들면서 친히 수업하듯이 거룩하신 궤범 생각하리.

-이하 생략-


고산사(孤山祠): 석탄 이존오의 사당.(고산서원이었으나 훼철되었고 고산사도 현재는 폐사 되었다. (경기 여주군  대신면 보통리 김영구가옥 옆)

육우(六友): 척약재 김구용의 육우당을 말하며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다.

봉서(鳳棲): 봉서정은 둔촌 이집의 정자이다. 1995년에 후손들에 의해 다시 건립 되었다.

댓글목록

김윤식님의 댓글

profile_image 김윤식
작성일

  아저씨 중요한 정보 감사합니다.
고산사는 여주 고지도에 파사성 옆에 표시돼 있습니다. 올려주신 내용처럼 '여주군 대신면', 즉 '여강 북쪽 기슭'에 있었다는 뜻이죠.
그런데 문온공 할아버지 문집이나 기타 자료들에서는 육우당 위치가 '여강 남쪽인 금사면'으로 나오잖아요.
그리고 계암일록에는 금사면 이포에 살았던 김안국 선생에 대한 짤막한 기록이 있습니다.
이때 계암 김령은 “여강 왼쪽에 있는 이포에 이르니 모재 김안국 선생이 살던 곳이다.”라고 해서 이포가 여강 왼쪽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당시 계암은 여주 신륵사를 관람한 다음 배를 타고 이포와 양근을 지나 한양 쪽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여주에서 서울 쪽으로 가고 있었던 것이죠.
이로 보아 계암 자신의 ‘왼쪽’에 있는 이포는 여강 남쪽 기슭이고, 남사면 이포 인근에 있었던 육우당은 고산사와 떨어져 있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런데 아저씨께서 올려주신 “우리 고을 옛부터 군자 많으니 육우(六友)의 남긴 기지 봉서(鳳棲)에 근접했다네”라는 글귀를 보면 두 정자가 여강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보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떠오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