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공(휘 素)에게 호주 채유후가 주는 칠언절구 2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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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작성일07-06-08 08:43 조회1,480회 댓글0건본문
충청 수사로 나가는 감사공(휘 素)에게 주는 호주(채유후)의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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湖洲先生集卷之一. 七言絶句
贈別忠淸水使金素 二首
隔簾斜日映深巵。聚散人間本不期。漫叟纔行君又去。城南送別太支離。
人生難免別離愁。何況天時又是秋。永保亭前明月夜。大杯安得與君酬。
*작성시기 : 감사공 김소 54세(1655년. 효종6. 7. 29)
*작자 : 채유후(蔡裕後)
1599(선조 32)∼1660(현종 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평강(平康). 자는 백창(伯昌), 호는 호주(湖洲). 진사 충연(忠衍)의 아들이다.
어릴 때부터 문재에 뛰어났으며, 17세에 생원이 되고, 1623년(인조 1) 개시문과(改試文科)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홍문관에 보임되고, 사가독서(賜暇讀書)를 거친 뒤 교리·지평·이조좌랑·응교를 역임하고 사간을 지냈다.
1636년 병자호란 때 집의로서 인조를 호종하였다. 김류(金#유15) 등의 강화천도 주장을 반대하고 주화론에 동조하였다가 구금되었고, 1638년 석방되었다.
1641년 광해군이 제주도에서 사망하자 예조참의로서 호상(護喪)을 맡아보았으나 행상(行喪)할 때 담군(擔軍)에게 백건(白巾)을 쓰게 하였다는 탄핵을 받아 병을 빙자하여 사임하였다.
중년 이후 술을 좋아하여 때때로 주실(酒失)을 저질러 인조의 눈밖에 났으나, 1646년 이조참의로서 지제교가 되어 누구도 싫어하는 강빈폐출사사교문(姜嬪廢黜賜死敎文)을 지어 다시 현용(顯用)되었다.
그러나 그 자신도 강빈사건에 반대견해를 취하였던 터이므로 집에 돌아와 소장하고 있던 교문을 짓는 데 필요한 사륙전서(四六全書)를 모두 불태워버릴 만치 후회하였다고 한다.
이어 대사간을 거쳐 병조참의로 별시문과 초시의 시관이 되었으나, 부정이 있다고 하여 한때 파직되었다.
1647년 동부승지를 거쳐 부제학·대사성·대사간을 역임하고, 다시 이조참의가 되었다.
효종이 즉위한 뒤에도 대사간으로 있으면서 상작남상(賞爵濫觴)을 경계하였으며, 1652년(효종 3) 이조참판에 오르고, 이듬해에는 대제학으로서 《인조실록》 편찬에 참여하여 가자(加資)되었다.
이후 이조참판 겸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를 역임하고, 여러 차례 대사헌을 거친 뒤 1657년 대제학으로서 《선조수정실록》 편찬의 책임을 졌으며, 곧이어 예조판서·우참찬에 승서되었다.
이듬해 이조판서에 오르고, 대제학을 8년 동안 겸하고 있었으나 여러 차례 사직상소를 올렸다. 형조판서로 옮겼다가 다시 예조판서가 되었으나 술에 취하여 실의(失儀)하였다는 사헌부의 탄핵으로 파직되었다. 현종이 즉위하자 찬집청당상(撰集廳堂上)으로 《효종실록》 편찬에 참여하고, 1659년(현종 즉위년) 성절사(聖節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9월 다시 대사헌에 올랐으나 유계(兪棨)의 탄핵으로 사임하고, 공조참판·내국재조(內局提調)를 거쳐 다시 대사헌이 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병으로 죽었다.
죽고 난 뒤 실록편찬의 공으로 숭정대부(崇政大夫)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술 때문에 여러 차례 탄핵을 받았으나 문재에 뛰어나 중용되었다.
작품으로는 시조 2수가 전하며, 저서로는 《호주집》이 있다. 시호는 문혜(文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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