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4회 정기산행(여주 일대 선영 및 유적지 답사) 보고_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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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용, 윤식 작성일07-06-14 21:18 조회1,725회 댓글3건본문
제44회 정기산행(여주 일대 선영 및 유적지 답사) 보고_01
개인 사정으로 보고가 늦어져 죄송합니다. 답사 지역이 여느 때보다 다소 많아서 2회로 나누어 보고드리겠습니다.
일시 : 2007년 6월 10일(일요일)
장소 : 경기도 여주 일대 선조 묘소 및 유적지
참석 : 11명(무순, 경칭 생략)
영환, 은회, 발용, 진회, 태우, 태영, 항용, 영식, 용주(부부), 윤식
이상 기온으로 초여름이건만 한여름을 방불케 합니다. 이번 답사는 여주 삼승리의 안정공(휘 구덕) 할아버지 묘역을 비롯해 안렴사공파 판교공종중 선영(귀백리 일대), 신륵사의 문온공 유적 및 이포리의 육우당 터로 결정되었습니다.
08:00 정각, 잠실올림픽체육관 서문 앞에 집결한 우리 일행은 발용 종친께서 운전하는 승합차(15인승)에 올라타 중부고속도로를 이용해 여주 삼승리의 안정공 할아버지 묘역으로 향했습니다.
화창한 날씨에 이른바 ‘놀土’와 겹쳐 교통이 혼잡할 것 같았는데, 예상외로 09:48분 여주휴게소(하행선)에 도착해 늦은 아침을 들었습니다.
09:24분 다시 길을 재촉하는 사이 항용 종친께서 대구청장년회 종친들과 통화를 합니다. 대구청장년회는 춘계행사인 문화유적 답사차 05:30분 대구지방법원을 출발해 중부고속도로로 올라오는 중이었습니다. 대구청장년회는 경기도 연천군의 숭의전과 경순왕릉을 비롯해 충무공(요동백 휘 응하) 사당인 포천군의 포충사 및 고석정을 탐방할 예정입니다.
■ 안정공 묘역 참배
우리가 출발하기 직전인 09:10분경 대구청년회는 맞은편(상행선) 여주휴게소를 출발했다는 전언입니다. 대구청장년회 춘계행사는 매년 실시되는데, 올해는 부부동반으로 71분의 종친이 참가해 관광버스 2대가 동원되었답니다.
그러고 보니 서로 맞은편에서 아침을 들었던 모양입니다. 즐거운 춘계행사 무사히 다녀오시길 빌면서 09:37분 감곡IC를 통과합니다. 이제 15분 정도만 더 가면 안정공 할아버지 묘역입니다. 안정공 묘역은 일전에 윤만 종친께서 소개하신 <안정공 묘소 답사기>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안정공 묘소 답사기 보러가기>
감곡IC를 통과하면 곧바로 앞에 굴다리가 보입니다. 이 굴다리 못 미처 길이 여러 갈래로 갈라집니다. 오른쪽(장호원 방향)으로 휘어지는 길이 둘인데, 반드시 두 번째 길로 들어가서 위에 보이는 38번 국도로 올라타야 합니다.
◆안정공 묘역 찾아가는 길(여주군 가남면 삼승리) |
지난 5월 1일 판서공 시제 참예차 전남 강진으로 가면서 찾아뵙고 한 달여 만에 다시 안정공 할아버지를 뵙습니다. 안정공 할아버지와 명빈(明嬪)에 대해서는 우리 홈에 여러 차례 소개되었으므로 <역사적 인물>란과 게시판에 올라온 글들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 안정공(諱 九德), 配 莊敬宅主 辛氏 묘소 전경
묘역을 바라보고 안정공 할아버지께서는 오른쪽에, 장경택주 신씨 할머니께서는 왼쪽에 모셔져 있습니다. 때이른 더위 탓에 불과 한 달 만에 풀들이 훌쩍 자랐습니다. 우리 일행은 주위를 정돈한 다음 준비해 온 간소한 제물을 진설하고 절을 올립니다.
헌관 : 영환, 윤식
▲ 안정공(諱 九德) 묘소
▲ 장경택주 신씨 묘소
윤만 종친의 안정공 묘역 답사기에 기록된 것처럼 안정공 할아버지 묘소는 오랫동안 실전되었다가 약 25년 전에 되찾게 되었답니다. 마침 묘소 앞집에 거주하는 최위규(72세 강릉인) 옹을 만나 간략하나마 몇 가지 정보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최 옹은 이 마을에 사는 진석(성씨 미상) 씨가 안정공 할아버지 묘소를 안정공파 종인에게 연락을 해 주었다고 합니다.
이 일대는 강릉최씨 소유라고 하며, 최 옹에 의하면 몇 해 전에 군청(郡廳) 직원들이 현지에 나와 사진촬영을 하는 등 조사를 하였다고 합니다. 강릉 최씨가 이 마을에 입향한 것은 최 옹의 17대조라고 하며, 입향조 묘소는 이 마을 건너편 산에 있다고 합니다. 이 일대가 왜 최씨문중 소유가 되었는지 실마리를 얻기 위해 입향조 휘자와 내력을 물었으나, 최 옹은 자세히 기억하지 못하는 듯했습니다. 이 마을 출생인 최 옹의 소싯적 기억에 의하면 현 안정공 묘역은 예전 그대로라고 합니다.
안정공 할아버지 묘소의 석물은 상석(1쌍), 묘표(1쌍, 귀접이 형태), 문인석(1쌍, 어깨 높이 크기) 및 장명등(파손된 형태)이 있습니다. 묘표는 오랜 세월 비바람에 깎였으나 ‘贈諡安靖公金九德之墓’와 ‘莊敬宅主辛氏之墓’라는 글자를 판독할 수 있었습니다. 기미대보에 안정공 할아버지 배위는 장경택주 영월신씨 할머니 외에 ‘전주이씨(父 廣平君 陵)’ 또 한 분이 기록돼 있습니다. 언제 준비하셨는지 은회 종친께서 줄자를 꺼내 석물을 실측합니다.
▲ 좌, 우 문인석
▲ 파손되어 받침대만 남은 장명등
◆안정공 묘역 석물 |
안정공 할아버지 묘소 아래쪽 정면은 봉긋하게 솟아 있으며, 묘소를 바라보고 오른쪽 아래에 길쭉한 석물 1기가 땅에 반쯤 묻혀 있습니다. 그 형태로 보아 망주석으로 추정되었으나, 태영 종친께서 인근 농가에서 삽을 빌려와 확인해 보니 뜻밖에도 문인석이었습니다.
문인석 형태는 안정공 할아버지 묘소의 문인석과 동일합니다. 특히 관모 뒤쪽의 장식이 판박이처럼 닮았습니다. 크기는 안정공 할아버지 묘역의 문인석보다는 좀더 큰 편입니다.
처음에는 망주석 같았던 석물이 조각기법이 흡사한 문인석으로 확인됨으로써 안정공 할아버지 묘소 아래쪽에 또 다른 묘소가 있었던 것이 거의 확실합니다.
때마침 관리인 이우찬 씨가 묘역으로 올라옵니다. 이우찬(全州人) 씨는 춘천시에 거주하다가 20여 년 전에 이곳으로 이주했으며, 당시 문인석 왼쪽으로 묘소가 1기 더 있었는데 안동김씨 묘라고 증언합니다. 우리 일행은 그 묘소가 혹시 안정공 할아버지의 아드님이신 총절제사공(휘 오문) 할아버지 묘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묘역 정면의 돌계단으로 추정되는 석물들은 현재 땅 속에 묻힌 상태로 일부가 돌출돼 있습니다. 은회 종친께서 손바닥으로 돌출된 부분을 만져보더니 어느 정도 다듬은 돌임을 확인합니다.
또한 안정공 묘역 왼쪽에 산기슭에 무덤 2기가 있는데, 이곳의 석물 역시 면밀히 검토할 필요성이 있었습니다. 최 옹에 따르면 이 무덤은 강릉최씨 선대 묘소라고 합니다.
▲ 관리인의 증언을 청취하는 답사 일행
▲ 묻혀 있는 석물
▲ 돌계단으로 추정되는 석물
■ 신륵사 답사
안정공 묘소 참배를 마친 일행은 10:41분에 다음 목적지인 여주 신륵사와 귀백리 일대로 향했습니다. 온 길을 되짚어 나가 내륙고속도로 밑에서 좌회전하면 여주로 가는 길입니다. 고속도로 밑 굴다리를 지나 11:10분경 신륵사 입구 집단상가 주차장에 도착했습니다.
◆여주 신륵사 가는 길 |
주차장에서 5분 가량 걸어가는 길은 주위를 잘 단장해 놓았습니다. 좌우에 심어 놓은 벚나무에 버찌가 까맣게 익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봉미산 신륵사 산문 입구에 비포장 주차장이 또 하나 있었습니다. 보행이 어려운 분들은 이곳에 주차하는 것이 편할 듯합니다. 신륵사 산문은 최근에 지은 것으로 그다지 조형미가 아름답지 못합니다. 봉미산은 신륵사 뒤쪽의 나지막한 산줄기입니다.
신륵사에는 여말의 고승인 나옹화상이 열반한 유서 깊은 사찰로 문온공(휘 구용)과 관련된 유적이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신륵사 경내 동쪽에는 여강(驪江)이 내려다보이는 커다란 바위 위에 모전(벽돌)으로 만든 고려시대 다층전탑이 서 있어 ‘벽사(璧寺)’라고도 부릅니다. 이 전탑은 현재 우리 나라에 남아 있는 유일한 고려시대 전탑이라고 합니다.
▲ 신륵사 입구
▲ 金炳冀 공덕비
▲ 보물 226호 신륵사 다층전탑
전탑 아래에도 자그마한 크기의 고려시대 석탑이 서 있으며, 전탑 바로 위쪽에는 ‘신륵사 대장각기비’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목은 이색 선생은 공민왕과 부모의 명복을 빌기 위해 나옹화상의 제자들과 함께 대장경을 인쇄 보관하는 2층 규모의 대장각을 신륵사에 세웠는데, 그 내력을 적은 것이 바로 대장각기입니다. 오랜 세월로 비석은 여러 조각으로 깨졌으나 글자는 금방 새긴 듯 날이 서 있습니다. 비문은 여말의 천재로 일컬어졌던 이숭인 선생이, 글씨는 권주 선생이 썼습니다.
▲ 여강을 굽어보며..
▲ 신륵사 대장각기비
우리 일행은 잠시 여강을 조망한 다음 ‘조사당’ 뒤쪽에 있는 보제존자 나옹화상의 부도로 걸음을 옮겼습니다. 나옹화상은 충숙왕 7년(1320년)에 태어나 우왕 2년(1376년)에 입적한 고승으로 속성(俗姓)은 아씨(牙氏)라고 합니다. 공민왕 재위시 나옹화상은 충렬공의 <초당일기>가 있었다는 황해도 신광사(神光寺)에 머물기도 한 분입니다.
나옹화상은 경기도 양주 회암사에 머물다 경남 밀양으로 가다가 이곳 신륵사에서 입적하였습니다. 이때 사리를 수습해 부도를 세웠는데, 그것이 바로 ‘보제존자 석종(普濟尊者石鐘)’입니다. 그 형태가 아름다고 특이해 보는 이를 사로잡습니다.
그 옆에 이를테면 나옹화상의 묘비라고 할 수 있는 ‘보제존자 석종비’가 있습니다. 이 비석의 글은 목은 선생이 짓고, 글씨는 명필로 유명했던 한수 선생이 썼습니다. 비석 위에는 기와집 지붕 형태로 조각했는데, 25~6년 만에 다시 보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 신륵사 보제존자석종비
비면에는 나옹화상의 묘탑(부도)과 영정을 모신 진당(眞堂)을 조성한 내력이 적혀 있는데, 뒷면에 당시 이 일을 추진했던 고려시대 인물들과 시주 등 200여 명의 이름을 새겼습니다. 그 명단 중에 문온공과 왕대고모님 휘자가 들어 있습니다. 관련 내용은 영환 종친을 비롯해 윤만, 주회, 태영 종친 등 여러 현종들께서 올리신 글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보제존자 석종비 뒷면에 수록된 선조님 |
▲ 부분 글씨
▲ 보제존자석종비 후면 탁본
또한 부도 앞에는 고려시대 석등이 있는데, 속인으로 치면 장명등인 셈입니다. 조선 중기에 이곳에 들렀던 계암 김령은 이 석등을 보고 ‘화려하기가 극에 달했다’고 평할 정도였습니다. 크기는 불과 67cm에 지나지 않으나 팔각형 각 면마다 화사창(火舍窓)이 뚫려 있고, 화사창(火舍窓) 사이사이 기둥에는 놀랄 정도로 정교한 반룡(蟠龍)을 새겼습니다. 고무찰흙으로 빚는다 해도 이처럼 정교하게 조각하기가 힘들 정도입니다.
▲ 신륵사 보제존자석종비 앞에서...(뒷줄 좌로부터 태영, 태우, 영환, 은회, 영식, 진회, 앞줄 좌로부터 항용, 용주, 윤식, 발용)
재질은 화사석(곱돌)이라고 하는데 마치 모래를 섞지 않은 콘크리트 가루를 물에 개서 굳힌 것처럼 보입니다. 할아버지와 왕대고모님 휘자를 손으로 더듬어 그 옛날 할아버지 온기를 느낀 다음 신륵사 산문을 나서니 11:50분입니다.
글 윤식 / 사진 발용
댓글목록
김윤식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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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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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대부님, 걱정하신 것보다 사진 좋습니다.
일부는 raw 손보신 건가요?
여강을 배경으로 한 신륵사 석탑 사진 처리기법 좀 가르쳐주세요.
행순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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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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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멋진 사진과 맛깔스런 글을 보면 같이 못한 아쉬움이 더합니다. 더운날에 고생들 하셨습니다.
영식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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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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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후기 감사히 보았습니다.운전에다 사진까지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