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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정릉이야기(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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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작성일07-07-04 08:44 조회1,44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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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릉 지킴이 전문카페에서 인용했습니다.

 

선릉(성종)

선릉가기

지하철 2호선에 선릉역 있다는 것은 많은 사람이 알아도 선릉이 조선왕조 제 9대왕인 성종과 정현왕후가 모셔져 있다는 것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무역센터등 쭉쭉 늘어선 테헤란로의 고층빌딩들 사이에 500년전의 왕릉이 보존되어 있다는 것,이것이 600년 역사를 지켜온 서울의 힘이라. 사적 제 199호로 지정돼 있는 선정릉은 지하철 선릉엑에서 5분 정도만 걸어가면 그 입구에 닿을 수 있는 도심속의 자연이고 역사이다. 성종과 그 계비 정현왕후를 모신 선릉과 그분들의 아들 중종이 주워있는 정릉을 합하여 선정릉이라고 하는데 입구쪽에 있는 것이 선릉이다. 홍살문과 정자각 건너 멀리 보이는 것이 성종의 능이고 동쪽 언덕에 있는 것이 정현왕후의 능이다.

성종대왕께서은.....
세조의 장자인 의경세자의 둘째 아들인 성종은 1457년(세조3년) 7우러 30일 경복궁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소혜왕후이다. 성종이 태어난 지 두달만에 부친이 20세로 요절하자 의경세자의 동생인 예종이 세조의 뒤를 이어 즉위하고 성종은 자을산군으로 봉해졌다. 그러나 예종도 즉위한 지 1년만에 승하하고 예종의 원자는 겨우 아홉 살이었으며,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도 병으로 누워 있었기 떄문에 정희왕후의 명으로 성종은 1469년 11월 28일 13세의 어린 나이에 경복궁에서 왕위에 올랐다. 성종은 어려서부터 천품이 뛰어났느며, 도량이 넓고 서와에도 능해 세조의 사랑을 받았다고 전한다.. 선릉에 있는 지석의 내용중에 이런 귀정이 있다 왕은 타고난 자질이 밝고 슬기로우니 세조가 특별히 사랑했다.일찍이 형인 월산대군과 더불어 궁중에 있다가 갑자기 천둥이 치고 비가 쏟아지며, 그 자리에서 시인에게 벼락이 떨어지자 모두 기절하였는데 왕만 홀로 예사롭게 여겼으므로 세조가 "이 아이는 태조와 비슷하다"고 했다.
태조의 비범함을 닮았다는 성종은 7년간 정희대비의 수렴청정을 받다가 1476년 (성종7년)비로서 친정을 시작했다. 왕비인 공혜왕후가 1474년 (성종5년)승하하자 성종은 원자를 넣은 숙의 윤씨를 계비로 삼았다. 윤씨는 왕비가 되자 질투가 심해져서 궁내에 많은 물의를 빚었다. 어느날 성종이 후궁의 침소에 들었다는 소식을 들은 왕비가 소동을 부리고 용안에 손톱자국을 내자 인수대비의 노여움을 사 결국 1479년 폐위되고 3년 사약을 받기에 이른다. 훗날 벌어질 갑자사와의 씨앗이 잉태된 것이다. 25년 동안 왕위에 있으면서 성종은 많은 업적을 남겼다.
(경국대전)과 (대전속록)을 완성하여 통치의기반이 되는 법제를 완비했으며, 토지의세습과 관리들의 수탈을 방비하기 위해 관수관급제를 실시 국가에서 경작자로부터 직접 조를 받아들여 관리들에게 현물녹봉을 지급했다. 또한 경사에 밝고 성리학에 조예가 깊어 학문과교육을 장려하고 (공국여지승람) 동국통감)(삼국사절요) (동문서) (의학궤범)등 각종 서적을 간행케하였다 한편 세조떄의 공신을 중심으로 하는 훈구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김종직일파의 신진사림세력을 많이 등용하여 훈신과 사림간의세력균형을 이룩 왕권을 안정시켰고 조선 중기 이후 사림정치의기반을 조성했다.
이렇게 태조이후 닦아 온 조선 왕조의 정치 경제 사뢰문화적 기반과 체제를 완성시켜 조선 초기 문화의 꽃을 피운 장본인이 바로 성종이다. 제왕비와 여덟 후궁에게서 열여섯 명의 아들과 딸 열두명을 두고 1494년 12월 24일 창덕궁에서 승하하였다.왕위에 있은지 25년 보령 38세였다.


선릉보기

1495년 4월 6일 광주부 서면 학당동(현 삼성동)언덕에 장사지내고 시호를 강정이라 했다. "석실이 유해무익하니 원.능은 석실과 병풍석을 쓰지 말라는 세조의 유언에 따라 석실을 만들지 않았으나 병풍석은 여전히 봉분아랫부분에 둘려져 있다 12면의 병풍석에는 각각 십이지신상을 조각하여 방위를 표시했다. 땅을 지키는 열두신장을 십이지신또는 십이지신왕이라고 하는데 이들은 열두방위에 맞추어 십이지신상의 얼굴모습을 가지며 몸은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다.하지만 병풍석에 조각된 십이지신상은 거의 비슷비슷하게생겨서 일반인들의 눈으로는 구분하기 어렵다.
다른 양식들은(구조오례의)양식을 따르고 있다 장명등은 헌릉과 비슷하며 석인들은 전체적으로 입체감이 결여되고 퇴화된 느낌을 갖게 한다 얼굴은 사실적으로 조각되었지만 몸에 비해 얼굴이 너무 크고 몸집이 기둥같아서 인가 일반인들도 봉분근처까지 올라가서 석물들을 관찰할 수 있도록 능 양옆에 계단을 만들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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