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릉 옆에는 성종과 정현왕후의 소생인 중종의 정릉이 있습니다. 원래 정릉은 현재 서삼릉에 있는 희릉 왼쪽 언덕에 있었는데, 중종의 세 번째 부인 문정왕후에 의해 지금의 자리로 강제천장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곳은 명당이 아닌 비가오면 정자각까지 물이 차는 흉당이었고, 결국 문정왕후는 다른 곳에 묻혔습니다. 현재에 이르러 선릉과 정릉의 능이 3개가 있다하여 선정릉 보다는 삼릉공원으로 더 유명해지게 된것입니다.
정릉
봉분을 둘러싼 병풍석과 난간석
세명의 부인이 있는대도 홀로 묻인 중종
중종은 성종과 정현왕후 윤씨 사이에 아들로, 성종 19년(1488) 3월 5일에 탄생하시어, 성종 25년에 진성대군으로 봉해지셨습니다. 그 후 연산군 12년 9월 2일에 중종반정으로 이복형 연산군이 폐위되자 경복궁 근정전에서 조선 제 11대 임금으로 즉위하셨습니다. 하지만 즉위 7일만에 원부인 중전 신씨가 연산군의 처남의 딸이라는 이유만으로 폐위되는 비운을 겪으시기도 하셨습니다. 중종은 새로운 왕도정치와 이상정치를 실현하려고 하였으나, 당파싸움으로 각종 옥사들이 일어나 무산되고 말았습니다. 중종 14년에 개혁정치에 힘쓴 조광조를 제거하는 기묘사화와 중종 28년에 동궁(인종)을 저주하는 작서의 변으로 후궁 경빈 박씨와 서장자 복성군을 사사하는 일도 겪으셨습니다. 그 후 즉위 39년만인 1544년 11월 15일에 창경궁 환경전에서 춘추 57세로 승하하시어, 이듬 해 2월 3일에 중종의 첫 장지인 지금의 서삼릉 희릉 옆 언덕에 동원이강의 형식으로 모셔졌습니다. 하지만 17년후인 명종 17년에 9월 4일에 중종의 2계비이자 명종의 생모가 되는 문정왕후 윤씨와 봉은사 주지 보우의 의논으로 현재의 정릉에 모셔지게 되셨습니다.
소생은 인종과 명종을 포함하여 9남 11녀를 두시었고, 원비는 중종 원년에 책봉된지 7일만 폐위되어 영조 15년에 복위된 단경왕후 신씨. 1계비는 인종의 생모가 되는 장경왕후 윤씨. 2계비는 명종의 생모가 되는 문정왕후 윤씨를 비롯하여 3명의 왕비와 9분의 후궁을 두셨습니다.
정릉 문인석과 무인석, 석마
석호
망료위는 없고...
정릉의 홍살문 옆에는 일반 왕릉과는 달리 먼가 허전해 보입니다. 임금이 참배 전 절을 하던 곳인 망료위가 정릉에는 없습니다. (태종의 헌릉또한 없습니다.;;;)
이상하게도 명종때 새워진 능들의 무인석과 문인석들은 모두 코가 큽니다. (명종때 세워진 능 : 순창원, 정릉, 태릉, 강릉) 그 영향으로 정릉의 문인석과 무인석들의 코가 크고 웅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