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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양 자료-성소부부고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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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작성일07-07-07 10:19 조회1,41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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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소부부고에서

惺所覆瓿藁卷之五 文部二  序

   送金子中赴京序

恭惟我國家服事天朝。恪守侯度。其於朝覲聘享陳請慰謝之際。又殫誠盡禮。克敬克愼。蓋二百年餘矣。而卽如一日焉。其奉命之臣。亦必於儒臣中。極遴才識出類而博文達禮且諳委掌故者爲之。乃可導揚主衷。虔修使職。以不負妙簡之意。故祖宗以來。獨此選爲最重。其指蓋可徵矣。使之下置書狀官。兼綰憲篆。以糾一行之不法。苟不循邦制。則雖上价亦許抨劾不避。其選視使選無軒輊。而人之嚴憚之者。加於使一等云。不佞聞宣陵日。有相尹士昐貞熹后之弟也。賀極回。挾齎私貨甚夥。書狀權公景祐到江上發其贓。康靖大王徵下請室。將罪以律。士昐以憂恐死狴中。景祐旣不以貴近大臣而饒之。康靖王終不以后弟之親而貸之。后亦無所請丐寬宥。先王之持法。可謂堅矣。而景祐之不畏權戚。亦可尙矣。臣主審皆如是。則家國奚憂乎不治平哉。近世薦紳大夫。非不兢兢守法。而世議甚隘。毛疵難掩。不幸有絓於憲者。亦多網漏。嗚呼安得上下持法。守正不阿如宣陵日耶。吾友金君子中。天下士也。洽聞殫記。富有文藻。弱冠決科。揚歷華貫。其律身以矩矱。動必以前哲爲師。奉公秉法。一出於正直。不爲彊禦所撓。風稜峻整。鄙暴革心。眞可寘諸左右。以弼違糾慝者也。人皆謂不爲諫臣則必作臺官。而顧乃汲汲出之。爲賀至書狀。衆論頗以爲歉。子中獨好之。萬里壯游。深喜愜願。不佞又以知子中之㞃量。不欣戚於一用捨間者。出於恒人如是也。銓衡之推擇。當宁之拔用。豈無其見歟。蓋欲使上下持法。守正不阿私如宣陵日。子中抱負素重。亦肯巽順淟涊。循默苟過。以孤朝廷遴簡之望耶。不然則權公亦笑人寂寂也。子中勉旃哉。今玆之行。上价厚德達識。足以雅鎭。而副价亦材能自喜。以子中之風力則介協心相濟。以圖使職。則其於吳札之觀周。鄭僑之致聘。可以異代而同符。不亦韙耶。子中勉之哉。於其行也。子中要一言以贐。書此以規之云。

 

<역문>

성소부부고 제5권 .  문부 2(文部二) - 서(序)

북경(北京)에 가는 김자중(金子中)을 전송한 서


삼가 생각건대 우리나라가 중국을 섬김에 공경히 제후의 법도를 지키니, 그 조근(朝覲)ㆍ빙향(聘享)ㆍ진청(陳請)ㆍ위사(慰謝)의 즈음에 또 성의와 예절을 다하고 공경과 삼감을 극진히 한 것이 대개 2백여 년이지만 곧 하루같이 하였다.

그 봉명하는 신하도 반드시 유신(儒臣) 중에서 재식이 출중하고 문에 해박하고 예에 통달하고 또 장고(掌故)를 잘 아는 자를 뽑아서 임명해야만 임금의 뜻을 인도하여 드날리고 사신의 직을 잘 닦아서 정하게 가린 뜻을 저버리지 않게 된다.

그러므로 조종 이래로 유독 이 선발만은 가장 중히 여겼으니, 그 취지를 대개 징험할 수 있겠다.

사신의 아래에 서장관을 두고 겸하여 헌전(憲篆)을 관장하게 하여 일행의 불법을 규탄하게 하였으므로 나라의 제도를 따르지 아니할 경우에는 비록 상사(上使)라도 또한 탄핵을 허여하여 피하지 않았으니, 그 선발이 사신을 선발함에 비하여 경중이 없으며 사람들이 무서워하고 꺼리는 것은 사신보다 한 등을 더한다고 한다.

나는 들으니 선릉(宣陵) 때에 정승 윤사분(尹士昐)이 있었는데 정희후(貞熹后)의 아우였다. 등극을 하례하고 돌아오는데 사사로이 재화를 가지고 온 것이 매우 많았다. 서장관(書狀官) 권공 경우(權公景祐)가 강상(江上)에 이르러 그 장물(贓物)을 적발하니 강정대왕(康靖大王 성종)이 불러서 청실(請室 궁중에서 대죄(待罪)하는 법으로 죄를 청하고 기다리던 곳)에 내려 장차 율(律)로써 죄주려 하자 사분(士昐)은 근심과 두려움으로 옥중에서 죽었다.

경우(景祐)는, 이미 종실이나 가까운 대신이라 하여 그를 용서하지 않았고, 강정왕도 끝내 후(后)의 동생이라는 친(親)이라 하여 두둔해주지 않았고, 후(后) 역시 관유(寬宥)를 빌 곳도 없었으니 선왕의 법을 지킴이 견고하다 하겠으며, 경우가 권척을 두려워 않음도 숭상할 만하다. 임금과 신하가 모두 다 이와 같다면 국가가 어찌 다스려지지 않음을 염려할 것인가?

근세의 사대부들이 법을 지키기에 조심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세상의 의논이 너무나도 좁아 터럭만한 과실도 가리기 어려워서 불행히 법에 얽혀 든 자도 있는가 하면 또한 빠져 나가는 자도 많았으니, 아, 어떻게 상하가 법을 바르게 지키고 아부하지 않기를 선릉(宣陵) 시절과 같이 할 수 있겠는가? 나의 벗 김군 자중(子中)은 천하의 선비다. 두루 듣고 많이 기억해서 문조(文藻)가 풍부하므로 약관(弱冠)에 과거에 올라 화려한 벼슬을 다 지냈다.

그는 몸 단속을 법도로써 하여 반드시 예전 어진이로써 스승을 삼았고, 공사(公事)를 받들고 법을 집행함은 한결같이 정직에서부터 나오고 강자에게 흔들리는 바 되지 않았다.

위풍이 늠름하여 야비하고 포악한 자들이 마음을 고치게 되었으니 진실로 좌우에 두어서 잘못을 보필하고 사특을 규탄할 만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모두 간신(諫臣)이 되지 않으면 반드시 대관(臺官)이 되리라 여겼었다. 그런데도 서둘러 끌어내어 하지사(賀至使)의 서장관(書狀官)을 삼았었으니, 중론(衆論)이 자못 불만스럽다 여겼으나, 자중(子中)은 좋게 여겨 만리에 장쾌한 노닒을 하게 되었으니 소원에 들어맞았음을 매우 기뻐한다 했다.

나는 여기에서 자중의 깊은 도량이 한 번 쓰이고 버림받는 사이에서 기뻐하거나 슬퍼하지 않아서 보통 사람보다 큼을 알게 되었다.

전형(銓衡)의 추택(推擇)과 주상의 발탁해 씀이 어찌 그 봄이 없었겠는가? 대개 위아래가 법을 유지하고 바름을 지켜, 사정에 끌리지 않는 것이 선릉(宣陵) 시절과 같고자 함이다.

자중은 포부가 본디 무거우니 또 즐겨 손순(巽順)히 참으며 말없이 구차히 넘겨서 조정의 선발한 바람을 저버리겠는가? 그 지경이라면 권공이 또한 사람들이 너무 적적하다고 비웃을 것이니, 자중은 힘쓸진저.

지금 이 행차에 있어 상사는 후덕하고 달식하여 족히 유아(儒雅)로서 진무(鎭撫)할 만하며 부사 역시 재능으로 자부하는 처지니, 자중의 풍력과 강개로써 협심하여 서로 도와 사신의 직책의 성공을 꾀한다면 오 나라 계찰(季札)이 주 나라에 간 것과 정(鄭) 나라 자산(子産)이 빙문(聘問)한 것과 시대는 다르나 일만은 똑같이 들어맞을 수 있을 것이니, 위대하지 아니한가? 자중은 힘쓸지어다.

그 행차에 있어 자중이 한 말로 보내줄 것을 요청하기로, 이를 써주며 경계하는 바이다.


*허균

허균(許筠)

1569(선조 2)∼1618(광해군 10).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단보(端甫), 호는 교산(蛟山)·학산(鶴山)·성소(惺所)·백월거사(白月居士). 아버지는 서경덕(徐敬德)의 문인으로서 학자·문장가로 이름이 높았던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엽(曄)이며, 어머니는 후취인 강릉김씨(江陵金氏)로서 예조판서 광철(光轍)의 딸이다. 임진왜란 직전 일본통신사의 서장관으로 일본에 다녀온 성(筬)이 이복형이며, 봉(篈)과 난설헌(蘭雪軒)이 동복형제이다.

5세 때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하여 9세 때 시를 지을 줄 알았다. 12세 때 아버지를 잃고 더욱 시 공부에 전념하였다. 학문은 유성룡(柳成龍)에게 나아가 배웠으며, 시는 삼당시인(三唐詩人)의 하나인 이달(李達)에게 배웠다. 이달은 둘째 형의 친구로서 당시 원주의 손곡리(蓀谷里)에 살고 있었는데, 그에게 시의 묘체를 깨닫게 해주었으며, 인생관과 문학관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뒤 26세 때인 1594년(선조 27)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을과로 급제하고 설서(說書)를 지냈고, 1597년에 문과 중시(重試)에 장원하였다.

이듬해 황해도 도사(都事)가 되었는데, 서울의 기생을 끌어들여 가까이하였다는 탄핵을 받고 여섯달 만에 파직되었다. 뒤에 춘추관기주관(春秋館記注官)·형조정랑을 지내고, 1602년 사예(司藝)·사복시정(司僕寺正)을 역임하였으며, 이해에 원접사 이정구(李廷龜)의 종사관이 되어 활약하였다.

1604년 수안군수(遂安郡守)로 부임하였다가 불교를 믿는다는 탄핵을 받아 또다시 벼슬길에서 물러나왔다.

1606년 명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을 영접하는 종사관이 되어 글재주와 넓은 학식으로 이름을 떨치고, 누이 난설헌의 시를 주지번에게 보여 이를 중국에서 출판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 공로로 삼척부사가 되었으나 여기서도 석달이 못 되어 불상을 모시고 염불과 참선을 한다는 탄핵을 받아 쫓겨났다.

그뒤 공주목사로 다시 기용되어 서류(庶流)들과 가까이 지냈으며, 또다시 파직당한 뒤에는 부안으로 내려가 산천을 유람하며 기생 계생(桂生)을 만났고 천민출신의 시인 유희경(柳希慶)과도 교분을 두터이하였다.

1609년(광해군 1)명나라 책봉사가 왔을 때 이상의(李尙毅)의 종사관이 되었다. 이해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가 되고 이어 형조참의가 되었다. 1610년 전시(殿試)의 시관으로 있으면서 조카와 사위를 합격시켰다는 탄핵을 받아 전라도 함열(咸悅)로 유배되었다.

그뒤 몇 년간은 태인(泰仁)에 은거하였는데, 1613년 계축옥사에 평소 친교가 있던 서류출신의 서양갑(徐羊甲)·심우영(沈友英)이 처형당하자 신변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하여 이이첨(李爾瞻)에게 아부하여 대북(大北)에 참여하였다.

1614년 천추사(千秋使)가 되어 중국에 다녀왔으며, 그 이듬해에는 동지 겸 진주부사(冬至兼陳奏副使)로 중국에 다녀왔다. 이 두 차례의 사행에서 많은 명나라 학자들과 사귀었으며 귀국할 때 《태평광기 太平廣記》를 비롯하여 많은 책을 가지고 왔는데, 그 가운데에는 천주교 기도문과 지도가 섞여 있었다고 한다.

1617년 좌참찬이 되었으며 폐모론을 주장하다가 폐모를 반대하던 영의정 기자헌(奇自獻)과 사이가 벌어지고 기자헌은 길주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그 아들 기준격(奇俊格)이 아버지를 구하기 위하여 허균의 죄상을 폭로하는 상소를 올렸으며, 허균도 상소를 올려 변명하였다.

1618년 8월 남대문에 격문을 붙인 사건이 일어났는데, 허균의 심복 현응민(玄應旻)이 붙였다는 것이 탄로났으며 허균과 기준격을 대질 심문시킨 끝에 역적모의를 하였다 하여 허균은 그의 동료들과 함께 저자거리에서 능지처참을 당하였다.

 당시의 허균에 대한 평가는 총명하고 영발(英發)하여 능히 시를 아는 사람이라 하여 문장과 식견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그 사람됨에 대하여서는 경박하다거나 인륜도덕을 어지럽히고 이단을 좋아하여 행실을 더럽혔다는 등 부정적 평가를 내리고 있다. 그의 생애를 통해볼 때 몇 차례에 걸친 파직의 이유가 대개 그러한 부정적 견해를 뒷받침해 준다.

허균은 국문학사에서는 우리나라 최초의 소설인 〈홍길동전〉을 지은 작가로 인정되고 있다. 한때 그가 지었다는 것에 대하여 이론이 제기되기도 하였으나 그보다 18년 아래인 이식(李植)이 지은 《택당집 澤堂集》의 기록을 뒤엎을만한 근거가 없는 이상, 그를 〈홍길동전〉의 작가로 보아야 할 것이다. 특히, 그의 생애와 그의 논설 〈호민론 豪民論〉에 나타난 이상적인 혁명가상을 연결시켜 볼 때 그 구체적인 형상화가 홍길동으로 나타났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의 문집에 실린 〈관론 官論〉·〈정론 政論〉·〈병론 兵論〉·〈유재론 遺才論〉 등에서 그는 민본사상과 국방정책, 신분계급의 타파 및 인재등용과 붕당배척의 이론을 전개하고 있다. 내정개혁을 주장한 그의 이론은 원시유교사상에 바탕을 둔 것으로 백성들의 복리증진을 정치의 최종목표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허균은 유교집안에서 태어나 유학을 공부한 유가로서 학문의 기본을 유학에 두고 있으나 당시의 이단으로 지목되던 불교·도교에 대하여 사상적으로 깊이 빠져들었다. 특히, 불교에 대해서는 한때 출가하여 중이 되려는 생각도 있었으며 불교의 오묘한 진리를 접하지 않았더라면 한평생을 헛되이 보낼 뻔하였다는 술회를 하기도 하였다.

불교를 믿는다는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파직당하고서도 자기의 신념에는 아무런 흔들림이 없음을 시와 편지글에서 밝히고 있다. 도교사상에 대해서는 주로 그 양생술과 신선사상에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으며, 은둔사상에도 지극한 동경을 나타내었다.

은둔생활의 방법에 대하여 쓴 〈한정록 閑情錄〉이 있어 그의 관심을 보여주고 있다. 허균 자신이 서학(西學)에 대하여 언급한 것은 없으나 몇몇 기록에 의하면, 허균이 중국에 가서 천주교의 기도문을 가지고 온 것을 계기로 하늘을 섬기는 학을 하였다고 하였으니, 이는 곧 그가 새로운 문물과 서학의 이론에 남다른 관심을 보였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처럼 예교(禮敎)에만 얽매어 있던 당시 선비사회에서 보면 이단시할 만큼 허균은 다각문화에 대한 이해를 가졌던 인물이며, 편협한 자기만의 시각에서 벗어나 핍박받는 하층민의 입장에서 정치관과 학문관을 피력해나간 시대의 선각자였다.

 그의 문집 《성소부부고 惺所覆瓿藁》는 자신이 편찬하여 죽기 전에 외손에게 전하였다고 하며, 그 부록에 〈한정록〉이 있다.

그가 스물다섯살 때 쓴 시평론집 《학산초담 鶴山樵談》이 《성소부부고》 가운데 실려 있는 〈성수시화 惺叟詩話〉와 함께 그의 시비평 안목을 보여주는 좋은 자료가 된다. 반대파에 의해서도 인정받은 그의 시에 대한 감식안은 시선집 《국조시산 國朝詩刪》을 통하여 오늘날까지도 평가받고 있다. 《국조시산》에 덧붙여 자신의 가문에서 여섯 사람의 시를 뽑아 모은 《허문세고 許門世藁》가 전한다.

이 밖에 《고시선 古詩選》·《당시선 唐詩選》·《송오가시초 宋五家詩抄》·《명사가시선 明四家詩選》·《사체성당 四體盛唐》 등의 시선집이 있었다고 하나 전하지 않는다. 또, 임진왜란의 모든 사실을 적은 〈동정록 東征錄〉은 《선조실록》 편찬에 가장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고 하는데 역시 전하지 않는다. 전하지 않는 저작으로 〈계축남유초 癸丑南遊草〉·〈을병조천록 乙丙朝天錄〉·〈서변비로고 西邊備虜考〉·〈한년참기 旱年讖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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