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 김시민 장군 신도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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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환 작성일02-05-29 23:44 조회1,624회 댓글0건본문
신도비명(神道碑銘)
괴산(槐山)에 사는 金相聲은 나의 이종(姨從)이라. 어느 날, 한 사적록을 가지고 와서 보이며
하는 말이 [이것은 나의 선조 충무공의 순총한 대절(大節)이 들리고, 들리는 것이 사람을 놀라게
하는데, 신도비(神道碑)에 새긴것이 없어, 그 자손된 자로 하여금, 어찌 답답지 않으랴? 원컨대,
나를 위해 기록하여 주소서] 한데, 내가 자신을 생각해 본 바, 적당한 사람이 못되고, 글도 못함으로
사절하다가 할 수 없이 다음과 같이 지으면서, 삼가 살펴 보니,
공의 이름은 시민(時敏)이요, 자(字)는 면오(勉吾)며, 성(姓)은 김(金)이니, 안동인(安東人)이라.
고려 때, 충렬공 김방경(忠烈公 金方慶)의 十二대손이며 고조의 이름(諱)은 수형(壽亨)이니
장예원 사의(掌隸院 司議)로서, 증 좌승지(贈 左承旨)요, 증조의 이름은 언묵(彦默)이니,
증 이조참판(贈 吏曹參判)이요, 조부의 이름은 석(錫)이니 성균 진사(成均進士)로
증 영의정(贈 領議政)이요, 부(父)의 이름은 충갑(忠甲)이며 호는 귀암(龜巖)이라,
사헌부 지평(司憲府 持平)으로서, 을사사화(乙巳士禍)를 만나, 청주(淸州)로 귀양 갔다가,
다시 안악군수(安岳郡守)를 지내고, 증 좌찬성(贈 左贊成)이요 어머니는 증 정경부인(贈 貞敬夫人)
창평 이씨(昌平李氏)니, 참봉 이성춘(參奉 李成春)의 따님이라(西紀 一五五四年(嘉靖三三 : 甲寅).
八月 二十七日에 충청남도 목천현 백전촌(忠南 木川顯 栢田村)에서 출생하였고, 어려서부터 특이한
자질(資質)을 가졌었다. 8세 때, 동네 아이들을 거느리고, 대오(隊伍)를 지어 길거리에서 전쟁놀이의
진(陣)을 치고 있을 때, 마침 천안(天安)의 원님이 지나가려 하는지라. 이를 본 공이 한 아이를 시켜
못 가게 소리치니, 그 원이 말에서 내려, 공의 손을 잡고 머리를 어루만지고는 마을로 들어가서
그 부친 지평공(持平公)께 치하하며 하는 말이 [진(陣)을 치고 놀이를 하는 것은 지기(志氣)가 보통이
아니고, 관장(官長)을 꾸짖어 말에서 내리게 함은 그 기운이 두려우며, 모양이 웅걸(雄傑)하니 전정이
만리 같다]고 하였다. 또 九세때는, 동내 부근에 큰 내가 있고, 거기에 큰 바위가 있어 소(沼)가
생겼는데, 그 가운데에 큰 뱀의 굴이 있어 때로는 가축이나, 사람이 가까이 갔다가 삼켜 먹히는 일이
있었다. 九세의 공은 그 피해를 없애려고 뽕나무로 활을 만들고, 쑥대로 화살을 만들어 어깨에
뫼고서, 한 아이를 데리고 냇가로 갔다.
공이 여기서 데리고 간 아이에게 [저 바위 위에 올라라]하니, 그 아이가 무서워 하면서 올라가지
못하는지라. 공이 화살을 겨누면서 [죽이겠다]하니, 아이는 바위로 올라가지 않을 수 없었다.
아이가 바위에 올라 서자, 잠시 후에 표풍(飄風)이 홀연히 일드니, 물결이 갈리면서, 과연 큰뱀이
바위돌을 휘감고 이빨을 악물고, 사람을 향해 나왔다. 이 때, 공이 문득 활을 당겨 화살을 날리니
뱀에게 명중(命中)되어 죽고 말았는데 10여일 동안이나, 물에 붉은 핏물이 가시지 않으니, 이 소문을
들은 어른들이 모두 놀라워 했고, 듣는 사람마다 이상히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니 지금도 이
곳을 김공 사사암(金公 射蛇岩)이라 한다.
성장(成長)함에 따라 체격이 특이하게 뛰어났고, 씩씩하고 장대(壯大)하며, 뜻과 도량(度量)이
보통이 아니었고, 항상 호언장담(豪言壯談)으로 사람들을 웃기었다.
선조(宣祖) 무인(戊寅 : 一五七八)에 무과(武科)에 올라, 일찌기 훈련판관(訓練判官)으로서,
병조판서(兵曹判書)에게 의사를 제출한바, 병조판서가 그 말을 듣지 아니하자, 공이 끝내 항의하기를
마지아니하니, 그 병조판서도 감히 성기(聲氣)를 누르지 못하였고, 이내 공은 군모(軍帽)를 벗어
땅에 던지고 발로 짓밟아 부수면서 하는 말이 [대장부가 이것이 아니라면, 어찌 남에게 모욕을 당하랴?]
하고, 그 길로 벼슬을 버리고 돌아오니, 때를 만나지 못하게 낙척(落拓)함을, 그 때 사람들은 그
기이(奇異한 일을 알지 못하였다.
오래된 후에 군기시 판관(軍器寺 判官)이 되었는데, 정승 이헌국(李憲國)이 재기(才器)가
특이(特異)하다고 생각하고, 상감께 고하기를 [외직(外職)으로 보내지 말고, 내부(內部)에 머무르게
하셨다가 급한데로 쓰게 하소서}하였고 정승 정언신(鄭彦信)과, 중봉 조헌(重峰 趙憲)이 추천하는
말이 [적(敵)을 방어하는 재주가 명장 중에서도 상사(上駟)라] 하였다.
그 후 경인(庚寅)년에 진주 판관(晋州判官)이 되니, 진주는 공의 숙부(叔父)인 문숙공
제갑(文肅公 悌甲)이 일찍이 진주 목사(牧使)로서 특별하게 선정(善政)을 베풀은 곳이라, 진주
사람들이 기뻐하면서 하는 말이 [김사군(金使君)의 조카라]하고, 한 고을이 모두 흠앙하였다.
공의 정치는 먹줄같이 곧고, 오르락 내리락 하는 수단이 정당하며, 덕을 베풀어, 위엄있게 행하니,
이속(吏屬)들은 두려워 하고, 백성들은 감복하였다.
선조 二十五년(壬辰 : 一五九二)에 왜(倭)의 관백(關伯) 평수길(平秀吉)이, 그 장수
평수가(平秀家) 등을 보내서, 군사를 거느리고 침범해 오는데, 평행장(平行長)과 평의지(平義智)·
평조신(平調信)등으로 선봉(先鋒)을 삼고 바다를 건너와서 부산(釜山)을 함락 시키니, 바로
四월 十三일이었고, 다음 날 아침에는 동래(東萊)에 들어와서 부사 송상현(府使 宋象賢)을 죽이고,
적병은 승승장구(乘勝長驅)하여 닥치는 데로 불을 지르고, 곡식을 약탈하니, 밀양 부사
박진(密陽府使 朴晋)이 중로(中路)를 끊고자 했으나,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능히 막지 못하였고,
여러 장수들이 모두 흩어져 버렸으니, 그 날카로운 창날을 능히 감당하지 못하였는데, 도체찰사
김수(都體察使 金 )가 말하기를 [진주는 성지(城池)가 견고하지 못하여, 지키기 어렵다]하고
공으로 하여금 우현(牛峴)에 가서 대장 김면(大將 金沔)을 도우라]하였다.
그러나 이때, 목사 김성일(牧使 金誠一)이 공으로 하여금 [돌아가서 진주를 지키라]하였고,
이에 마침, 목사가 전사하니, 인심이 큰 난(大亂)을 만나 크게 흔들리고, 모두가 도망 갈 생각뿐이었다.
바로 이 때, 공이 고을 일을 맡게 되어 영(令)을 내리되, [감히 도망하는 자는 죽이리라]하고,
군기(軍器)를 수리하고, 성지(城池)를 수축하고서, 죽음으로써 지킬 계책을 세웠다.
이 때 상감께서 "순변사 이 일(巡邊使 李鎰)이 상주(尙州)에서 적을 만나 패하고, 신립(申砬)은
충주 의 달천(達川)에서 배수진(背水陣)을 치다가 적세(賊勢)에 몰려 물에 빠져 죽으니,
금탄(金灘)과 한강(漢江) 이남에 인적이 없어지고, 적세는 날로 강해지니 대적하기 어렵다"는
말을 듣고 묘사(廟社)의 신주(神主)를 받들고, 서울을 떠나, 성도(松都)에서 二日間 머물렀으나,
적은 동로(東路)로 해서 서울에 들어오고, 팔도에 있는 여러 고을은 풍문만 듣고 흩어지니 감히
그 적봉(敵鋒)을 막을 자 없었다.
이 때 공이 "대가(大駕)가 이미 서행(西行)하고, 서울이 함락 했다"는 말을 듣고 전패(殿牌)를
대청(大廳)에 모시고, 분향 재배(焚香再拜)하고서 부복 통곡(俯伏慟哭)하고, 한참 동안 눈물을
흘리다가, 이를 갈고, 어깨를 뿜내며 하는 말이 [이 도적을 쳐부수지 못한다면, 나라의 수치를 어떻게
씻을 수 있겠는가? 이 때가 신자(臣子)로서 절의(節義)에 죽을 날 이르다.]하고, 이에 흩어진
향병(鄕兵)을 불러 모으고, 도피한 사람들을 불러 깨닳을 수 있도록 지도하면서, 무기를 수리하고,
성지를 수축하며, 군률(軍律)을 정비(整備)해서 적을 기다리는데, 사천성(泗川城)에 흉적이 가득
차서, 장차 진주 지경에 폭근하게 되었다.
이에 공은 홀로 순국(殉國)할 결심을 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대중(大衆)에게 맹세하고서 드디어
출병하여, 사천과 고성(固城)의 적을 격축(擊逐)하여 대첩(大捷)을 거두고, 다시 진해(鎭海)의 적진을
대파(大破) 함으로써 그 장수 평소태(平小泰)를 사로잡았고, 다시 군사를 거느리고 부산(釜山)으로
가서 적진을 공파(功破)하여 군성(軍聲)을 크게 떨치니, 개령(開寧)과 김산(金山)의 적은 풍문만 듣고,
군사를 거두어 물러 가버렸다.
이 때 행재소(行在所=국왕이 머물고 있는 곳)가 멀리 떨어져 있고, 도로가 많이 막혀서,
승첩(勝牒)이 미쳐 상달되지 못하여, 조정(朝廷)에서도 바른 포훈(褒勳)을 못한것은 통탄(痛歎)하여
마지않는 바이다.
공이 방어(防禦)의 계책을 크게 세우고, 적을 기다리다가, 六일에 과연 적의 대군이 와서 성을
포위하게 되니, 성중의 인원은 천명도 차지 않았다. 적장 평행장(平行長)이 각처에 주둔하고 있는
수백만의 군대를 이끌고 들어와서 十여 주야(晝夜)를 포위하고 있으니 그 중과(衆寡)의 형세는
산(山)으로 알(卵)을 누르는 것과 같았고, 조그마한 후원도 없으니, 공은 다만 충의로서
격려(激勵)하며, 부인과 더불어 친히 술과 고기를 가지고 돌아다니면서 사졸들을 먹이고, 부드러운
모양으로 대접하며, 피리를 불고, 거문고를 울리면서, 무사한 때와 같이 하니, 군사의 마음에는 믿어
두려운 기색이 없고, 제장(諸將)을 독려해서, 기회를 타고 요해지(要害地)를 공격하니 문득 신기함이
나타나고, 여러번 진퇴가 반복(反覆)되니, 적세가 크게 꺾이여서 시체가 산더미 같이 쌓였다. 이 때,
별안간에 우뢰 소리가 크게 울리고, 빗줄기가 쏟아져서 그믐밤 같이 어두워지자, 적은 놀라고,
당황하여 밤을 이용해서 퇴각하였고, 이러한 첩보(捷報)를 상감께서 들으시고, 진주 목사로
임명하였다.
이로 인해서 적의 괴수는 이 패전에 대한 보복을 하려고, 창원(昌原) 부산(釜山) 김해(金海)에 있는
모든 적을 합세시켜, 九월五일에 바로 진주 고을 동쪽에 있는 마현(馬峴)의 북쪽 봉우리에 이르러서,
형세를 두루 살피고는 군사의 칼날을 번쩍이며 달려올 제, 공이 영(令)을 내리되 [보았어도 못 본체
할 것이며, 한 알의 탄환이나, 한 개의 화살도 헛되게 쏘지 말라] 하고, 다만, 성중에 있는 기사(騎士)
五백명으로 하여금 적이 보이는 곳에서 분주하게 쏘다니게 하고, 또 성 안이 통해 보이는 곳에
용대기(龍大旗)를 세우고, 많은 장막(張幕)을 쳐서, 성안에 있는 남녀노약(男女老弱)에게 모두 남자의
의복을 입혀서, 군사가 많은 듯한 모양을 보이게 하고서는, 건장한 자를 뽑아 산에 올려 망을 보게
하니, 적은 수백만이 고을 동쪽에 있는 임연대(臨淵臺) 같은 곳에서 진(陣)을 치고 있었다.
초6일 아침 일찌기 적은 대탄(大灘)에서부터 일시에 기마(騎馬)가 길게 뻗치고, 삼진(三陣)으로
나누어, 일진은 순천당(順天堂)위에 모여서, 성을 내려다 보고, 일진은 봉명루(鳳鳴樓) 앞에
열립(列立)하고, 일진은 바로 순천당 산을 넘어 와서 봉명루의 적으로 하여금 한 진을 만들고서,
순천당에 결진(結陣)한 적의 총수(銃手) 만여명이 성중을 향해 일제히 탄환을 날리니, 그 소리가
우뢰소리와 같고, 휘날리는 우박 소리와 같아서, 수백만이 일제히 소리치니 그 소리에 천지가
진동하였다.
그러나 성중에서는 전연 동요(動搖)함이 없고 적적한 것이 마치 사람이 없는 것 같은지라, 그러다가
적세가 수그러지기를 기다려, 다시 북을 울리고, 고함을 치며 밤이 새도록 엄중한 경계를 하였는데,
적중에 있는 아이들이 성밖을 감고 돌면서 외치는 큰 소리가 [경성(京城)이 이미 함락되고, 팔도가
모두 무너질 뿐 아니라, 진주성도 철통같이 포위했으니, 그 누가 어떻게 지킬 것인가? 속히 항복함만
같지 못하리라. 오늘 저녁에 개산보(介山甫)가 오면, 너희 장수이 두골(頭骨)을 우리 깃대 위에
달 것이다]고 하였다.
이러한 소리를 들은 성 중의 사람들은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큰 소리로 꾸짖고자 하였으나,
공이 "말을 못하게" 하였다.
다음 날은 적이 대나무를 쪼개서 묶기도 하고 엮기도 하여 놓고, 소나무 가지를 많이 모아 진 앞에
높이 쌓고, 또한 삼층의 산대(山臺)를 만들고 있으니, 공의 요량에 솔가지를 많이 쌓는 것은 성을
넘어 올라 오려는 것이오 층대를 만드는 것은 성을 들면서 진압하자는 것이라 하고, 공이 이미
준비해 둔 화구(火具)에 생소나무는 습(濕)하여 태우기 어려움으로 종이에 화약을 싸서, 마른 나무단
속에 넣어 성 밖으로 던지니 능히 나무를 태울 수 있었고, 성 위에는 진천뢰(震天雷)와 질여포(疾黎 )·
큰 돌맹이들을 많이 모아 두어서 성을 공격하려는 적에 대비하고, 또 긴 자루에 달린 도끼와 낫 같은
것을 준비하여 산대를 돌아다니는 적을 무찌르고, 또 여장(女墻=성 안에 낮은 담)안에는 많은
가마솥을 걸고, 물을 끓이어 적에게 퍼부으며, 성 안에 군사를 매복시켜서 서서 보지 못하게 하고,
풀로 허수아비를 많이 만들어서 활을 잡아 당기는 형용으로 성 위에 출몰하게 하며, 군인에게 엄명을
내려, 화살 한개라도 헛되게 못쓰도록 하고, 항상 냇가에서 돌을 주워 던져서, 적으로 하여금 성
가까이 못하게 하였다.
그날 밤 달이 진 후에 적들은 성 밖에 흙을 쌓아 누(壘)를 만들어, 더 높이 층대를 쌓아 올림으로서
많은 군사가 바로 올라 올 계획을 하고 있었으니, 공은 현자총(玄字銃)을 쏘아서 축대 만드는 적을
향해 쏘니, 적이 조금 물러 갔었다.
초八일에 적은 다시 성중을 향해, 포를 쏘는데 종일토록 그치지 아니하였다. 이에 맞서 공은
현자전(玄字箭)을 쏴서 죽편(竹編)을 뚫고 지나가, 다시 목판(木板)을 뚫으면서 적의 가슴에 명중시켜
적을 죽이니, 그 후로는 감히 적이 산대(山臺)를 바라보지 못하였다. 날이 어두워지자 횃불을 들고
부산하게 오가는 모양이 서로 약속이 있는것 같은지라.
그 때 어린아이들이 신북문(新北門) 밖에서 달려 오는데, 바로, 본 고을에서 포로된 자이라,
적의 정세를 물은즉 [내일 새벽에 총력으로 성을 공격한다고 합디다]하고 대답하였다.
초9일 사경초(四更初)에 각 진에 불을 밝히고, 짐을 싣고 나가면서, 퇴각 하는 것 같이 해
보임으로서, 아군(我軍)이 태만한것 같이 하고는 숨어서 돌아왔다.
9일 사경에 적 수십만이 동문신성(東門新城)으로 육박해 오는데, 삼층 가면(三層假面)의 허수아비를
만들어 앞세우고, 차례로 사다리에 기어 올라오고 가마적(騎馬賊) 수백명이 뒤따라 돌진하는데, 방
환(放丸)이 비오듯하고, 고함소리가 우뢰와 같앗다. 왜장은 말을 타고 칼을 휘두르며,
횡행독전(橫行督戰) 하는데, 동문의 북격대(北 隔臺)에서 사사(射士)를 거느리고, 진천뢰(震天雷)와
질여포( 黎 )를 쏘게하고, 혹은 큰 돌을 적에게 퍼부었다. 한편으로 남여노약(男女老弱)들은 돌을
나르고, 불을 던지니, 성안에는 기와장과 이엉이 다 없어졌다.
적이 달군 쇠를 밟고, 화살에 맞고, 돌에 맞아 죽는데, 머리가 타고, 이마가 터진 자 무수하고, 또
진천뢰에 맞아 죽은자가 삼대 같이 흩어져 있었다.
동이 틀 무렵에는 적세가 크게 무너지고, 오전 열시 경에는 완전히 물러가고 말았는데, 이 전투에서
적병의 죽은 자는 부지기수라. 적들이 시체를 여염(閭閻) 집으로 끌고 가고, 맹렬한 불속에서도
장왜(將倭)의 시체는 대나무 상자에 담아 메고 가는데, 참급(斬級 : 머리만 베는 것)의 수도 또한 많았다.
적이 물러간 뒤에, 어염집에는 타버린 뼈가 쌓여 있고, 사로잡았던 사람과 우마(牛馬)를 모두 버리고
달아났으니, 이로써 진주성을 보전할 수 있었고, 또 다만 이 성 뿐이 아니라, 호남(湖南)·호서(湖西)와
내륙의 포구가 완전함을 얻게되어, 국가 중흥에 필요한 군량(軍糧)과 병기(兵器)가 모두 양호(兩湖)에
서 판출(辦出)되었으니, 이는 국운에 다행함이 아니었는가?
본도(本道 : 慶尙道) 감사 김성일(金誠一)이 그날로 장계(狀啓)를 올렸는데, 선조께서 이를 가상히
생각하여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올릴것을 명하고 경상 우도 병마 절도사(慶尙右道兵馬節度使) 겸
진주 목사(晋州牧使)를 제수 하였다.
공이 이렇게 대첩(大捷)을 하던 날 시체를 점검하면서 성을 순회하는데, 왜적 하나가
소골 적시(蘇骨積屍) 속에 숨어 있다가 총을 쏘아서, 공의 왼쪽 이마에 맞아 가마로 관사(官舍)까지
돌아 왔었다.
이 때, 공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앉아 하는 말이 [나의 명은 이미 다 했노라. 적의 탄환을 나의
머리 속에 그대로 둘 수는 없노라] 하여 드디어 나무 못으로 상처를 헤치고, 빼내고, 논상도 있기
전에 운명하였으니, 그해 12월 26일이며, 나이는 三십九세였다.
이 부음(訃音)을 상감께서 들으시고 대단히 슬퍼 하시고, 바로 병조판서의 증직(贈職)을 내렸다.
또 공의 아우 시약(時若)도 일찌기 공을 따라 진주성에 있다가, 이 난을 만났는데 지모(智謀)나
형상이 형제가 흡사해서, 형과 아우의 구분이 어려웠고 이 싸움에서 내조한 공이 적지 않았다.
공이 임종(臨終)에 가만히 부탁하기를 [네가 절대로 발상(發喪)하지 말고 옛과 같이 적과 대치하다가,
후임자를 기다려서 장사하라] 하여 이에 따랐다.
공이 돌아간 다음 해 계사(癸巳)에 군무(軍務)를 넘긴 후에 발상하니, 성중이 사녀(士女)가 곡성이
우뢰 같고, 이 소문을 들은 호남의 사녀들도 모두 눈물을 흘리면서 [우리 공이 아니었더라면,
우리가 죽은지 오래다] 하였다.
계사년에는 진주성이 참패를 하였는데, 이는 대개 풍신수길(豊臣秀吉)이 전일의 진주성 참패가
분해서 부하 제장으로 하여금 [돌아오는 길에 힘을모아 진주성을 전멸시킨 후에 강화(講和)에 임하라]
고 하였다. 또 [우리의 장관(將官)으로 죽은 자 五백명이요, 우리 군병으로서 죽은 자, 수십만으로
계산되는 것은 고금(古今)에 없었던 참패였다.]고 말한 까닭이며, 이로서 공이 임진왜란에 크게 이긴
것을 증거할 수 있으나, 마침 이 때에 본도(本道)가 다 흩어져서, 상황을 보고 아는 사람이 없었고,
행재(行在)가 멀어서 통신이 끊어졌으니, 조정까지 상달되지 못해서, 그 실적을 알지 못하였다.
또 [충렬의 공(忠烈之功)을 이정암(李廷 )의 연안(延安)의 전적과 같이 비등하게 말하는 것은
정론(正論)이 아니라] 한 것은 백사 이상공(白沙 李相公)의 말이오, 하담 김상서(荷潭 金尙書)의
말은 [임진의 삼대첩(三大捷)은 이 통제(李統制)의 노량(露梁)과, 권원수(權元帥)의 행주(幸州)와
김절도(金節度)의 진주(晋州)인데, 그 공적이 모두 사람의 이목(耳目)에 혁혁하여, 당시에 제공들의
말이 혹은 "모두 동등하다"고도 하고, 혹은 "진주가 더하다" 고도 하니, 공의 위열(偉烈)을 가히 알
수 있겠다] 고 하였다.
난이 있은 지, 십三년만인 을사(乙巳)년에 조정에서 훈공(勳功)을 책정할 때 증 효충 장의 협력
선무공신(贈 忠 仗義 協力 宣武功臣)에 상락군(上洛君)을 봉하고, 또 그 후에 의정부
영의정(議政府 領議政)과 부원군(府院君)을 추증(追贈) 하였다.
공이 진주 판관에서 시작해서, 외로운 성(孤城)을 지키면서, 대적(大敵)을 물리치고 영남(嶺南)을
온전히 하였으니, 그 신모비계(神謨秘計)와, 풍운변환(風雲變幻)의 술법이 아니었다면, 어찌 그
날카로운 적의 칼날을 당해냈으리요? 다행함이었도다!! 하늘이 만약에 이러한 사람을 낳지
아니했더라면 사람이 어찌 군신(君臣)의 직분을 알았으며, 순충(殉忠)의 혼은 만세(萬世) 동안에
누가 알 것인가? 사기(史記)를 가히 믿을것 같으면, 그 사실을 반드시 대서특필(大書特筆)로
{임진왜란에 두드러진 공을 세운 분은 김 절도사(金節度使)뿐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당시에 승전의 실적을 오히려 자세히 아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은 통탄할 뿐이다.
일본 역사를 살펴 보면, 다만 진주에서 대패(大敗)함만 실려 있고, 그 외에는 패전의 말이 보이지
아니한다. 이를 보더라도, 그 위열외훈(偉烈巍勳)을 그 누구에게 비교하리오, 다만 김학봉
성일(金鶴峯誠一)의 장계(狀啓)와 진주지(晋州誌)에 있는 적을 친 사실 및 백사 이항복(白沙 李恒福),
하담 김시양(荷潭 金時讓) 같은 여러분의 기록과, 진사 성여신(進士 成汝信)이 지은
전성 각적비(全城却敵碑) 녹천 이유(鹿川 李濡)의 시장(諡狀)에 가장 요점만 따서 기록 되어 있다.
배위(配位)는 증 정경부인 부여 서씨(贈 貞敬夫人 扶餘徐氏)니, 부사과(副司果) 응문(應文)의
따님으로 무육(無育) 하여, 백형(伯兄) 부평부사 시회(富平府使 時晦)의 제四남 경상감사
치(慶尙監司 緻)로서 후사(後嗣)하여, 일남을 낳으니 안풍군 득신(安豊君 得臣)이라.
안풍군이 삼남을 낳으니 장자 천주(天柱)는 화은군(花恩君)이요. 차자·천정(天挺)은
증 이조 참판(贈 吏曹參判)이며, 삼자 천규(天揆)는 통덕랑(通德郞)이라, 나머지는 다 기록하지
못하고 명(銘)하나니,
어려서 진터놀이, 원님 통과 불허하고 (幼作陣戱 不容 過)
인축(人畜) 해친 큰 배암을, 쑥대활로 쏴 죽이니 (洞有 害 蓬矢射蛇)
큰 절개 그의리(義利)는 잠시도 잊지 않아 (日節與義 不可乍去)
온 나라가 놀랜것은, 임진년의 대적(大賊)이라 (擧國有驚 壬辰賊巨)
승세(勝勢)라고 방화약탈, 대적하기 어렵도다. (乘勝焚掠 衆寡難敵)
이 때에 우리 공은, 진주판관(晋州判官) 되시어서 (公於是時 適判晋州)
분하고 한탄하며, 주야로 계략(計略) 하되 (憤 計劃 朝暮不休)
적을 만약 불거(不拒)하면, 국치(國恥) 어찌 씻을손가(賊若不拒 國恥何雪)
격축(擊逐)을 감행할제, 사절(死節)을 맹세하고 (載擊載逐誓以死節)
성지(城地) 수리 무기수선, 군사 기율(紀律) 정비하고 (繕修城機 整備軍律)
몸소 주육(酒肉)들고 돌며, 사졸(士卒)을 대접하고 (親持午酒 巡餉士卒)
거문고 피리소리, 군정(軍情)을 편히하니 (吹笛鳴琴 以安軍情)
계략이 신기하고, 몇번 군성(軍聲) 떨쳤던가 (出計神奇 屢振軍聲)
대포는 질여포( 黎 )요, 폭뢰(爆雷)는 진천(震天)이라 ( 是 黎 雷昌震天)
현자총(玄字銃) 바로 쏴서, 적의 가슴 꽤뚫었네 (有銃玄字 貫賊胞顚)
싸움마다 승리하니, 호남 호서(湖南 湖西) 안전하고 (累戰累捷 兩湖賴完)
전공(戰功)으로 승진하여, 절도사(節度使)가 되셨으니 (隨捷陞秩 至於節度)
우리나라 기록에는 三대첩(三大捷)의 하나이오 (我國有記 三大捷 )
왜사(倭史)의 기록에도, 진주패전(晋州敗戰) 뿐이로다 (倭史之載 只擧晋敗)
왜병 하나 거짓죽음, 시체 밑에 엎드렸다 (一倭佯死 潛伏屍襄)
쏘는 탄환 명중하여, 위국순충(爲國殉忠) 하셨도다. (妨丸被中 殉忠乃巳)
선조대왕(宣祖大王) 가상(嘉賞) 하사, 가진 포상 다하시니 (宣廟嘉之 降褒具)
영의정(領議政)은 증직이요, 충무공(忠武公)은 시호로다(贈政領議 謚曰忠武)
안동 권용직(安東 權容稷) 삼가 짓고
안동 김사달(安東 金思達) 삼가 씀
▣ 김태서 - 감사합니다.
▣ 김주회 - 감사합니다. 이 긴 문장을 언제 타이핑하셨나요?
▣ 김항용 -
▣ 김발용 - 제 손이 아파오는 느낌입니다
▣ 김재원 - 감사 합니다. 잘읽었습니다.
▣ 김태영 - 대부님, 감사합니다.
괴산(槐山)에 사는 金相聲은 나의 이종(姨從)이라. 어느 날, 한 사적록을 가지고 와서 보이며
하는 말이 [이것은 나의 선조 충무공의 순총한 대절(大節)이 들리고, 들리는 것이 사람을 놀라게
하는데, 신도비(神道碑)에 새긴것이 없어, 그 자손된 자로 하여금, 어찌 답답지 않으랴? 원컨대,
나를 위해 기록하여 주소서] 한데, 내가 자신을 생각해 본 바, 적당한 사람이 못되고, 글도 못함으로
사절하다가 할 수 없이 다음과 같이 지으면서, 삼가 살펴 보니,
공의 이름은 시민(時敏)이요, 자(字)는 면오(勉吾)며, 성(姓)은 김(金)이니, 안동인(安東人)이라.
고려 때, 충렬공 김방경(忠烈公 金方慶)의 十二대손이며 고조의 이름(諱)은 수형(壽亨)이니
장예원 사의(掌隸院 司議)로서, 증 좌승지(贈 左承旨)요, 증조의 이름은 언묵(彦默)이니,
증 이조참판(贈 吏曹參判)이요, 조부의 이름은 석(錫)이니 성균 진사(成均進士)로
증 영의정(贈 領議政)이요, 부(父)의 이름은 충갑(忠甲)이며 호는 귀암(龜巖)이라,
사헌부 지평(司憲府 持平)으로서, 을사사화(乙巳士禍)를 만나, 청주(淸州)로 귀양 갔다가,
다시 안악군수(安岳郡守)를 지내고, 증 좌찬성(贈 左贊成)이요 어머니는 증 정경부인(贈 貞敬夫人)
창평 이씨(昌平李氏)니, 참봉 이성춘(參奉 李成春)의 따님이라(西紀 一五五四年(嘉靖三三 : 甲寅).
八月 二十七日에 충청남도 목천현 백전촌(忠南 木川顯 栢田村)에서 출생하였고, 어려서부터 특이한
자질(資質)을 가졌었다. 8세 때, 동네 아이들을 거느리고, 대오(隊伍)를 지어 길거리에서 전쟁놀이의
진(陣)을 치고 있을 때, 마침 천안(天安)의 원님이 지나가려 하는지라. 이를 본 공이 한 아이를 시켜
못 가게 소리치니, 그 원이 말에서 내려, 공의 손을 잡고 머리를 어루만지고는 마을로 들어가서
그 부친 지평공(持平公)께 치하하며 하는 말이 [진(陣)을 치고 놀이를 하는 것은 지기(志氣)가 보통이
아니고, 관장(官長)을 꾸짖어 말에서 내리게 함은 그 기운이 두려우며, 모양이 웅걸(雄傑)하니 전정이
만리 같다]고 하였다. 또 九세때는, 동내 부근에 큰 내가 있고, 거기에 큰 바위가 있어 소(沼)가
생겼는데, 그 가운데에 큰 뱀의 굴이 있어 때로는 가축이나, 사람이 가까이 갔다가 삼켜 먹히는 일이
있었다. 九세의 공은 그 피해를 없애려고 뽕나무로 활을 만들고, 쑥대로 화살을 만들어 어깨에
뫼고서, 한 아이를 데리고 냇가로 갔다.
공이 여기서 데리고 간 아이에게 [저 바위 위에 올라라]하니, 그 아이가 무서워 하면서 올라가지
못하는지라. 공이 화살을 겨누면서 [죽이겠다]하니, 아이는 바위로 올라가지 않을 수 없었다.
아이가 바위에 올라 서자, 잠시 후에 표풍(飄風)이 홀연히 일드니, 물결이 갈리면서, 과연 큰뱀이
바위돌을 휘감고 이빨을 악물고, 사람을 향해 나왔다. 이 때, 공이 문득 활을 당겨 화살을 날리니
뱀에게 명중(命中)되어 죽고 말았는데 10여일 동안이나, 물에 붉은 핏물이 가시지 않으니, 이 소문을
들은 어른들이 모두 놀라워 했고, 듣는 사람마다 이상히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니 지금도 이
곳을 김공 사사암(金公 射蛇岩)이라 한다.
성장(成長)함에 따라 체격이 특이하게 뛰어났고, 씩씩하고 장대(壯大)하며, 뜻과 도량(度量)이
보통이 아니었고, 항상 호언장담(豪言壯談)으로 사람들을 웃기었다.
선조(宣祖) 무인(戊寅 : 一五七八)에 무과(武科)에 올라, 일찌기 훈련판관(訓練判官)으로서,
병조판서(兵曹判書)에게 의사를 제출한바, 병조판서가 그 말을 듣지 아니하자, 공이 끝내 항의하기를
마지아니하니, 그 병조판서도 감히 성기(聲氣)를 누르지 못하였고, 이내 공은 군모(軍帽)를 벗어
땅에 던지고 발로 짓밟아 부수면서 하는 말이 [대장부가 이것이 아니라면, 어찌 남에게 모욕을 당하랴?]
하고, 그 길로 벼슬을 버리고 돌아오니, 때를 만나지 못하게 낙척(落拓)함을, 그 때 사람들은 그
기이(奇異한 일을 알지 못하였다.
오래된 후에 군기시 판관(軍器寺 判官)이 되었는데, 정승 이헌국(李憲國)이 재기(才器)가
특이(特異)하다고 생각하고, 상감께 고하기를 [외직(外職)으로 보내지 말고, 내부(內部)에 머무르게
하셨다가 급한데로 쓰게 하소서}하였고 정승 정언신(鄭彦信)과, 중봉 조헌(重峰 趙憲)이 추천하는
말이 [적(敵)을 방어하는 재주가 명장 중에서도 상사(上駟)라] 하였다.
그 후 경인(庚寅)년에 진주 판관(晋州判官)이 되니, 진주는 공의 숙부(叔父)인 문숙공
제갑(文肅公 悌甲)이 일찍이 진주 목사(牧使)로서 특별하게 선정(善政)을 베풀은 곳이라, 진주
사람들이 기뻐하면서 하는 말이 [김사군(金使君)의 조카라]하고, 한 고을이 모두 흠앙하였다.
공의 정치는 먹줄같이 곧고, 오르락 내리락 하는 수단이 정당하며, 덕을 베풀어, 위엄있게 행하니,
이속(吏屬)들은 두려워 하고, 백성들은 감복하였다.
선조 二十五년(壬辰 : 一五九二)에 왜(倭)의 관백(關伯) 평수길(平秀吉)이, 그 장수
평수가(平秀家) 등을 보내서, 군사를 거느리고 침범해 오는데, 평행장(平行長)과 평의지(平義智)·
평조신(平調信)등으로 선봉(先鋒)을 삼고 바다를 건너와서 부산(釜山)을 함락 시키니, 바로
四월 十三일이었고, 다음 날 아침에는 동래(東萊)에 들어와서 부사 송상현(府使 宋象賢)을 죽이고,
적병은 승승장구(乘勝長驅)하여 닥치는 데로 불을 지르고, 곡식을 약탈하니, 밀양 부사
박진(密陽府使 朴晋)이 중로(中路)를 끊고자 했으나,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능히 막지 못하였고,
여러 장수들이 모두 흩어져 버렸으니, 그 날카로운 창날을 능히 감당하지 못하였는데, 도체찰사
김수(都體察使 金 )가 말하기를 [진주는 성지(城池)가 견고하지 못하여, 지키기 어렵다]하고
공으로 하여금 우현(牛峴)에 가서 대장 김면(大將 金沔)을 도우라]하였다.
그러나 이때, 목사 김성일(牧使 金誠一)이 공으로 하여금 [돌아가서 진주를 지키라]하였고,
이에 마침, 목사가 전사하니, 인심이 큰 난(大亂)을 만나 크게 흔들리고, 모두가 도망 갈 생각뿐이었다.
바로 이 때, 공이 고을 일을 맡게 되어 영(令)을 내리되, [감히 도망하는 자는 죽이리라]하고,
군기(軍器)를 수리하고, 성지(城池)를 수축하고서, 죽음으로써 지킬 계책을 세웠다.
이 때 상감께서 "순변사 이 일(巡邊使 李鎰)이 상주(尙州)에서 적을 만나 패하고, 신립(申砬)은
충주 의 달천(達川)에서 배수진(背水陣)을 치다가 적세(賊勢)에 몰려 물에 빠져 죽으니,
금탄(金灘)과 한강(漢江) 이남에 인적이 없어지고, 적세는 날로 강해지니 대적하기 어렵다"는
말을 듣고 묘사(廟社)의 신주(神主)를 받들고, 서울을 떠나, 성도(松都)에서 二日間 머물렀으나,
적은 동로(東路)로 해서 서울에 들어오고, 팔도에 있는 여러 고을은 풍문만 듣고 흩어지니 감히
그 적봉(敵鋒)을 막을 자 없었다.
이 때 공이 "대가(大駕)가 이미 서행(西行)하고, 서울이 함락 했다"는 말을 듣고 전패(殿牌)를
대청(大廳)에 모시고, 분향 재배(焚香再拜)하고서 부복 통곡(俯伏慟哭)하고, 한참 동안 눈물을
흘리다가, 이를 갈고, 어깨를 뿜내며 하는 말이 [이 도적을 쳐부수지 못한다면, 나라의 수치를 어떻게
씻을 수 있겠는가? 이 때가 신자(臣子)로서 절의(節義)에 죽을 날 이르다.]하고, 이에 흩어진
향병(鄕兵)을 불러 모으고, 도피한 사람들을 불러 깨닳을 수 있도록 지도하면서, 무기를 수리하고,
성지를 수축하며, 군률(軍律)을 정비(整備)해서 적을 기다리는데, 사천성(泗川城)에 흉적이 가득
차서, 장차 진주 지경에 폭근하게 되었다.
이에 공은 홀로 순국(殉國)할 결심을 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대중(大衆)에게 맹세하고서 드디어
출병하여, 사천과 고성(固城)의 적을 격축(擊逐)하여 대첩(大捷)을 거두고, 다시 진해(鎭海)의 적진을
대파(大破) 함으로써 그 장수 평소태(平小泰)를 사로잡았고, 다시 군사를 거느리고 부산(釜山)으로
가서 적진을 공파(功破)하여 군성(軍聲)을 크게 떨치니, 개령(開寧)과 김산(金山)의 적은 풍문만 듣고,
군사를 거두어 물러 가버렸다.
이 때 행재소(行在所=국왕이 머물고 있는 곳)가 멀리 떨어져 있고, 도로가 많이 막혀서,
승첩(勝牒)이 미쳐 상달되지 못하여, 조정(朝廷)에서도 바른 포훈(褒勳)을 못한것은 통탄(痛歎)하여
마지않는 바이다.
공이 방어(防禦)의 계책을 크게 세우고, 적을 기다리다가, 六일에 과연 적의 대군이 와서 성을
포위하게 되니, 성중의 인원은 천명도 차지 않았다. 적장 평행장(平行長)이 각처에 주둔하고 있는
수백만의 군대를 이끌고 들어와서 十여 주야(晝夜)를 포위하고 있으니 그 중과(衆寡)의 형세는
산(山)으로 알(卵)을 누르는 것과 같았고, 조그마한 후원도 없으니, 공은 다만 충의로서
격려(激勵)하며, 부인과 더불어 친히 술과 고기를 가지고 돌아다니면서 사졸들을 먹이고, 부드러운
모양으로 대접하며, 피리를 불고, 거문고를 울리면서, 무사한 때와 같이 하니, 군사의 마음에는 믿어
두려운 기색이 없고, 제장(諸將)을 독려해서, 기회를 타고 요해지(要害地)를 공격하니 문득 신기함이
나타나고, 여러번 진퇴가 반복(反覆)되니, 적세가 크게 꺾이여서 시체가 산더미 같이 쌓였다. 이 때,
별안간에 우뢰 소리가 크게 울리고, 빗줄기가 쏟아져서 그믐밤 같이 어두워지자, 적은 놀라고,
당황하여 밤을 이용해서 퇴각하였고, 이러한 첩보(捷報)를 상감께서 들으시고, 진주 목사로
임명하였다.
이로 인해서 적의 괴수는 이 패전에 대한 보복을 하려고, 창원(昌原) 부산(釜山) 김해(金海)에 있는
모든 적을 합세시켜, 九월五일에 바로 진주 고을 동쪽에 있는 마현(馬峴)의 북쪽 봉우리에 이르러서,
형세를 두루 살피고는 군사의 칼날을 번쩍이며 달려올 제, 공이 영(令)을 내리되 [보았어도 못 본체
할 것이며, 한 알의 탄환이나, 한 개의 화살도 헛되게 쏘지 말라] 하고, 다만, 성중에 있는 기사(騎士)
五백명으로 하여금 적이 보이는 곳에서 분주하게 쏘다니게 하고, 또 성 안이 통해 보이는 곳에
용대기(龍大旗)를 세우고, 많은 장막(張幕)을 쳐서, 성안에 있는 남녀노약(男女老弱)에게 모두 남자의
의복을 입혀서, 군사가 많은 듯한 모양을 보이게 하고서는, 건장한 자를 뽑아 산에 올려 망을 보게
하니, 적은 수백만이 고을 동쪽에 있는 임연대(臨淵臺) 같은 곳에서 진(陣)을 치고 있었다.
초6일 아침 일찌기 적은 대탄(大灘)에서부터 일시에 기마(騎馬)가 길게 뻗치고, 삼진(三陣)으로
나누어, 일진은 순천당(順天堂)위에 모여서, 성을 내려다 보고, 일진은 봉명루(鳳鳴樓) 앞에
열립(列立)하고, 일진은 바로 순천당 산을 넘어 와서 봉명루의 적으로 하여금 한 진을 만들고서,
순천당에 결진(結陣)한 적의 총수(銃手) 만여명이 성중을 향해 일제히 탄환을 날리니, 그 소리가
우뢰소리와 같고, 휘날리는 우박 소리와 같아서, 수백만이 일제히 소리치니 그 소리에 천지가
진동하였다.
그러나 성중에서는 전연 동요(動搖)함이 없고 적적한 것이 마치 사람이 없는 것 같은지라, 그러다가
적세가 수그러지기를 기다려, 다시 북을 울리고, 고함을 치며 밤이 새도록 엄중한 경계를 하였는데,
적중에 있는 아이들이 성밖을 감고 돌면서 외치는 큰 소리가 [경성(京城)이 이미 함락되고, 팔도가
모두 무너질 뿐 아니라, 진주성도 철통같이 포위했으니, 그 누가 어떻게 지킬 것인가? 속히 항복함만
같지 못하리라. 오늘 저녁에 개산보(介山甫)가 오면, 너희 장수이 두골(頭骨)을 우리 깃대 위에
달 것이다]고 하였다.
이러한 소리를 들은 성 중의 사람들은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큰 소리로 꾸짖고자 하였으나,
공이 "말을 못하게" 하였다.
다음 날은 적이 대나무를 쪼개서 묶기도 하고 엮기도 하여 놓고, 소나무 가지를 많이 모아 진 앞에
높이 쌓고, 또한 삼층의 산대(山臺)를 만들고 있으니, 공의 요량에 솔가지를 많이 쌓는 것은 성을
넘어 올라 오려는 것이오 층대를 만드는 것은 성을 들면서 진압하자는 것이라 하고, 공이 이미
준비해 둔 화구(火具)에 생소나무는 습(濕)하여 태우기 어려움으로 종이에 화약을 싸서, 마른 나무단
속에 넣어 성 밖으로 던지니 능히 나무를 태울 수 있었고, 성 위에는 진천뢰(震天雷)와 질여포(疾黎 )·
큰 돌맹이들을 많이 모아 두어서 성을 공격하려는 적에 대비하고, 또 긴 자루에 달린 도끼와 낫 같은
것을 준비하여 산대를 돌아다니는 적을 무찌르고, 또 여장(女墻=성 안에 낮은 담)안에는 많은
가마솥을 걸고, 물을 끓이어 적에게 퍼부으며, 성 안에 군사를 매복시켜서 서서 보지 못하게 하고,
풀로 허수아비를 많이 만들어서 활을 잡아 당기는 형용으로 성 위에 출몰하게 하며, 군인에게 엄명을
내려, 화살 한개라도 헛되게 못쓰도록 하고, 항상 냇가에서 돌을 주워 던져서, 적으로 하여금 성
가까이 못하게 하였다.
그날 밤 달이 진 후에 적들은 성 밖에 흙을 쌓아 누(壘)를 만들어, 더 높이 층대를 쌓아 올림으로서
많은 군사가 바로 올라 올 계획을 하고 있었으니, 공은 현자총(玄字銃)을 쏘아서 축대 만드는 적을
향해 쏘니, 적이 조금 물러 갔었다.
초八일에 적은 다시 성중을 향해, 포를 쏘는데 종일토록 그치지 아니하였다. 이에 맞서 공은
현자전(玄字箭)을 쏴서 죽편(竹編)을 뚫고 지나가, 다시 목판(木板)을 뚫으면서 적의 가슴에 명중시켜
적을 죽이니, 그 후로는 감히 적이 산대(山臺)를 바라보지 못하였다. 날이 어두워지자 횃불을 들고
부산하게 오가는 모양이 서로 약속이 있는것 같은지라.
그 때 어린아이들이 신북문(新北門) 밖에서 달려 오는데, 바로, 본 고을에서 포로된 자이라,
적의 정세를 물은즉 [내일 새벽에 총력으로 성을 공격한다고 합디다]하고 대답하였다.
초9일 사경초(四更初)에 각 진에 불을 밝히고, 짐을 싣고 나가면서, 퇴각 하는 것 같이 해
보임으로서, 아군(我軍)이 태만한것 같이 하고는 숨어서 돌아왔다.
9일 사경에 적 수십만이 동문신성(東門新城)으로 육박해 오는데, 삼층 가면(三層假面)의 허수아비를
만들어 앞세우고, 차례로 사다리에 기어 올라오고 가마적(騎馬賊) 수백명이 뒤따라 돌진하는데, 방
환(放丸)이 비오듯하고, 고함소리가 우뢰와 같앗다. 왜장은 말을 타고 칼을 휘두르며,
횡행독전(橫行督戰) 하는데, 동문의 북격대(北 隔臺)에서 사사(射士)를 거느리고, 진천뢰(震天雷)와
질여포( 黎 )를 쏘게하고, 혹은 큰 돌을 적에게 퍼부었다. 한편으로 남여노약(男女老弱)들은 돌을
나르고, 불을 던지니, 성안에는 기와장과 이엉이 다 없어졌다.
적이 달군 쇠를 밟고, 화살에 맞고, 돌에 맞아 죽는데, 머리가 타고, 이마가 터진 자 무수하고, 또
진천뢰에 맞아 죽은자가 삼대 같이 흩어져 있었다.
동이 틀 무렵에는 적세가 크게 무너지고, 오전 열시 경에는 완전히 물러가고 말았는데, 이 전투에서
적병의 죽은 자는 부지기수라. 적들이 시체를 여염(閭閻) 집으로 끌고 가고, 맹렬한 불속에서도
장왜(將倭)의 시체는 대나무 상자에 담아 메고 가는데, 참급(斬級 : 머리만 베는 것)의 수도 또한 많았다.
적이 물러간 뒤에, 어염집에는 타버린 뼈가 쌓여 있고, 사로잡았던 사람과 우마(牛馬)를 모두 버리고
달아났으니, 이로써 진주성을 보전할 수 있었고, 또 다만 이 성 뿐이 아니라, 호남(湖南)·호서(湖西)와
내륙의 포구가 완전함을 얻게되어, 국가 중흥에 필요한 군량(軍糧)과 병기(兵器)가 모두 양호(兩湖)에
서 판출(辦出)되었으니, 이는 국운에 다행함이 아니었는가?
본도(本道 : 慶尙道) 감사 김성일(金誠一)이 그날로 장계(狀啓)를 올렸는데, 선조께서 이를 가상히
생각하여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올릴것을 명하고 경상 우도 병마 절도사(慶尙右道兵馬節度使) 겸
진주 목사(晋州牧使)를 제수 하였다.
공이 이렇게 대첩(大捷)을 하던 날 시체를 점검하면서 성을 순회하는데, 왜적 하나가
소골 적시(蘇骨積屍) 속에 숨어 있다가 총을 쏘아서, 공의 왼쪽 이마에 맞아 가마로 관사(官舍)까지
돌아 왔었다.
이 때, 공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앉아 하는 말이 [나의 명은 이미 다 했노라. 적의 탄환을 나의
머리 속에 그대로 둘 수는 없노라] 하여 드디어 나무 못으로 상처를 헤치고, 빼내고, 논상도 있기
전에 운명하였으니, 그해 12월 26일이며, 나이는 三십九세였다.
이 부음(訃音)을 상감께서 들으시고 대단히 슬퍼 하시고, 바로 병조판서의 증직(贈職)을 내렸다.
또 공의 아우 시약(時若)도 일찌기 공을 따라 진주성에 있다가, 이 난을 만났는데 지모(智謀)나
형상이 형제가 흡사해서, 형과 아우의 구분이 어려웠고 이 싸움에서 내조한 공이 적지 않았다.
공이 임종(臨終)에 가만히 부탁하기를 [네가 절대로 발상(發喪)하지 말고 옛과 같이 적과 대치하다가,
후임자를 기다려서 장사하라] 하여 이에 따랐다.
공이 돌아간 다음 해 계사(癸巳)에 군무(軍務)를 넘긴 후에 발상하니, 성중이 사녀(士女)가 곡성이
우뢰 같고, 이 소문을 들은 호남의 사녀들도 모두 눈물을 흘리면서 [우리 공이 아니었더라면,
우리가 죽은지 오래다] 하였다.
계사년에는 진주성이 참패를 하였는데, 이는 대개 풍신수길(豊臣秀吉)이 전일의 진주성 참패가
분해서 부하 제장으로 하여금 [돌아오는 길에 힘을모아 진주성을 전멸시킨 후에 강화(講和)에 임하라]
고 하였다. 또 [우리의 장관(將官)으로 죽은 자 五백명이요, 우리 군병으로서 죽은 자, 수십만으로
계산되는 것은 고금(古今)에 없었던 참패였다.]고 말한 까닭이며, 이로서 공이 임진왜란에 크게 이긴
것을 증거할 수 있으나, 마침 이 때에 본도(本道)가 다 흩어져서, 상황을 보고 아는 사람이 없었고,
행재(行在)가 멀어서 통신이 끊어졌으니, 조정까지 상달되지 못해서, 그 실적을 알지 못하였다.
또 [충렬의 공(忠烈之功)을 이정암(李廷 )의 연안(延安)의 전적과 같이 비등하게 말하는 것은
정론(正論)이 아니라] 한 것은 백사 이상공(白沙 李相公)의 말이오, 하담 김상서(荷潭 金尙書)의
말은 [임진의 삼대첩(三大捷)은 이 통제(李統制)의 노량(露梁)과, 권원수(權元帥)의 행주(幸州)와
김절도(金節度)의 진주(晋州)인데, 그 공적이 모두 사람의 이목(耳目)에 혁혁하여, 당시에 제공들의
말이 혹은 "모두 동등하다"고도 하고, 혹은 "진주가 더하다" 고도 하니, 공의 위열(偉烈)을 가히 알
수 있겠다] 고 하였다.
난이 있은 지, 십三년만인 을사(乙巳)년에 조정에서 훈공(勳功)을 책정할 때 증 효충 장의 협력
선무공신(贈 忠 仗義 協力 宣武功臣)에 상락군(上洛君)을 봉하고, 또 그 후에 의정부
영의정(議政府 領議政)과 부원군(府院君)을 추증(追贈) 하였다.
공이 진주 판관에서 시작해서, 외로운 성(孤城)을 지키면서, 대적(大敵)을 물리치고 영남(嶺南)을
온전히 하였으니, 그 신모비계(神謨秘計)와, 풍운변환(風雲變幻)의 술법이 아니었다면, 어찌 그
날카로운 적의 칼날을 당해냈으리요? 다행함이었도다!! 하늘이 만약에 이러한 사람을 낳지
아니했더라면 사람이 어찌 군신(君臣)의 직분을 알았으며, 순충(殉忠)의 혼은 만세(萬世) 동안에
누가 알 것인가? 사기(史記)를 가히 믿을것 같으면, 그 사실을 반드시 대서특필(大書特筆)로
{임진왜란에 두드러진 공을 세운 분은 김 절도사(金節度使)뿐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당시에 승전의 실적을 오히려 자세히 아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은 통탄할 뿐이다.
일본 역사를 살펴 보면, 다만 진주에서 대패(大敗)함만 실려 있고, 그 외에는 패전의 말이 보이지
아니한다. 이를 보더라도, 그 위열외훈(偉烈巍勳)을 그 누구에게 비교하리오, 다만 김학봉
성일(金鶴峯誠一)의 장계(狀啓)와 진주지(晋州誌)에 있는 적을 친 사실 및 백사 이항복(白沙 李恒福),
하담 김시양(荷潭 金時讓) 같은 여러분의 기록과, 진사 성여신(進士 成汝信)이 지은
전성 각적비(全城却敵碑) 녹천 이유(鹿川 李濡)의 시장(諡狀)에 가장 요점만 따서 기록 되어 있다.
배위(配位)는 증 정경부인 부여 서씨(贈 貞敬夫人 扶餘徐氏)니, 부사과(副司果) 응문(應文)의
따님으로 무육(無育) 하여, 백형(伯兄) 부평부사 시회(富平府使 時晦)의 제四남 경상감사
치(慶尙監司 緻)로서 후사(後嗣)하여, 일남을 낳으니 안풍군 득신(安豊君 得臣)이라.
안풍군이 삼남을 낳으니 장자 천주(天柱)는 화은군(花恩君)이요. 차자·천정(天挺)은
증 이조 참판(贈 吏曹參判)이며, 삼자 천규(天揆)는 통덕랑(通德郞)이라, 나머지는 다 기록하지
못하고 명(銘)하나니,
어려서 진터놀이, 원님 통과 불허하고 (幼作陣戱 不容 過)
인축(人畜) 해친 큰 배암을, 쑥대활로 쏴 죽이니 (洞有 害 蓬矢射蛇)
큰 절개 그의리(義利)는 잠시도 잊지 않아 (日節與義 不可乍去)
온 나라가 놀랜것은, 임진년의 대적(大賊)이라 (擧國有驚 壬辰賊巨)
승세(勝勢)라고 방화약탈, 대적하기 어렵도다. (乘勝焚掠 衆寡難敵)
이 때에 우리 공은, 진주판관(晋州判官) 되시어서 (公於是時 適判晋州)
분하고 한탄하며, 주야로 계략(計略) 하되 (憤 計劃 朝暮不休)
적을 만약 불거(不拒)하면, 국치(國恥) 어찌 씻을손가(賊若不拒 國恥何雪)
격축(擊逐)을 감행할제, 사절(死節)을 맹세하고 (載擊載逐誓以死節)
성지(城地) 수리 무기수선, 군사 기율(紀律) 정비하고 (繕修城機 整備軍律)
몸소 주육(酒肉)들고 돌며, 사졸(士卒)을 대접하고 (親持午酒 巡餉士卒)
거문고 피리소리, 군정(軍情)을 편히하니 (吹笛鳴琴 以安軍情)
계략이 신기하고, 몇번 군성(軍聲) 떨쳤던가 (出計神奇 屢振軍聲)
대포는 질여포( 黎 )요, 폭뢰(爆雷)는 진천(震天)이라 ( 是 黎 雷昌震天)
현자총(玄字銃) 바로 쏴서, 적의 가슴 꽤뚫었네 (有銃玄字 貫賊胞顚)
싸움마다 승리하니, 호남 호서(湖南 湖西) 안전하고 (累戰累捷 兩湖賴完)
전공(戰功)으로 승진하여, 절도사(節度使)가 되셨으니 (隨捷陞秩 至於節度)
우리나라 기록에는 三대첩(三大捷)의 하나이오 (我國有記 三大捷 )
왜사(倭史)의 기록에도, 진주패전(晋州敗戰) 뿐이로다 (倭史之載 只擧晋敗)
왜병 하나 거짓죽음, 시체 밑에 엎드렸다 (一倭佯死 潛伏屍襄)
쏘는 탄환 명중하여, 위국순충(爲國殉忠) 하셨도다. (妨丸被中 殉忠乃巳)
선조대왕(宣祖大王) 가상(嘉賞) 하사, 가진 포상 다하시니 (宣廟嘉之 降褒具)
영의정(領議政)은 증직이요, 충무공(忠武公)은 시호로다(贈政領議 謚曰忠武)
안동 권용직(安東 權容稷) 삼가 짓고
안동 김사달(安東 金思達) 삼가 씀
▣ 김태서 - 감사합니다.
▣ 김주회 - 감사합니다. 이 긴 문장을 언제 타이핑하셨나요?
▣ 김항용 -
▣ 김발용 - 제 손이 아파오는 느낌입니다
▣ 김재원 - 감사 합니다. 잘읽었습니다.
▣ 김태영 - 대부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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