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과 우리가문 10 (金河瑞김하서,金巖김암,金淡김담)
페이지 정보
김주회 작성일02-05-30 03:04 조회1,874회 댓글0건본문
임진왜란과 우리가문 10 (金河瑞김하서,金巖김암,金淡김담)
안렴사공파 : 김사렴-김약-김우주-김환-김종손-김지-김공연-김계현-★김하서
<오창지>
▣ 김하서(金河瑞) (1551-1610)
공은 안렴사의 9세손인 현령 지의 손자이다. 선조 때에 사마시에 합격하였는데 호를 三緘堂이라 한다.
●임진왜란에 의병에 종사하였는데 격문을 초한 것이 매우 간절하여 장병들을 격려하였다.
그 격문에 이르기를
"원수와 한 하늘을 이고 있으니 무슨 면목으로 살겠는가. 이에 오백명의 의사들을 모집한다. 우리 군주의 강토를 복구할 것을 마음에 기약하는데 다만 군비가 한결같지 못함을 한탄한다. 이에 한 치되는 혈담을 가지고 의로운 제군들에게 두루 올린다." 하였다.
<안렴사공파 문중자료>
▣ 김하서(金河瑞) (1551명종6-1610광해2)
자 景義 호 삼함당, 안렴사공 9세손
공은 출생으로부터 총명준수하고 재질과 기품이 특이하였다. 모부인의 훈육으로 높은 스승에게 나가지 아니하고 모부인을 효양하는 한편 교학에 힘썼다.
●42세시에 임진왜란을 당하자 勤王의 대의를 품고 2차에 걸쳐 격문을 지어 列邑 수령과 지방 士友간에 보내어 초모한 의병 500여인으로 충주 죽산간의 진을 친 관군과 협공하여 많은 전공을 세웠다.
또한 사방으로 土豪 士家에 통해 出穀케 하여 군량을 돕기도 하였다.
난이 끝난 후에는 인신으로서 국난을 좌시키 못하였을 뿐 공명에 뜻이 있지 않다 하여 그 전공을 일체 나타내지 아니 하였으며 몸과 입과 뜻을 삼간다는 뜻으로 身, 口, 意의 세가지를 緘封(함봉)한다 하여 三緘堂(삼함당)이라 자호하고 유연히 일생을 마쳤다.
<사마방목>
▣ 김하서(金河瑞) / 宣祖 09 式年 進士
【시험년도】 선조(宣祖) 09 (1576) 식년(式年) 진사(進士)
【본인생년】 신해(辛亥) 1551
【본인거주】 청주(淸州)
【부친성명】 김계현(金繼賢)
【안항(형)】 김몽서(金夢瑞), 김응서(金應瑞)
【안항(제)】 김낙서(金洛瑞)
<오창지>
▣ 김암(金巖)
공은 안렴사의 후손이다.
●선조때에 무과에 급제하여 지세포 만호에 제수되었는데, 임진년 왜구가 갑자기 쳐들어오자 힘을 다하여 싸우다가 적에게 죽으니 초혼하여 장례하였다.
<안렴사공파 문중자료>
▣ 김담(金淡)
1562(명종17)-? 자 淸叔, 호 樂齋, 안렴사공 10세손
공은 벼슬이 장락정에 이르렀다.
●임란을 당함에 古今島에서 倡義하여 곽재우와 더불어 도모하여 많은 전과를 올리고 陣中에서 전사하였는데 10여일이나 안색이 불변하였다 한다.
아들 孝明이 負屍還葬하였고, 선무2등공신으로 책훈되고 병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안동김씨족보 순절록>
안렴사공 사렴의 7대손 만호 ★김암은 선조25년 임진왜란에 지세포에서 순절
안렴사공 사렴의 9대손 원정 ★김담(淡)은 선조25년 임진 9월20일 왜란 고금도에서 순절
안렴사공 사렴의 8대손 교위 ★김언희(彦禧)는 선조25년 임진왜란에 목령산에서 순절
▣ 김항용 -
▣ 김태서 -
▣ 김영환 -
▣ 김윤만 -
▣ 김태영 -
▣ 김재원 -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