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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剛山錄-김득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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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윤 작성일07-07-24 19:10 조회1,636회 댓글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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柏谷先祖文集冊六-雜著

乙巳八月丁卯。發高城郡抵百川橋。楡岾僧十餘屬持籃輿待之。與李大來,柳海宗各乘。踰狗嶺至楡岾。日已仄因留寢。戊辰詰朝。乘籃輿至蹴水窟。奇巖稜角參差。捨籃輿。扳木根而上絶壁。尋狹窄細路而徐行。厓下停籃輿。攀隱仙臺而登。據翠石縱觀十二瀑。其狀若倒銀河拖長虹。瀑之左右。蒼壁爲屛。石角或如攢劍。或如列戟。有大者小者。蒼檜密密。丹葉雜糅。瀑之上石間。古有靑鶴寄巢。歲甲寅。棄巢而去。其後弗復廻。此僧之相傳說也。恐日脚沒雲。還下來。乘籃輿至內水岾。此內外山界也。內山僧持籃輿已待。余暫憩息。打包吃朝飯。乘籃104_194b輿下邃谷。望見天半崱屴之峯橫亘雲外。意甚壯之問之。僧曰毗盧峯矣。仍吟許荷谷八月十六夜獨立毗盧頂之句。至李許臺邊。有木橋腐朽。U22960_24.GIF神渡之。乘籃輿至彌勒臺邊題名。至摩訶衍古庵。義湘師之所搆云。登階。老釋兩人出而迎之。相與語。且題名于柱上。仰見庵後峯巒峭峻。上揷蒼穹。下詰曲石逕。觀危巖側立一銅柱。搆二層閣。心極危之問之。僧曰古之普德師刱之。閱數千祀而不頹。豈非普德師之精靈爲護持而然歟。至萬瀑洞。其磐石或平或夷或坱圠。其泉流或俴或深。而弗似瀑布之狀。然得此萬瀑之名。未知古之何者名之而名實不相符耶。盤石上。楊蓬萊所寫蓬萊楓岳元化洞104_194c天八字。至今蟠屈。怳若蛟龍踴躍飛騰之狀。許筠寄崔簡易書曰。楊蓬萊字畫之壯。與此山爭雄。豈不信矣乎。自萬瀑洞出石門。至表訓寺。此波崙菩薩所創。距楡岾五十里也。催夕飯。以止枵腹之雷。又向長安寺而去。與方伯李子喬相遌。日將昏黑。飮燒春一醆。紓其弸菀而驩謔。明燭促膝。杜子美所詠夜闌更秉燭相對如夢寐者。正謂此也。己巳早朝。李子喬別吾儕去。吾儕乘籃輿還歸表訓。携柳海宗上正陽寺。寺麗祖所建。未及其寺也。先陟天逸臺而周覽其山之勝狀。優於隱仙臺之所見。至正陽寺。憩歇惺樓。倚欄放目。非天逸隱仙之比也。諸峯羅列。不可勝數。余問僧曰。諸峯皆有名乎。曰。各有104_194d其名。欲聞其名。略擧梗槩。以手指之曰。彼獅子峯也。彼小香盧峯也。彼金剛臺也。彼穴網峯也。彼五賢峯也。彼大香盧峯也。彼望高臺也。彼安養峯也。彼白馬峯也。彼十王峯也。彼觀音峯也。彼長慶峯也。彼釋迦峯也。此歇惺樓之所觀梗槩也。此山峯數。或曰一萬二千峯。或九萬六千峯。難可計其數也。愛諸峯奇奇怪怪之狀。留數日于歇惺樓。目在之其峯。或有大者。或有小者。或有圓者。或有尖者。或有飛者。或有舞者。或有戟立者。或有人立者。或有龍盤者。或有虎踞者。或離而合者有之。或縱而橫者有之。或先而後者有之。或凸而凹者有之。或東或西或南或北者簇簇相排。此山之峯。多現於人目者。104_195a唯獨歇惺樓也。是故欲觀此山之眞面者。不先他所。必先於此所。蓋爲盡見諸峯之狀而先到耳。其形勝必欲次第之。歇惺樓第一。隱仙臺第二。摩訶衍第三。餘外無可寄目處。而擧世稱勝地。必以萬瀑洞爲第一。余不勝捧腹。李啓賢謂余曰。欲見金剛山。直往正陽寺。登歇惺樓留三日。則不勞登陟而可以盡見諸峯。其言果符。啓賢之出入金剛。已四十餘年所。方伯之裨將任翊夏。武弁之魁傑。擬觀正陽勝致。昨日隨吾儕同到。半餉間遊翫。日未匿旋歸。方伯留官吏數輩數日。爲吾儕。以其所餘糇糧海錯餽之。所供極侈靡。蓋自槐州至高城。道路之遠近。溪山之秀麗。郡縣之肥瘠。人俗之美惡。舍之不104_195b紀。

 

 

 

금강산록1665년 을사년(현종 6년) 8월 14일 정묘일.


고성군(高城郡)을 출발하여 백천교(百川橋)에 도달하니 유점사(楡岾寺)의 승려 10명이 남여(藍輿)를 갖고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대래(李大來), 유해종(柳海宗)과 각기 남여를 타고서 구령(狗嶺)을 넘어 유점사에 도착하였는데, 날이 이미 저물었으므로 유숙하였다.


8월 15일 무진일.

이른 아침 남여를 타고서 축수굴(蹴水窟)에 도착하니, 기이한 바위가 뾰족하고 가지런하지 않았다. 남여에서 내려 나무뿌리를 끌어당기며 절벽에 올라가서 좁고 가는 길을 찾아 천천히 걸어가다가 벼랑 아래에 남여를 멈추고서 은선대(隱仙臺)를 부여잡고 올라가 푸른 바위에 의지하여 12폭포를 두루 보니, 그 모습은 마치 은하수를 뒤집어 놓은 것 같고 긴 무지개를 끌어당겨온 듯하였다. 폭포 좌우에는 푸른 절벽이 병풍을 이루었는데, 돌 모서리가 혹은 칼을 모아 놓은 것 같기도 하고 혹은 창을 나열해 놓은 것도 같았으며, 큰 것과 작은 것이 있었고, 푸른 노송나무는 빽빽하고 붉은 잎들이 섞여 있었다. 폭포 위의 돌 틈에는 그 옛날 청학(靑鶴)이 깃들어 살던 둥지가 있었는데, 갑인년에 둥지를 버리고 떠나가 그 후로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고 하는 바, 이는 승려들이 전하는 말이다. 해가 질까 염려되어 도로 내려와 남여를 타고 내수점(內水岾)에 이르렀으니, 이곳은 내금강과 외금강의 경계이다. 내금강의 승려들이 남여를 갖고서 이미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잠시 쉬면서 행장에 있던 음식으로 아침을 먹고서 남여를 타고 깊은 골짜기로 내려와 창공으로 높이 솟은 봉우리가 구름 박으로 뻗친 것을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매우 장엄하다고 여겨져 물어보니, 승려가 “비로봉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어서 하곡(荷谷) 허봉(許篈)의 “八月十六夜, 獨立毘盧頂”이라는 구절을 읊었다. 이허대(李許臺) 가에 이르니 나무다리가 부패하였기에 정신을 바짝 차리고 건넜다. 남여를 타고서 미륵대(彌勒臺) 옆에 도착하여 이름을 적고서 마하연(摩訶衍)의 옛 암자에 도착하였는데, 이것은 의상대사(義湘大師)이 세운 것이라고 한다. 계단에 올라가니 늙은 승려 두 사람이 나와 맞이하였다. 함께 말을 하고서 기둥 위에 이름을 쓰고 암자 뒤의 험준한 봉우리를 우러러보니, 위로는 창공에 꽂혀 있고 아래로는 돌길이 구불구불하였다. 위태로운 바위에 구리 기둥 하나가 옆에 서 있는데, 2층 누각을 얽어 놓았기에 마음 속으로 심히 위험한 것 같아 물어보니, 승려는 “옛날 보덕사(普德師)가 세운 것인데 수십 년이 지나도록 무너지지 않았으니, 어찌 보덕사의 정령이 수호하여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만폭동(萬瀑洞)에 도착하니, 너럭바위는 혹은 평평하기도 하고 혹은 넓기도 하며 그 물결은 혹은 얕고 혹은 깊은데, 폭포의 모습과는 다르지만 이 만폭(萬瀑)이라는 이름을 얻었으니, 옛날 어떤 이가 명명한 것이기에 명실상부하지 않은지는 모르겠다. 너럭바위 위에는 봉래(蓬萊) 양사언(楊士彦)이 써 놓은 ‘蓬萊楓岳元化洞天’이라는 여덟 글자는 지금까지 꿈틀거리며 교룡(蛟龍)이 뛰어올라 비상하는 모양처럼 황홀하다. 허균(許筠)이 간이당(簡易堂) 최립(崔岦) 에게 보낸 편지에서 “봉래 양사언의 글씨의 장엄함은 이 금강산과 자웅을 겨룰만 하다.”라고 하였으니, 어찌 믿을 만한 말이 아니겠는가? 만폭동으로부터 석문을 나와 표훈사(表訓寺)에 이르렀다. 이 곳은 파륜보살(波崙菩薩)이 창건한 것으로 유점사와의 거리는 50리이다. 서둘러 저녁을 먹어 뱃속의 우래소리를 그치게 하고서 또 장안사(長安寺)를 향하여 갔다. 방백(方伯)인 이자교(李子喬)와 만났는데 날이 장차 저물려고 하였다. 소주 한 잔을 마셔서 긴장을 풀고 즐겁게 담소하는데 등불을 밝히고 가까이 앉았으니, 두보가 노래하던 “밤 깊자 다시 촛불 들고서, 상대하고 있으니 꿈 속과 같네.”라는 것은 바로 이것을 이른 것이리라.


8월 16일 기사일.

이른 아침, 이자교가 우리와 고별하고서 떠나고 우리는 남여를 타고 표훈사로 돌아갔다. 유해종을 데리고 정양사로 올라갔다. 정양사는 고려 태조가 창건한 것이다. 그 절에 당도하기 전에 먼저 천일대(天逸臺)로 올라가 그 산의 좋은 경치를 두루 보니 은선대에서 보았던 것보다 좋았다. 정양사에 도착하여 헐성루(歇惺樓)에서 쉬었는데, 난간에 기대어 눈을 돌려보니 천일대와 은선대에 비할 것이 아니었다. 여러 봉우리들이 나열되어 이루다 셀 수가 없었다. 내가 승려에게 묻기를 “여러 봉우리마다 모두 이름이 있는가?”라고 하니 승려가 “각기 명칭이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그 이름을 듣고자 하니 대략 그 대강을 거론하였는데, 손으로 가리키면서 “저 곳은 사자봉, 저 곳은 소향로봉, 저 곳은 금강대, 저 곳은 혈망봉, 저 곳은 오현봉, 저 곳은 대향로봉, 저 곳은 망고대, 저 곳은 안양봉, 저 곳은 백마봉, 저 곳은 시왕봉, 저 곳은 관음봉, 저 곳은 장경봉, 저 곳은 석가봉입니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헐성루에서 볼 수 있는 대강의 풍경이다. 이 산 봉우리의 숫자를 혹은 일만이천봉이라고 하고 혹은 구만육천봉이라 하는데, 그 수를 헤아리기는 어렵지만 여러 봉우리들이 기괴한 모습을 사랑할 만하여 며칠 동안 헐성루에서 머물고 나니, 눈 안에 남겨 두었는데, 그 봉우리들은 혹은 큰 것도 있고 혹은 작은 것도 있으며, 혹은 둥근 것도 있고 혹은 뾰족한 것도 있으며, 혹은 나는 것도 있고 혹은 춤추는 것도 있으며, 혹은 창처럼 서 있는 것도 있고 혹은 사람처럼 서 있는 것도 있으며, 혹은 용이 서려 있는 것 같은 것도 있고 혹은 범이 웅크리고 있는 것 같은 것도 있으며, 혹은 떨어졌다가 만난 것도 있으며 혹은 멋대로 가로지른 것도 있으며, 혹은 앞서다가 뒤진 것도 있으며 혹은 오목하고도 볼록한 것도 있으며, 혹은 동쪽으로 혹은 서쪽으로, 혹은 남쪽으로 혹은 북쪽으로 있는 봉우리들이 모여서 서로 밀치는 듯하였으니, 이 산의 봉우리들이 사람의 눈에 많이 나타나는 곳은 오직 헐성루 뿐이다. 이런 까닭에 이 산의 진면목을 보고자 하는 사람들은 다른 곳을 우선하지 않고 반드시 이곳을 우선시하니, 여러 봉우리들을 다 보기 위하여 먼저 오는 것이다. 그 형승(形勝)을 구태여 순서로 정한다면 헐성루가 첫째이고, 은선대가 둘째이며, 마하연이 셋째이다. 나머지는 눈 둘 곳이 없지만 온 세상 사람들이 승지(勝地)를 일컬을 때에는 반드시 만폭동을 으뜸으로 치고 있으니, 나는 웃음을 참을 수 없다. 이계현(李啓賢)이 나에게 이르기를, “금강산을 보고자 하면 바로 정양사에 가서 헐성루에 올라 3일을 머문다면 올라가는 수고를 들이지 않는다 해도 여러 봉우리들을 볼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한 적이 있었는데, 그 말이 과연 부합하였다. 이계현은 금강산에 출입한 지 이미 40여 년이었다. 방백의 비장(裨將) 임익하(任翊夏)는 무관 중에 걸출한 인물로서 정양사의 빼어난 경치를 보려고 어제 우리를 따라 함께 왔다. 잠시 동안 유람하고서 날이 저물기 전에 바로 돌아왔다. 방백이 관리 몇 명을 며칠 동안 머물게 하여 우리들을 위하여 남아 있는 마른 식량〔餱糧〕과 해산물로 대접하였는데, 장만한 것이 매우 사치스러웠다. 괴주(槐州)에서 고성까지 도로의 멀고 가까움과 산수의 수려함, 군현(郡縣)들의 비옥함과 척박함, 풍속의 아름다움과 추악함은 버려두고 쓰지 않는다.


(번역은 조선시대 유산기에서 옮김)
 

댓글목록

관리자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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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놀랍습니다. 내금강의 아름다운 모습과 여정을 이렇게 아름다운 묘사와 서술로 쓰신 백곡 선조님의 글을 대하게 되다니---
훗날 금강산 기행의 좋은 길잡이가 되리라 봅니다. 그리고 곳곳에 새겨 놓은 이름자를 확인해 봐야겠습니다.  홈에 올리겠습니다.

김영윤님의 댓글

profile_image 김영윤
작성일

  催夕飯。以止枵腹之(....서둘러 저녁을 먹어 뱃속의 우래소리를 그치게 하고서 .....)
 백곡 선조님의 해학에 감동을 느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