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광산의 맺힘과 풀림(8)-산신 고유제 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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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작성일07-08-02 09:51 조회1,473회 댓글0건본문
6. 산신 고유제 준비
이상에서 우리 가문의 실제 역사와 전설을 자세히 조사하고 양자를 서로 대비하며 전설이 갖고 있는 진실성과 허구성도 살펴보았다. 그런데 위와같이 이 둘 사이에는 상당부분 일치되는 모습을 뚜렷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더욱이 최근에 이르러서는 전기(前記)한 것과 같은 불행한 사건들이 연발하여 모두를 당황하게 하자 필자는 더욱 전설의 실현적 가치를 인정하게 되었고, 결국 풀림행사를 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판단과 확신을 갖게 되었으며, 부친께 건의 드려 이제 이를 실시하게 된 것이었다.
준비에 들어갔다. 우선 각종 전설과 문중 역사를 종합, 정리한 해설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또한 정성으로 제수를 장만했고 전국 종친 약 30여 명에게도 행사를 통보했으며 각종 문헌의 전설 제공자들에게도 연락처를 수소문하여 참석을 부탁했다. 특히 현 보광사 주지인 운산(金泰國)대사께는 당일 축원(祝願) 독경(讀經)을 부탁했다. 그 이유는 현재 이 보광사는 폐사된 봉학사의 석조 여래불상을 본존불로 모시고 있고, 봉학사 터로부터 불과 200m 아래에 세워진 절이기에 이는 봉학사의 후신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또한 주지스님이 익원공(휘 士衡)의 21대손인 종친으로서 더욱 우리를 잘 이해하고 있으리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점심과 의식 거행을 위한 제수, 축문, 각종 촬영도구들도 준비했다.
2일전, 모든 준비는 계획대로 진행되어 갔다. 그런데 참석하겠다던 여러 종친들이 불참을 통보해 왔다. 안타까웠다. 예상인원보다 약 10여명이 줄었다. 이날 참가 부탁을 했던 전설 제공자 김용태님(방축리 거주)에게는 다시 전화하여 오시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당일 행사장에서 양자의 서먹 서먹한 만남은 아무래도 불편할 것 같았다.
4월 1일 아침, 드디어 기다리는 날이 왔다. 걱정했던 비는 오지 않아 다행이었다. 맞춤 도시락을 보온 처리하여 마지막으로 차에 싣자 생질인 병준과 부총무인 태선종친이 도착했다. 7시, 이제 출발이다.
이른 아침 고속도로에는 차들이 최고 속도를 내며 달렸다. 그런데 하늘은 황사가 뒤섞인 뿌연 안개로 가득했다. 라디오에서는 황사 주의보가 연속해서 발령되었다. 금년 중 가장 강력한 황사라고 한다. ‘하늘이시여 제발 괴산만은 좀 맑게 해 주십시오’라고 빌고 빌었다. 쉼없이 달리는 차는 중부고속도로, 영동고속도로를 지나 중부내륙고속도로로 접어 들었다. 아직도 뿌연 하늘은 좀처럼 개지 않았다. 괴산에 도착해서는 전원 분량의 마스크를 사기로 했다.
8시 20분경, 부산의 태관종친(휘 燻 종손)께서 벌써 괴산에 도착했다는 전화가 왔다. 새벽 3시에 부산에서 아우(태화)와 함께 출발하여 경북 성주군 수륜면 가야산 근처에 사는 태억 종친을 태우고 왔다고 한다. 정성이 놀랍다.
08시 40분, 괴산 세덕사에 도착했다. 서울을 출발하여 논스톱으로 달려 온 지 1시간 40분 만이다. 승용형, 한용형도 속속 도착했다. 9시 20분, 괴산집을 출발하여 사리면 보광산으로 향했다. 도중에 사리면 수암리의 장응종친도 태웠다. 9시 40분, 사리면 수암리 마을 입구에 도착하여 일행들을 기다렸다. 곧 청주의 영회종친이 가족 3인을 데리고 왔고, 충주의 상훈종친(故 석호님 季子)도 2명의 젊은 종친과 같이 왔다. 만난 종친들끼리 반가운 인사를 나눴다.
10시 10분 경, 보광산을 차로 올랐다. 산림도로는 좁고 가파랐다. 그러나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1시간 이상 허덕이며 올라가야 하는 가파른 산길을 이렇게 승용차로 불과 수 분 만에 오를 수 있다니. 명당은 역시 명당으로서의 대접을 받는가 보다!
보광사에 도착하여 운산대사님을 대동하고 묘소에 올랐다. 4월 초하루의 산야는 아직 누런 퇴색빛이다. 풀과 나뭇잎이 없으니 평소에 보지 못했던 보광산의 이모저모가 한 눈에 들어왔다. 10시 30분, 약 200m의 산길을 불과 3분 만에 올라 정상의 묘소에 이른다.
<도착>
<보광사 대웅전>
<묘소로 이동>
<고유제 준비>
<참판공(휘 소) 묘소>
<승지공(휘 구만) 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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