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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군지순례9(청주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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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만 작성일02-05-31 06:04 조회1,64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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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시지(충북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1997)







청주시지 上 pp253∼255. 『화양서원』과 청주유림 중.





--(전략) . . . . . 이외 사액을 받지 못한 서원으로 기암서원(북 30리 : 예문관 제



학 姜柏年(강백년) 제향), 쌍천서원(동 20리 : 대사헌 申湜(신식) 제향), 국계서원



(동 20리 : 교리 朴增榮(박증영), 효자 卞景福(변경복), 참의 李德洙(이덕수), 판서



李秀彦(이수언) 제향), 송천서원(서 40리 : 안렴사 金士廉(김사렴), 참찬 崔有慶(최



유경), 관찰사 李貞幹(이정간), 사간 朴光佑(박광우), 참봉 李之忠(이지충), 현감 趙



綱(조강), 증좌찬성 李大建(이대건), 증영의정 李濟臣(이제신), 영의정 崔錫鼎(최석



정), 사복정 李寅爀(이인혁), 송계서원(서 10리 : 현감 卞時煥(변시환) 제향), 봉계



서원(동 15리 : 참판 金宇顯(김우현), 증판서 申涌동(신용), 증지평 申潗(신집) 제



향)이 있었으나 영조대 일시적으로 정비되는 가운데 고종 8년 대원군에 의해 철



폐되어 갔다.(『충청도읍지국립 : 영조-헌종년간)』. . . . . (중략) . . . . .



--송계서원의 변시환은 현감으로서 청백하기로 이름 났으며, 봉계서원의 신용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서 활약한 인물이다. 이외에도 김자점을 탄핵하여 귀양보



내기도 했던 전 판서 이홍연(1613∼1683, 자는 靜伯(정백). 而靜(이정), 호는 三竹



(삼죽), 한산인)은 대사간과 방백 등의 관직을 역임했으며, 총명하고 업무를 잘 처



리하는 인물로 알려져 있는 전 평안감사 이태연(1615∼1669, 자는 靜叔(정숙), 호



는 訥齋(눌재), 한산인)은 김자점의 일파로 탄핵을 받기도 했다. . . . . (후략)







청주시지 下 pp1011 문무제신중.





(31) 김사렴(金士廉 . 14세기 중엽)



---고려말의 충신, 본관은 안동, 평장사 김방경의 손자로 어려서부터 학문에 힘



써 문장에 능하고 공민왕 초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안렴사에 이르렀다. 정몽



주. 이색과 친교가 두터웠고 함께 직간으로 이름이 높았다. 1365년(공민왕 14년)



왕이 신돈을 총애하여 신돈에게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 집현전 대



학사를 더하고 공신의 호를 내리자 사렴이 상소하기를 「신돈은 바른 사람이 아



니며 후에 반드시 정란을 일으켜 고려의 사직을 위태롭게 할 위인이라」고 탄핵



하였다. 조야가 모두 침묵을 지키고 있었는데 사렴이 홀로 탄핵에 나서니 그의



직간은 국중에 떨쳤다.



---1392년 고려가 망하고 이태조가 건국하자 충신은 불사이군이라 하여 청주에



은거하였다. 이태조에 의해 수차에 걸쳐 좌사간에 제수되었으나 거절하고 도산



(陶山)에 들어가 두문불출하였다. 죽음에 임하여 「고려의 구신(舊臣)이 고려와



함께 순국하지 못하였으니 무슨 면목으로 죽어 선왕과 선인들을 대하리요. 내가



죽거든 심산에 묻고 봉분을 하지 말고 평무덤으로 하라」고 유명하였다. 1678년



(숙종 4년) 향리의 장보(章甫)가 발의하여 송천에 사당을 세워 제사하였다.



(문헌 : 고려명신전, 조선인명사서)







청주시지 下 pp1052 충신중.





(4) 김시약(金時若 . 1564∼1627)



---조선 중기 정묘호란 때의 절신(節臣)으로 자는 기오(箕吾), 본관은 안동으로



비안현감(比安縣監) 인갑(仁甲)의 아들이며, 진주목사 시민(時敏)의 종제이다.



서애(西崖) 유성룡(柳成龍)의 천거로 훈련원 僉正(첨정)을 거쳐 萬戶(만호), 僉使



(첨사) 등을 역임하였다. 임진왜란 때는 1596년(선조 29년) 괴산 선봉장으로 창의



병(倡義兵)을 거느리고 각지에 왜적을 격파하고 관찰사의 천거를 받아 별장(別將)



에 발탁 되었다. 이듬해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관병과 의병을 인솔하고 창원. 옥천



에서 왜군 24명을 사살하였다.



---인조반정 후 동부승지가 되고 이듬해 1624년 의주부윤이 되었으며, 다시 창성



부 僉節制使(첨절제사)가 되었다. 1627년(인조 5년) 정유(註 : 정묘의 오기)호란에



성이 함락되고 그의 두 아들 환( ), 규( )와 함께 적에게 사로잡혀 굴하지 않고



죽음을 당하였다. 1683년(숙종 9년) 충신의 정문(旌門)이 세워지고 호조참판(註 :



병조참판의 오기)에 추증되었다.



(문헌 : 선조실록, 광해군일기, 인조실록)





(9) 김언(金王+言 . 1589∼1636)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여윤(汝潤), 본관은 안동, 진사 낙서(洛瑞)의 아들이며



지평 욱(頊)의 아우로 청주 출신이다. 율곡 이이(李珥)의 문하에서 학업을 닦아



1609년(광해군 1년) 진사가 되고, 1615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등용된 뒤 광해조에 폐모론(廢母論)에 가담하지 않아 승진이 늦어 7, 8



년 뒤 겨우 봉상시 主簿(주부)가 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병조의 낭관(郎官)이 되고, 여러 관직을 거쳐 성천부사



로 나가 정적(政績)을 크게 이룩하였다. 1636년(인조 14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성천부사로서 흩어진 관병을 이끌어 자모산성(慈母山城)으로 가서 관찰사 홍명구



에게 예속시켰다. 한편 의병을 모집하여 방비에 힘썼으나 대군을 만나 항복하라



는 위협을 물리치고 계속 항거하다가 전사하였다. 좌찬성에 추증되고 정려(旌閭)



되었으며, 시호는 민숙(愍肅)이다. 우암이 찬(撰)하고 김진상이 쓰고 김진규가 전



서(篆書)한 묘갈(墓碣)이 있다.



(문헌 : 인조실록, 국조인물고)





(15) 김하서(金河瑞 . 16세기 말엽)



---조선 중기의 문신, 호는 삼함당(三緘堂), 본관은 안동으로, 1576년(선조 9년)



진사에 급제하고, 임진왜란 때에는 여러 고을에 격문(檄文)을 발하여 의병을 일으



켜 5백명을 이끌고 충주 竹山界(죽산계)에 포진하여 관군과 함께 왜적과 싸워 크



게 전공을 거두었다. 후일 귀향하여 조금도 전공(戰功)을 말함이 없었다.



(문헌 : 청주지)







청주시지 下 pp1062 효자중.





(5) 김환(金 ), 김규(金 )



---형제로서 정묘호란 때 절신(節臣) 김시약(金時若)의 아들이다. 1627년(인조 5



년) 정묘호란에 그의 부친이 창성부 첨절제사로 있었는데 싸우다 전세가 불리하



여 성은 함락되고 적에게 사로잡혀 부모형제가 굴하지 않고 절의에 죽었다.



첨정(僉正)에 증직되고 정문(旌門)이 섰다.(문헌 : 청주지)





(52) 김작(金  . 1427∼1488)



---조선 전기의 문신, 자는 위경(衛卿). 등가(登可), 본관은 안동, 개국공신이며



좌의정(註 : 좌정승이 바른 것임) 사형(士衡)의 증손이며, 종숙(宗淑)의 아들이다.



1477년(세종 29년) 생원시에 급제하고, 1454년(단종 2년) 음보(蔭補)로 선공감에



녹사(錄事)되고, 춘천부사. 군기감(軍器監) 정(正)을 역임했다. 1477년(성종 8년)



중시(重試)에 급제하여 병조참지(兵曹參知) 등을 거쳐 형조판서(刑曹判書)에 이르



렀다.



---성효(誠孝)가 출천(出天)하여 사형제가 한집에 기거하며 구경당(俱慶堂)이라



(편액)偏額하고 정성(定省)을 어기지 않았으며 부모의 병환이 급함에 단지(斷指)



주혈(注血)하였다. 여막(廬幕) 삼년을 지내니 왕이 효례를 듣고 예로써 우대하였



으며 특히 미찬(美饌)을 하사하였다. 시호는 효소(孝昭)이다.



(문헌 : 성종실록, 청주지)



※정성(定省) : 혼정신성(昏定晨省), 조석으로 부모의 안부를 물어 살피는 일)





(53) 김성진(金聲振)



---본관은 안동, 벼슬은 집의(執義)를 지냈는데 품성이 질실(質實)하여 허교(虛



嬌)함이 없었다. 4세에 모친을 여의고 농사를 지어 정성껏 부친을 모시어 조금도



뜻을 거슬림이 없었다. 일찍 당한 모상(母喪)이 한이 되어 부상(父喪) 때에 병설



(竝設)하여 삼년상을 복상(服喪)하였다. 송시열이 글을 짓고 쓴 묘갈이 있다.



(문헌 : 청주지)





(57) 김형집(金亨集)



---본관은 안동, 돈령(敦寧) 김복원(金復元)의 아들로 1772년(영조 49년)에 출생,



효행이 탁이(卓異)하고 성리학에 조예가 깊어 「삼재체용도(三才體用圖)」를 만들



었다 한다. 암행어사 김명진이 흠탄(欽歎)한 바 있다.(문헌 : 청주지)





(58) 김준영(金準營)



---본관은 안동, 김형집의 아들로 1793년(정조 17년)에 출생, 문장이 세상에 뛰어



나고 천성이 순효하여 엄동 친환(親患)에 죽순을 구하여 효험을 보았으므로 향당



(鄕黨)이 그 지효를 칭찬하였다. 계인당(繼忍堂)이라 스스로 호(號)하였다.



(문헌 : 청주지)







청주시지 下 pp1084 효부중.





(11) 안동김씨



---시모의 병환에 하늘에 빌고 남편의 병환때는 단지(斷指)하였으며, 지아비 상



을 당하여 스스로 목을 매려 하였으나 유아(幼兒)와 유복(遺腹)이 있어 다시 생각



하여 세자식을 길러 장성케 하였다. 1888년(고종 25년)에 그 독행(篤行)이 포상을



입었다.(문헌 : 청주지)







청주시지 下 pp1094 문무과중.





(18) 김사렴(金士廉)



---본관은 안동, 상락공(上洛公) 김방경(金方慶)의 후손이다. 고려말에 벼슬이 안



렴사(安廉使)에 이르렀다가 조선 초에 사간(司諫)으로 불리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충신은 불사이군(不事二君)이라 하여 오근촌(吳根村)에 묻혀 살았으며 죽음에 임



하여 유명(遺命)하기를 평총(平塚)으로 할 것을 명하였다.





(31) 김공예(金公藝)



---김사렴의 6대손인데 젊어서 문과에 오르고, 한림(翰林) 제학(提學)을 거쳐 승



지(承旨)에 이르렀다. 청백(淸白) 자수(自守)하고 충효(忠孝)로 세상에 널리 알려



졌다. 연달아 양친상을 당하여 여막(廬幕)에서 과도히 슬퍼하더니 마침내 묘소에



서 죽었다.





(55) 김언(金王+言)



---낙서(洛瑞)의 아들로 1603년(선조 36년)에 진사를 지내고 1610년(광해군 2년)



에 등제하여 벼슬이 지평에 이르렀다.





(57) 김진(金瑨)



---자는 여헌(汝獻), 본관 안동, 판관(判官) 몽서(夢瑞)의 아들로 1590년(선조 23



년)에 진사를 지내고 1623년(인조 1년)에 등제, 벼슬은 통례첨지(通禮僉知).





(66) 김련(金璉)



---하서(河瑞)의 아들로 1615년(광해군 7년)에 사마(司馬)에 오르고 1621년(광해



군 13년)에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 벼슬은 병조좌랑에 이르렀다. 『도학계가



례서(圖學啓家禮書)』를 저술하여 세상에 전하고 있다.





(69) 김찬(金瓚)



---문정공(文靖公) 질( )의 5세손이며 문과에 올라 벼슬이 이조판서에 이르렀다.





(91) 김세익(金世翊)



---충신 언(王+言)의 아들, 갑오에 사마(司馬)하고 숙종 병인년에 등제하여 벼슬



은 감사(監司)에 이르렀다.





(132) 김복원(金復元)



---1729년생, 1765년(영조 41년) 을유년에 등제하고 동지돈령(同知敦寧)에 이르렀



다.







청주시지 下 pp1131 음사중.





(32) 김인서(金麟瑞)



---본관은 안동으로 뽑히어 별좌(別坐)에 이르렀다.





(33) 김제(金濟)



---본관은 안동으로 뽑히어 별제(別提)에 이르렀다.





(34) 김미(金미(湄))



---본관은 안동으로 벼슬이 현감(縣監)에 이르렀다.





(124) 김진장(金震長)



---안동사람이며 상락군(上洛君) 방경의 후예, 규암 송인수의 문하에 있었는데



규암이 그의 모습이 장량과 같다하여 자방)子房이라 자(字)를 했다 한다. 1552년



(명종 7년) 도사를 지내다가 돌아와 학문에 전심했다. 동네 아래에 반곡(盤谷)을



쌓았으므로 반곡이라 자호(自號)하고 제영(題詠)이 있었다고 한다.





(126) 김락서(金洛瑞)



---1589년(선조 22년)에 진사를 지내고 서사(筮仕)로서 참봉(參奉)이 되었다.





(134) 김헌광(金獻光)



---본관 안동, 1564년(명종 19년)에 진사 지내고 서사(筮仕)로 별제(別提)에 이르



렀다.





(144) 김세보(金世輔)



---병자호란 때 충신 김언의 아들, 어린 나이에 사마(司馬)하고 서사(筮仕)로 현



감(縣監)이 되었다.





(145) 김세필(金世弼)



---현감 김세보(金世輔)의 아우, 어린 나이에 사마(司馬)하고 음사(蔭仕)로 현감



(縣監)이 되었다.





(179) 김점(金點)



---공예(公藝)의 아들로 벼슬은 참봉(參奉)에 이르렀다.







청주시지 下 pp1169 의병장중.





(23) 김천장(金天章)



---1728년 이인좌(李麟佐)의 난(亂)에 청주 함락의 급보를 듣고 원근에서 의도



(義徒)가 일어났는데 진천 방면에서는 김천장이 의병을 일으켰다. 그의 형 천주,



아들 성옥, 조카 성추 등과 의병을 이끌어 잣고개로부터 청주로 진격하여 적장



이지경과 싸우다 전사하였다. 조정에서는 천장, 천주 형제와 성옥, 성추(천주의 아



들)에게 충효로서 명정하고 수미(需米)를 내리었다.(문헌 : 청주지)







▣ 김재원 -

▣ 김태서 - 감사합니다.

▣ 김영환 -

▣ 김항용 - 귀한 자료를 앉아서 구경만 합니다. 감사합니다.

▣ 김주회 - 귀한자료 감사합니다. 언제 이렇게 많은 분량을 타이핑 하십니까? 고맙게 잘 읽고 있습니다. 참고로 김시약, 김환, 김규는 제학공파이시고, 김작, 김찬, 김제, 김미는 익원공파이시고, 김진장은 문온공파이신 듯하고, 김성진, 김헌광은 분파는 모르겠고, 그외의 선조분들은 안렴사공파 이십니다.

▣ 김주회 - 김미-김기서-김제-김헌광-김각-김성진 으로 이어지는 세계는 청주 궁현(고락동)의 익원공파 이시네요

▣ 김태영 - 대부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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