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광산의 맺힘과 풀림(13)-부록(전설류)
페이지 정보
김항용 작성일07-08-07 11:59 조회1,540회 댓글0건본문
10. <부 록>(보광산 관련 전설 및 주요 자료 종합)
1) 전설류
가) <사지(寺誌)> (충청북도청 간. 1982년. 438p)
(1)석조여래좌상(石造 如來坐像)
소재지 : 괴산군 사리면 소매리(사담리의 誤記) 보광사 법당 내
법당의 석불(石佛) 부처님은 원래 봉학사 금당(金堂)에 모신 주불이었는데 조성 현종때 충청도 관찰사 김소(金素)의 묘를 쓰고자 절을 헐고 부처님의 머리를 절단 파괴하여 버려졌다고 한다.
지금부터 150여 년 전 보광산 산 밑 하도 부락에 사는 손씨(孫氏)가 하루는 꿈을 꾸었는데 낯이 익은 노승이 찾아와서 “나는 보광산에 있는 부처이다. 나는 100여 년 동안 흙속에 묻혀 있다. 지금 때가 되었으니 나를 파내어 모시도록 하라. 나는 지금 보광사 절에서 남쪽으로 내려와 양지 바른 언덕바지에 있다.” 하고는 사라졌다.
노승은 꿈에도 생시와 같이 위치를 정확하게 알려주는 것이 아닌가? 꿈을 깬 손씨는 유생(儒生)이라 ‘중의 꿈’이기에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이튿날 밤에 또 꿈을 꾸었다. 어제와 다름없이 노승이 와서 같은 말을 하고 사라졌다. 이 날도 ‘중의 꿈’으로 돌려 버리었다. 사흘째 밤에 또 꿈을 꾸었는데 또 노승이 찾아와서 “내가 그대에게 두 번이나 부탁을 하였는데 말을 아니 들으니 야속하다. 내 말을 들으면 자손 번성하고 영화가 올 것이니 부디 내 말을 들어 다오”하고 사라졌다.
꿈을 꾸고 나서 손씨는 “내가 미련한 놈이지 3번씩이나 현몽을 해도 말을 안 들을 수가 있나!” 하고 이튿날 아침에 집 식구들에게 꿈 이야기를 말하고 마을 사람들에게도 알려 10여 명의 동조자를 얻었다. 그 중 같은 유생인 우씨(禹氏)와 경비를 마련하여 꿈에 이르던 곳에 가서 땅을 파보니 목이 부러진 석불이 나왔다. 산이 험하고 골이 깊어 집으로 운반할 수 없어 그곳에 바로 세우고 제례를 지냈다.
보광산에 부처님이 나왔다는 말은 입과 입을 거쳐 여러 마을로 퍼져 나갔다. 이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기뻐하고 좋아하니 이상한 일이다. 손씨와 우씨는 그 후부터 재산이 일고 자손이 번창해 갔다.
그 후 어느 스님이 이곳에 절을 다시 고쳐 짓고 양지 바른 언덕바지에 있는 석불을 법당으로 안치했다. 이 때 손씨와 우씨 등 수백명이 와서 돌보아 주었다 한다. 150여 년 전 이 석불을 땅에서 파낸 손씨와 우씨의 후손들이 지금도 그 마을에 살고 있다 한다.
(2)보광사와 김참판 묘 (전게서 438-439P)
보광사는 괴산군 사리면 사담리 보광산의 정상 가까이에 위치하고 있으며 대웅전, 명부전, 산신각의 자그마한 사찰로서 김봉삼이라는 이승(尼僧)과 2명의 보살들이 조석 예불하며 목탁 소리조차 외로운 한적한 절이다.
전래하는 말에 의하면 200-300년 전까지는 보광사(혹 鳳鶴寺)라고 칭하는 거찰(巨刹)이 원래는 지금의 김참판묘 자리에 있었는데 이 보광사 절터는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금계포란지지(金鷄抱卵之地)로서 천하에 드믄 명당이었다. 이에 탐이 난 김참판의 자손이 세도의 힘으로 절을 헐고 여기에 김참판의 묘를 만든 것이다.
묘를 쓴 뒤 몇 해 후 그 후손 집에 괴승이 나타나 “묘자리는 천하에 드믄 명당이나 한 가지 흠이 있다. 맞은편 산에서 흘러내리는 계곡의 물을 보이지 않게 하면 크게 흥할 것이다.”하고 일러 주므로 이에 그 후손들이 앞산 계곡의 물을 보이지 않게 물길을 돌려 버렸으니 이로 인한 재력의 낭비가 엄청났다.
그런데 이 터는 금계가 알을 품는 형상이니 닭이 알을 품는다 해도 때때로 홰에서 내려 물을 마셔야 하거늘 부근에 물이 없으니 물을 찾아 홰에서 떠나게 되니 알이 곪아 버리게 되어 후손을 잇지 못하게 되었다 한다.
그런데 그 괴승은 부처의 회신(化身)으로 절을 헐게 한 벌을 내린 것이라 전하여 지며 지금의 보광사는 원래의 터 밑에 건축된 것이다.
<제공자-최한균. 괴산군 사리면 수암리>
나) <槐山郡 說話集> (괴산군문화원 간. 1999. 207-216p)
* 중이 복수한 보광산 명당
저 보광산 꼭대기에 가면 탑이 있고 그 탑 뒤에 모이가 있어. 지금 보광산에 가면 보광사(普光寺)가 있는데 그건 나중에 진 절이고 원래 보광사는 그 묘자리에 있었대. 그런데 그 때 충청감사(忠淸監司)를 지낸 사람이 죽었어. 지금으로 말하면 도지사를 지낸 사람이여. 내 그 사람 이름도 알지만, 좋은 얘기가 아니니까 거명은 않겠어. 그 사람이 죽으니까 인저 유명한 풍수를 불러 묘자리를 보라고 했단 말이여. 그런데 그 풍수가
“보광산에 좋은 묘자리가 있긴 있는데-”
하거든. 그래 그 아들이, 죽은 김감사 아들이,
“있으면 있는거지, 있는데가 무슨 말이냐?”
하니까 풍수가 한다는 말이
“거기 절이 있어서-”
“자리면 좋다면 절이 문제냐? 거기가 어디냐?”
‘괴산 보광산에 있는 보광사 자리입니다.“
“알았다. 내 알아서 하마.” 하고 권력이 있으니까, 더구나 그 때는 불교를 탄압할 때거든. 사람을 시켜 중을 쫓아내고 절을 허물고 거기다가 자기 아버지 모이를 쓴겨. 어떤 사람은 중을 죽여서 거기 못에 묻었다고 하고 그 때 벼락이 쳤다고 해. 어쨌던 절자리에 모이를 쓴거는 사실이여. 그런데 그 때 절에서 쫓겨난 중 하나가 분하거든. 그래 복수할 생각으로 풍수를 배워가지고 몇 년 후에 거길 찾아간겨. 가니까 절은 없어지고 모이가 하나 번듯하게 있는겨. 마침 김감사 아들이 있어. 아마 있을 때 갔겠지. 가서는
“자리는 좋은데 한 가지 흠이 있구나!”
한겨. 그래 김감사 아들이
“그 흠이란게 무어냐?”
하니 이제 설명을 하는 거지.
“이게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인데 금닭이 알을 품고 있는 형국인데 서쪽이 허해서 닭이 알을 까지 못해 발복을 못합니다.”
그러니 중을 쫓아내고 절까지 허물고 쓴 명당인데 발복을 못한다니 그 아들이 물은 거여.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겠는가?”
“풍수에서는 지세가 강하면 그 강한 지세를 누르는 것을 진호(鎭護)라 하고 지세가 허하면 그 허한 것을 보충하는 것을 비보(裨補)라 합니다. 그래서 여기는 비보를 해야 하는데 서쪽을 흙으로 돋우어 서쪽 바람이 안들어 오도록 막아야 합니다.”
“고맙다.”
고 하더니 인제 사람을 사서 서쪽을 흙을 퍼다가 돋구었어. 지금도 가보면 그 모이 서쪽으로 토성처럼 쌓은게 있어. 그런데 그걸 쌓고 나면서 그 집이 절단나는 거지. 왜 그러냐 하면, 닭이 알을 품는데 바람이 안 통하니까 곪아 버린 거여. 그래 그 집이 망했다는 전설이 내려와. 이 근동에서 보광산 김감사 모이하면 다 알어. 지금 그 후손이 제사 지내고 해. 거기 탑도 쓰러져 있었는데 지금 다시 세워놨어.
<제공자:사리면 방축리, 김용태(남, 46세)>
다) <괴산의 명산 35> (괴산군청 간. 2005. 12. 148-151p)
위치 : 충북 괴산군 사리면 수암리
내용 : 보광산은 산세가 빼어나거나 경치가 좋고 바위가 있다든가 하는 산은 아니다. 그저 나즈막한 육산에 불과하다. 그러나 정상의 봉학사지에 얽힌 전설 같은 현실세계에 인간 욕심의 무상함을 일깨워 주는 곳이기도 하다. 또한 접근이 용이하고 험하지 않아 가족단위로 등산할 수 있는 좋은 산이다.
산행의 시작은 모래재 고개에서 800미터 괴산쪽으로 위치한 수암리 시동마을에서부터 시작한다. 모래재 고개에는 보광산 관광농원이 있어 휴식을 취하고, 특색있는 먹거리와 농원 뒤의 방가로식 숙박시설과 각종 조류를 관찰할 수 있는 사육시설이 있어 가족단위로 찾기에 좋다.
시동마을에서 보광사까지는 차도가 닦여있다. 시동마을 앞 승강장옆에 있는 보광사 안내표지판을 따라 비포장 길을 5분정도 오르면 왼쪽으로 조그만 소류지가 있고, 오른쪽엔 새농심 유기질 비료공장이 보인다. 계속되는 길은 5분정도 더 가면 가파르다. 걸어서 오르기에도 힘이 드는데 차가 오르내리고 있다. 승용차는 가지 못하고 찌프차만 통행할 수 있는 길이다. 시동마을을 출발한지 50분정도면 보광사에 도착한다.
보광사는 없어진 봉학사의 후신으로 그 명성을 간직해오고 있으며 봉학사지 석조여래좌상을 대웅전에 주존불로 모시고 있다. 대웅전 처마끝에서 보면 끝없이 펼쳐지는 낮은 산들이 손에 잡힐 듯 친근해 보이며, 마음까지도 시원해지는 곳이다. 대웅전 오른쪽 바위 밑에선 석간수가 샘솟는데 아무리 가물어도 넘쳐 나는 샘물이 맛 또한 그만이다. 요사체 뒤의 화장실을 오른쪽으로 끼고 돌아 은진송씨 묘가 있는데, 묘 앞으로 잘 나 있는 길을 버려두고 일단 묘로 올라서면 오른쪽으로 길이 잘 보이고 5분정도 가면 나뭇가지 사이로 봉학사지 5층석탑이 보인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 절터에 홀로 남은 5층 석탑은 고려 초기의 작품으로 추정되며 지방유형 문화재로 지정되었다는 안내판이 있다. 탑에서 30미터 정도 가면 큰 묘가 두 개 나타나는데 이것이 봉학사와 관련 있는 묘다.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이 묘자리는 봉학사의 대웅전이 있던 자리로 이 터가 "금계포란형"으로 천하에 드문 명당자리라. 김아무개의 자손들이 세도를 등에 업고 절을 허물어 이 명당 자리에 묘를 썼다 한다. 봉학사가 철거된 지 여러 해 지난 후 괴승이 나타나 앞산의 물길을 둑을 쌓아 돌리도록 하여 후손을 잇지 못하게 했다는 얘기가 전해온다.
묘의 바로 뒤로 주능선이 얕으막하게 지나가고 능선에 올라보면 길이 네 갈래로 갈라지는데, 왼쪽으로 200미터정도가 정상이지만 뚜렷한 봉우리를 형성하고 있지는 않다. 정상을 넘어서는 헬기장 전망대가 있어 증평쪽의 평야가 시원스레 가슴을 열어 준다. 헬기장 전망대에서 5분정도 내려오면 새로닦은 임도와 만나고 보광사 진입도로 맞은편 능선을 타고 모래재 고개로 하산할 수 있다.
네 갈래 길에서 정면으로 난 내리막길을 택하면 백마산까지의 능선 종주나 소매저수지 방향으로 하산할 수 있다. 차를 시동마을이나 모래재에 두고 왔을 경우 왔던 길을 되돌아가야 하겠지만 백마산으로 가는 능선의 고리테 고개에서 소매리 쪽으로 하산하는 것도 좋다. 능선 사거리에서 내리막길를 따라 난 키 큰 철쭉 터널 길을 40분 정도 내려오면 고리테고개에 이르고 여기서 소매저수지로 40분정도 내려가면 사리면의 둔터골 마을로 내려온다.
둔터골에서 15분정도 더 가면 백마초등학교가 나오고 넓은 포장길에 닿게 된다. 고리테 고개에서 백마산까지는 산불이 난 후 벌채로 인해 잡목이 무성히 자라 길도 찾기 힘들고 벌채 후 잔재물이 온통 길에 널려 길이 잘 보이지 않는다.
고리테 고개에서 백마산까지는 1시간 20분 정도면 도착하고 산아래에 있는 백운사로 하산할 수도 있다.
등산코스 (산행시간:약 2시간 40분 소요)
모래재 관광농원(50분)→보광사(10분)→김참판 묘, 봉학사 5층석탑(5분)→ 정상(40분)→고리테 고개(40분)→둔터골(15분)→백마초등학교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