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문중에 잘못 알려진 사실들 -3- 2007 안사연 여름캠프 학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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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7-08-24 09:32 조회1,605회 댓글1건본문
5. 충렬공의 최종 관직명
충렬공의 관직명을 적을때나 부를때 우리는 어떻게 했는가를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우선 1966년에 세운 현재의 비석에는
[高麗 推忠靖難定遠功臣 壁上三韓三重大匡 僉議中贊 世子師 上洛君開國公 諡 忠烈 金方慶 之墓]라고 되어 있습니다. 근래에 상락군개국공의 君자를 郡으로 고쳐 새겨 넣어 바로 잡았습니다.
현재 신도비에는 [上洛君忠烈公金方慶神道碑]
유허비에는 [高麗僉議中贊忠烈公上洛金先生諱方慶遺墟]
고려4대왕과 16공신을 모신 숭의전에는 [僉議令忠烈公金方慶]
시제때 현수막에는 해마다 틀려서 어느해는 [고려시중], [고려첨의중찬], [고려첨의령 충렬공 김방경장군] 등등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이를 정확히 하기 위해서는 고려사에 기록을 밑바탕으로 해야 할 것입니다.
고려사에 나타난 관직을 살펴보면
1273년 윤6월13일 계해 당시 최고위직은 門下侍中
1275년10월25일 임술 관제개혁으로 최고위직 僉議中贊上將軍判典理監察司事
1283년12월22일신축 推忠靖難定遠功臣三重大匡僉議中贊判典理司事世子師으로 치사
1295년 1월9일 갑인 치사때 최고관직이었던 첨의중찬보다 상위직으로 신설된 僉議令 에 봉함
8월27일 기사 上洛郡開國公의 관작을 하사
충선왕(1308-1313)때 宣忠協謨定難靖國功臣壁上三韓三重大匡으로 추증 諡號를 忠烈로 봉하고 왕명으로 신도비를 세움
위의 근거로 최종 관직명인 [高麗 宣忠協謨定難靖國功臣 壁上三韓三重大匡 僉議令 上洛郡開國公 諡 忠烈 金方慶]
간단히 쓰면 [高麗 僉議令 忠烈公 金方慶] [高麗 僉議令 上洛公 金方慶] [忠烈公 金方慶] [上洛公 金方慶] 등이 좋을 듯 싶습니다.
6.신라김씨 시조(휘 알지)선조님의 호칭
결론을 말씀드리면
大輔라는 관직이 처음 보이는 것은 신라 남해차차웅 7년(서기10년)의 기록입니다.
탈해 이전에도 大輔라는 명칭이 있었으리라 추측되지만 기록상 처음 보입니다.(*주1)
탈해는 大輔를 거처서 서기 57년에 신라 제4대왕에 오릅니다.(*주2)
석탈해가 왕으로 재임하는중에 서기58년 大輔벼슬에 호공(瓠公)이 오르게 되고(*주3)
서기 65년에 우리 김문의 비조 (휘알지)할아버님이탄생하십니다.(*주4)
이후 석탈해왕은 김알지를 키워 大輔의 지위에 임명하게 됩니다.(*주5)
여기에는 탈해가 죽은 서기80년은 비조할아버님은 16살이라고 계산되지만 이는 논외로
하겠습니다.(삼국유사에 의하면 26세)
이런 기록 이외에 大輔라는 직위는 고구려에서도 사용하고 있음을 확일 할 수 있었습니다.(*주6)
이외에도 조선왕조실록을 살펴보면 세종조에 지리지 경주에도 (대보(大輔) 호공(瓠公)이라는 기록이 나옵니다.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太輔公이라는 단어조차 나타나지 않고 역사서에 분명히 우리 비조이신 휘알지할아버님이 大輔에 오르셨다는 것으로 보아 비조할아버님의 호칭은 太輔公이 아니라 大輔公이라고 하여야 할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러면 우리 족보에는 왜 계속하여 太輔公이라고 기록되었을까하는 것이 의문입니다만
을유보의 서문을 쓰신 우원공께서 大輔公이라고 쓰신 것을 인쇄과정에세 점이 잘 못되어
太輔公이라고 된 것을 이를 답습하여 계속하여 太輔公이라고 쓰여 온 것이 아닌가 조심스레 추측하여 봅니다
그러나 역사서에 분명히 大輔公이라고 되어 있고, 경주 계림에 위패에도 大輔公이라고 쓰여 있으니 우리 안김문도 大輔公이라고 칭함이 할아버님에 대한 바른 예의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참조;
2003년홈페지게시판편람자료헌정식 춘계학술발표회자료
鼻祖 金閼智 할아버님의 呼稱에 대한 考察
(新羅 官職名은 太輔인가 大輔인가?)金榮煥(大宗會 監事. 忠烈公 22世孫
댓글목록
관리자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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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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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감사합니다. 본 홈 자료실에 올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