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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得臣의 문학과 생애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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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2-06-01 04:12 조회1,53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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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得臣의 문학과 생애 03





金得臣의 생애 -02

---林東喆 (충북대 교수)







40세 (1643)

---가을 8월 西原의 桃汀峽(도정협)에 있었음. (아마 그 해에 신축한 것으로 보임)



42세 (1645)

---숙녕전 참봉이 됨



47세 (1650)

---湖西(西湖)에 있었음



49세 (1652)

---도정협에 있었음









54세 (1657)

---모친상 당함



59세 (1662)

---3월 증광시 병과에 급제. 성균학유를 시작으로 성균전적, 병공예조좌랑, 홍천현감, 강원도사, 성균직강, 정선군수, 풍기군수, 성균사예, 사헌부장령, 제용감정, 사복시정, 군자감정, 종부시정, 사도시정, 승문원판교, 장락원정을 拜官받는다.



---그러나 벼슬길은 순탄하지 않아서 홍천현감과 정선군수의 부임은 臺臣과 宰臣들이 김득신은 시인일뿐 일에는 ? 疎해서 그 직에 적합하지 않다 고 저지하여 부임하지 못했고, 장령은 두 번 제수되지만 역시 不合本職으로 탄핵받기도 한다. 그러던중 그는 出仕가 오히려 禍機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소원했던 대로 사직 낙향할 것을 생각함



---그해 가을 8월에 목천의 栢谷莊에서 괴산 방아현으로 옮겨 醉默堂을 건립하기 시작함









60세 (1663)

---仲春 하순에 취묵당기를 지음. 傀峽之,野+土(괴협지?)에 살았음



62세 (1665)

---금강산으로 유람을 다녀와 [金剛山錄](금강산록)을 지음









74세 (1677)

---가을에 休官하여 괴향으로 돌아 가려고 함



75세 (1678)

---사?시정으로 증광시 시험관 역임



78세 (1681)

---世勳으로 통정대부가 됨









80세 (1683)

---憂老의 恩典으로 가선대부로 위계가 올랐으며 安豊君으로 습봉되다.



81세 (1684)

---明火賊에 의해 취묵당에서 살해됨











(1687)

---가을 朴世堂의 서문을 붙여 목판으로 [백곡집]이 간행됨

---1686년 여름에 쓴 李瑞雨의 서문도 전하는데, 서문 둘이 나란한 본도 있지만 박세당의 것만 실은 본이 가장되었다고 하고 있어 두 종류의 판본이 있음. 목판본은 성균관대학에 낙질로 소장되어 있음.

---원래 김득신의 저술이 방대하였으나 병자호란에 불타고 천여편이 남았다고 하므로 이미 [백곡집] 간행 당시에 젊은 시절의 시가 상당수 일실된 듯함. 또 목천에 살던 손자 可遠이 화재를 당하여 다시 燒亡되었다 함.

---문중에서 필사한 것으로 추정되는 필사본 7책이 현전하는 문집 중 가장 온전함













81세 (1684)

---明火賊에 의해 취묵당에서 살해됨



●[숙종실록]에는 8월 29일 명화적에게 피살을 당하였다고 하였으나,

●[行狀草]에는 설사병에 걸려 고생하다가 약을 복용하여 차도가 있었으나 왼쪽 허벅지에 큰 종기가 터져 8월 30일 별세한 것으로 되어 있다.

●또한 [백곡집] 부록에 실린 [搜錄](수록)에는 개에게 물려 죽었다고 하여 다르게 적고 있다.













▣ 김태서 -

▣ 김윤만 - 졸하신 내용이 기이하네요. 정설은 무엇인가 참으로 궁금합니다.

▣ 김주회 - 학술발표회장에서 임동철 충북대교수 왈 ---숙종실록에 기록된 데로 명화적에게 살해되었다는 내용이 가장 신빙성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문중자료에는 화적에게 살해된 사실이 바람직스럽지 못하여 병으로 별세한 것으로 오도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 김재원 - 감사합니다.

▣ 김태서 -

▣ 김영환 -

▣ 김태영 -

▣ 김재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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