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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과 함께 하는 근세 역사(52) 행복했던 한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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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환 작성일02-06-01 18:21 조회1,75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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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선생님의 일생을 통하여 근세 역사를 살펴 보고 있습니다.



삼일운동이 일어나고 백범선생님은 단신으로 상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의 경무국장이



되십니다. 평소 우리 정부가 수립되면 청사를 닦는 청소부가 되겠다고 하셨는데



상해 임시정부에서도 문지기 수위를 하시겠다고 하셨다고 하나 경무국장을 맡으셨습니다.



당시의 상황을 백범일지에서 인용하면



전략....



[임시 정부의 조직에 관하여서는 후일 국사에 자세히 오를 것이니 약하거니와 나는 위원의 한



사람으로 뽑혔었다. 얼마 후에 안창호 동지가 미주로부터 와서 내무총장으로 국무총리를 대리하게



되고 총장들이 아직 모이지 아니하였으므로 차장제(次長制)를 채용하였다. 나는 안 내무총장에게



임시 정부 문 파수를 보게 하여 달라고 청원하였다.



도산은 처음으로 내 뜻을 의아하게 여기는 모양이었으나 내가 이 청원을 한 동기를 듣고는 쾌락하였다.



내가 본국에 있을 때에 순사 시험 과목을 어디서 보고 내 자격을 시험하기 위하여 혼자 답안을 만들어



보았으나 합격이 못된 일이 있었다. 나는 실력이 없는 허명(虛名)을 탐하기를 두려워할뿐더러, 감옥에서



소제를 할 때에 내가 하느님께 원하기를, 생전에 한 번 우리 정부의 정청(政廳)의 뜰을 쓸고 유리창을



닦게 하여 줍소서 하였단 말을 도산 동지에게 한 것이었다.



안 내무총장은 내 청원을 국무회의에 제출한 결과 돌연 내게 경무국장의 사령을 주었다. 다른 총장들은



아직 취임하기 전이라 윤현진(尹顯振), 이춘숙(李春塾), 신익희(申翼熙) 등 새파란 젊은 차장들이



총무의 직무를 대행할 때라 나이 많은 선배로 문 파수를 보게 하면 드나들기에 거북하니 경무국장으로



하였다는 것이었다.



나는 순사 될 자격도 못 되는 사람이 경무국장이 당하냐고 반대하였으나 도산은,



"만일 백범이 사퇴하면 젊은 사람들 밑에 있기를 싫어하는 것같이 오해될 염려가 있으니



그대로 행공(行公)하라"



고 강권하기로 나는 부득이 취임하여 시무하였다.]





이해는 기미 삼일운동 다음해인 1920년은 45세 되시는 해입니다.



이해 8월 부인 최준례여사는 아들 (김인)을 데리고 상해로 건너오셔서



모처럼 가족이 모여사는 단란함을 갖어보시기도 하였읍니다만,



이도 잠시 뿐이었습니다. 이이야기는 다음에 하기로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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