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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조僞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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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영 작성일07-09-13 07:32 조회1,39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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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조僞造

조선에서 심심찮게 위조 사건이 발생하는 분야는 사조단자(四祖單子)였다. 과거에 응시하는 거자(擧子)들은 친가와 처가 쪽의 증조부, 조부, 부친, 외조부의 명단과 이력이 담긴 사조단자를 제출해야 했다. 사조단자를 제출하게 한 것은 부패 관료들의 명단인 ‘장오인녹안(贓汚人錄案)’에 기록된 인물들 자손의 관직 진출을 막으려는 뜻도 있었지만 본질은 양반 사대부 가문이 관직을 독점하려는 의도였다. 양반 사대부의 필수 교양이 족보에 대한 지식인 보학(譜學)이었던 것도 마찬가지였다. 가짜 양반을 가려내 배타적 특권을 유지하겠다는 의도였다.

임진왜란 때 전비(戰費) 마련을 위해 이름을 비운 관직 임명장인 공명첩(空名帖)을 판매하면서 양인들도 양반 지위를 살 수 있었다. 국왕 선조가 “승지를 보내 공명첩을 가지고 민간에 드나들면서 곡식을 모으게 하면 반드시 소득이 있을 것이라 여겨진다”(‘선조실록’ 27년 10월 18일)라고 말한 데서 그 실상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공명첩을 산 양인(良人)의 자식들은 과거에 응시할 수 없었다. 공명첩을 산 부친 이외의 조상들은 양반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공명첩은 양반은 면제였던 군포(軍布) 납부의 의무에서만 벗어나게 해줬을 뿐이다.

조선 후기 농업생산력이 발달하면서 공명첩으로 양반 지위를 산 양인들은 물론 양반 못지않은 실력을 갖춘 중인·서얼·양인들이 늘어났어도 사조단자 때문에 과거에 응시하지 못했다. 이 때문에 생긴 편법이 타도(他道)에 가서 과거에 응시하는 것이었다. 숙종 24년(1698년) 10월 강원도의 감시(監試) 때 다른 도의 유생들이 사조단자를 위조해 응시했는데도 시관(試官)이 금지하지 않았다고 유생 이후가 상경해 상소한 것이 이를 말해준다. 사회 밑바닥에서는 폐쇄적인 신분제 철폐 움직임이 강해졌으나 양반들은 요지부동이었다. 실력보다 신분만을 중시했던 조선의 국력 약화는 필연이었다.

현재의 학력위조 파문의 본질은 학벌이 일종의 신분이 된 우리 사회의 폐쇄적 구조에 있다. 학력 위조 혐의자들에 대한 색출이 본질인 것처럼 왜곡돼서는 이런 폐쇄적 사회구조는 개선되지 못할 것이다.

역사평론가 -이덕일舍廊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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