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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영공(김순) 묘갈 번역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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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만 작성일02-06-02 05:27 조회1,52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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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 묘갈 번역문】





(출전 : 안양문화유적총람/안양시 문화공보담당관실/1996. 2월)







고려국이중대광상호군증시문영안동김공순지묘갈명(전액)



중대광판삼사보문대제학 상호군 김순묘갈명병서





---옛적에 이르기를 군자(君子)라고 하는 것은 덕행(德行)을 두고 말한 것이냐? 공



업(功業)을 두고 말한 것이냐? 하면 오직 덕행이오. 공업은 아니다. 왜냐하면 덕행



은 마음에 있는 것이오. 공업은 때(時機)에 있는 것이니 마음에 있는 것은 사람이



수양할 수 있는 것(이요. 때에 있는 것은 하늘이 주는 바이니) 사람이 수양할 수



있는 것을 수양하는 것이 군자이다.



---무릇 덕행은 충효가 근본이 되므로 능히 충효(忠孝)로써 당세(當世)에 입신양명



한 분은 오직 우리 판삼사 상군(判三司 相君)이 계실 뿐이다. 공(公)의 휘(諱)는



순(恂)이오. 자(字)는 귀후(歸厚)며 신라왕 김부(新羅王 金傅)의 십세손(十世孫)으로



태어 나시니 안동부(安東府)는 즉 그의 조상으로부터 대대로 내려오는 고향이다.



---증조의 휘(諱)는 민성(敏成)이시니 좌복야(左僕射)로 추봉(追封)되고 장야서승겸



직사관(掌冶署丞兼直史官)을 지냈으며, 조(祖)의 휘(諱)는 효인(孝印)이시니 중서령



(中書令)으로 추봉(追封)되시어 정의대부 병부상서 한림학사 충사관수찬관 지제고



(正議大夫 兵部尙書 翰林學士 充史觀修撰官 知制誥)를 지내시고 고(考)의 휘(諱)는



방경(方慶)이시니 원제(元帝)로부터 중봉대부 관고려군 도원수 추충정난 정원공신



광정대부 삼중대광 판도첨의사사 전리사사 상장군 상락군개국공(中奉大夫 官高麗



軍 都元帥 推忠靖難 定遠功臣 匡靖大夫 三重大匡 判都僉議使司 典理司事 上將軍



上洛郡開國公) 식읍(食邑) 일천호(一千戶)를 선수(宣授)하니 실봉(實封)은 삼백호



(三百戶)이며 돌아가신 후에 고려(高麗)에서 선충 협모 정난 정국공신 벽상삼한



삼중대광(宣忠 協謀 靖難 靖國功臣 壁上三韓 三重大匡)을 증직(贈職)하고 시호(諡



號)는 충렬이라 내렸다.



---공의 어머님은 박씨요 중서사인 지제고(中書舍人 知制誥) 익정(益旌)의 따님으



로서 음평군부인(陰平郡夫人)을 봉(封)하였다.



---공께서 글씨를 잘 쓰심으로 비문을 많이 쓰시고 소년시절부터 학문에 힘쓰시고



선대(先代)의 음덕(蔭德)으로 벼슬에 들어가 장생서승(掌牲署丞)이 되시고 후에 별



장(別將)이 되어 견룡행수직(牽龍行首職)을 맡아서 비록 동으로 갔다 서로 갔다



하여도 그 뜻은 항상 문학에 두었으니 대개 부친께서 왕조 양대(王朝 兩代)의 최



고(最高) 벼슬인 장상(將相)을 지냈으나 오직 과거(科擧)를 보지 못한 것이 한이



되었으므로 아드님이 능히 조부의 업적을 다시 회복하기를 기원했기 때문이다.



---공이 그러므로 힘써 배우기를 게을리 하지 않더니 지원(至元) 十六年 춘계과장



(春季科場)에서 금방 부장원(金榜 副壯元)으로 급제하여 그 해에 처음으로 섭랑장



(攝郞將)에 임명되더니 후에 다시 국학직강(國學直講)이 되시니 이는 공이 능히



부친의 유한(遺限)을 펴신 것이다. 이로부터 부친께서는 막내 아들을 더욱 사랑하



여 항상 신변에서 떠나지 못하게 하시고 하정사(賀正使)로 가실 때도 꼭 데리고



다니셨으나 다만 일본을 정벌하러 가실 때는 따라오지 못하게 하신 것은 종군하



여 위태한 일에 참여치 못하게 함이었다.



---공이 이에 출정행차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몰래 먼저 군함에 올라타고 갔는



데 마침내 부친을 호위하고 구원(救援)한 공(功)이 자못 컸으니 이는 공이 오로지



충효로서 발분(發憤)하여 자신을 돌보지 않은 것이다.



---임오년(壬午年)에 전중시사(殿中侍史)로 승진하고 그 이듬해에 상주판관으로 나



가서 선정(善政)한다는 소문이 들어오니 일년도 못되어 불러들여 전법좌랑 □□



통예문사 고공정랑(典法佐郞 □□通禮門事 考功正郞)으로 천거(薦擧)되었다.



---임술년(壬戌年)에 남방사신(南方使臣)의 명을 받고 선친을 배행(陪行)하여 고향



조부 묘소에 다녀왔으며 무자년(戊子年)에 비서소윤 지통예문사(秘書少尹 知通禮



門事)를 제수(除授)하더니 그 해에 왕이 공(公)을 명하여 세자부 행이별감(世子府



行李別監)을 삼고 사부(師傅)의 책임을 위촉(委囑)하였으며 임진년(壬辰年)에 조현



대부 전법총랑 지제고(朝顯大夫 典法摠螂 知制誥)를 첨가 위임하더니 누차 승진



되어 소부윤□□□학 군부총랑 전리총랑 조봉대부 비서윤 삼사우윤(少府尹□□□



學 軍簿摠郞 典理摠郞 朝奉大夫 秘書尹 三司右尹)에 모두 삼자함(三字銜 : 봉조하



(奉朝賀) . 종삼품이 치사후에 특별히 받은 직위)를 겸하였다.



---원정(元貞) 을미년(乙未年) 겨울에 과거(科擧)로 선발된 동지들은 모두 당시의



명사(名士)들이라 크게 화려한 연석(宴席)을 베풀으니 □□□□사(士) 조야(朝野)



가 가상히 여기고 감탄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이는 선친에 대한 극진한 영광(榮



光)이요 효도인 것이다.



---이 해에 조의대부(朝議大夫)로 올라가고 병신년(丙申年)에 세자사인을 겸하고



대덕정유년(大德丁酉年)에 국학전주(國學典酒)로 임명하고 또 다시 정의대부 집현



전 학사 좌산기상시(正議大夫 集賢殿 學士 左散騎常侍)를 배명하였다.



---이 해 7월에 다시 밀직사 우승지 국학제주 보문각학사 지민조사(密直司 右丞旨



國學祭酒 寶文閣學士 知民曹事)로 배명(拜命)하고 삼자(三字)는 전대로 두었다. 8



월에 봉익대부 삼사좌사 숭문관학사(奉翊大夫 三司左使 崇文館學士)로 승진되고



9월에 또 다시 정헌대부 밀직사 판비서시사 충사관 수찬관 지제고 지군부사시(正



獻大夫 密直司 判泌書寺事 充史館 修撰官 知制誥 知軍簿司寺)가 되고 12월에 봉



익대부 밀직사부사 문한학사(奉翊大夫 密直史副使 文翰學士)를 배명하였다.



---기해년(己亥年)에 공께서 그칠 줄을 아시고 벼슬을 사퇴하셨다. 그 이듬해 8월



에 선친께서 세상을 하직하심으로 유원(遺願)에 의하여 고향 선영(先塋)에 장례를



모셨다. 경술년(庚戌年) 겨울에 선친 묘소에 제사를 지내고 임자년(壬子年)에 다시



중대광 상락군(重大匡 上洛君)을 봉하여 선친의 작위(爵位)와 식읍(食邑)을 이어



받았다.



---기미년(己未年)에 또 선친 묘소에 성묘차 가시는데 왕께서 계자 영후(季子 永



煦)를 시켜 모시고 배향케 하였으니 왕께서도 공의 행차를 극진히 배려한 때문이



다.



---지치원년(至治元年 : 1321) 신유(辛酉)에 어진 정승(政丞)을 기용하기 위하여 공



을 발탁하여 판삼사사(判三司事)를 삼고 팔월에 또 보문각 대제학 상호군(寶文閣



大提學 上護軍)을 명하였다.



---그 달 21일에 노환으로 자택에서 별세하시니 향년 64세이다. 공은 성품이 돈후



(敦厚)하고 강직(剛直)하고 내유(內柔)하시며 효제(孝悌)와 충신(忠信)은 천하에 출



중(出衆)하였다. 아깝도다! 공의 재덕(才德)으로 만일 몇 해만 더 사셨더라면 국가



의 이익과 혜택이 어찌 만민(萬民)에 미치지 않았으며 명예와 지위도 어찌 이에



서 그칠뿐이랴?



---배(配)는 광정대부 첨의중찬 수문전태학사 감수국사 판전리사사 세자사 증시



문경공(匡靖大夫 僉議中贊 修文殿太學士 監修國史 判典理司事 世子師 贈諡 文敬



公) 휘(諱) 허공(許珙)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4남3녀를 낳으셨는데 장남 영돈(永暾)



은 현재 도관직랑 지합주사(都官直郞 知陜州事)로 있고 2남 영휘(永暉)는 현재 흥



위위 보승별장(興威衛 保勝別將)으로 있고 3남 사순(斯順)은 삭발하고 자혜종 대



덕이 되었고, 4남 영후(永煦)는 사헌부 지평으로 있다.



---장녀는 입내시 중정대부 친어군대호군(入內侍 中正大夫 親禦軍大護軍) 정책에



게로 출가하고 2녀는 대광 상당군(大匡 上黨君) 백이정에게 출가하고 3녀는 원나



라 좌승상(左丞相) 아홀반(阿忽反)의 아들인 사인(舍人) 별리가불화(別里哥不花 )



에게로 출가하였다.



---영돈(永暾)의 문중(門中)에서 이미 장지를 덕수현 마산(德水縣 馬山)위에 잡아놓



고 장차 장례를 지내려고 하는데 나는 그의 선친의 친구인지라 공의 행장(行狀)



을 가지고 와서 명(銘)을 지어달라고 간청함으로 내가 비록 병들었으나 굳이 사



양치 못하고 받아서 명(銘)을 쓰노라. 명문(銘文)에 이르기를



---혁혁한 충렬(忠烈)은 동국(東國)의 황제의 양위(讓位)와 같고 분양(汾陽)이란 황



제의 양위요(임금이 분양에서 선인과 나서 황제의 자리를 물려 주었다는 고사에



서 나온 말) 만당(滿堂)한 자질(子姪)들은 모두가 수재요 영재로서 백미(百眉)와



같이 우수하니 당시에 이르기를 제일 어질다고 하였도다.



---선친의 유한(遺寒)은 과거(科擧)에 급제하지 못함이더니 공이 그 뜻을 이어 문



학에 뜻을 예민(銳敏)하게 세우고 대대로 전해오는 조상의 법도를 본받아 시시(時



時)로 금낭(錦囊 : 시 작품을 넣은 비단주머니)이 찰만큼 시 짓기에 노력하더니



묘령(妙齡) 22세에 금방(金榜)에 급제하여 이름이 사방에 떨치니 대각에서 전파하



는 고시문은 향기가 돌았도다. 한번 학문의 권세를 잡으니 형제가 열(列)을 이루



도다.



---존당(尊堂)의 기쁜 눈물은 흘러 축하하는 술잔에 넘치고 생전에 정승을 지내어



검은 구렛나루에 금장(金章)이 빛나도다. 힘껏 영화(榮華)와 효도를 다하여 고향



사람들이 애달파 하노라. 자식된 도리를 다하니 만복이 내리도다. 만년(晩年)에



은퇴(隱退)하매 하느님의 뜻이 담담(淡淡)하도다.



---마침내 선군(先君)의 작록(爵祿)을 습봉(襲封)하니 문호(門戶)가 다시 빛이 나도



다. 정계에 참여치 않고 은퇴 후에 9년간의 세월을 허송(虛送)하다가 별안간 극품



재상(極品宰相)에 올랐으니 민생(民生)도 안정되고 나라도 태평하도다.



---아직 돌아가실 나이도 아니신데 급작스럽게 황천(黃泉) 길을 재촉하니 공에게



있어서는 여한(餘恨)이 없겠으나 나라를 위해서는 손실이 아닐 수 없다. 이에 명



(銘)을 새기니 광채는 천만년에 끝이 없으시리라.



---대원지원(大元至元) 원년(元年) 신유(辛酉) 十월 十四일



---선수 조열대부 한림직학사 삼중대광 검교 첨의정승 우문관 대제학 감춘추관사



(宣授 朝烈大夫 翰林直學士 三重大匡 檢校 僉議政丞 右文館 大提學 監春秋館事)



여흥군 민지(驪興君 閔漬) 찬(撰).





(안동김씨 기미대보 pp214.에는 문영공 묘지문으로 소개되어 있습니다)









▣ 김태서 - 글 감사드립니다.

▣ 김태영 -

▣ 김발용 - 지근에 계신 문영공할아버지..곧 찿아뵐 계획입니다. 일전에 올려주신 문영공 할아버지 참배기가 많은 도움이 될 듯 합니다.

▣ 김항용 - 감사합니다.

▣ 김재익 -

▣ 김영환 -

▣ 김영환 - 고맙습니다ㅏ....

▣ 김주회 - 귀한 자료 감사합니다.

▣ 郡/김태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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