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군지순례10(충주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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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만 작성일02-06-02 09:03 조회1,721회 댓글0건본문
충주중원지(충주시문화원, 1984)
제12편 인물중.
pp1030. 40. 金士衡(김사형, 1333 충혜왕 복위 2 ∼ 1407 태종 7)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 字(자)는 平甫(평보)이며, 號(호)는 洛圃(낙포)이다. 본관
은 안동이며 上洛候(상락후) 金永煦(김형후)의 손자, 副知密直司事(부지밀직사사)
金 (김천)의 아들이다. 조부의 蔭德(음덕)으로 鶯溪館直(앵계관직)이 된 후 監察
糾正(감찰규정)을 거쳐서 恭愍王(공민왕)때 문과에 급제하고 禑王(우왕) 3년(1377)
에 執義(집의)가 되었다.
--趙浚(조준) 등과 臺諫(대간)에 근무했으며 개성부윤에 오르고 端誠輔理功臣(단
성보리공신)의 號(호)를 받았다. 외직으로 交州江陵道(교주강릉도) 都觀察黜陟使
(도관찰출척사)가 되었는데 공명하고 은혜를 베풀어 명성이 높았다. 恭讓王(공양
왕) 2년(1390) 에 지밀직사사동지경연사(知密直司事同知經筵事)를 거쳐 지문하부
사(知門下府事)가 되어 사헌부 대사헌(司憲府 大司憲)을 겸하였다. 뒤에 三司右使
(삼사우사) 동판도평의사사사(同判都評議使司事)를 拜命(배명)받았다. 1392년 여러
將相(장상)과 함께 李成桂(이성계)를 추대하여 조선이 건국되자 문하시랑찬성사
(門下侍郞贊成事)로 판상서사사(判尙瑞司事)와 병조전서(兵曹典書)를 겸임하고 開
國功臣一等(개국공신일등)이 되었다.
---이어 문하우시중(門下右侍中)에 上洛伯(상락백)으로 封(봉)해 졌다. 태조 7년
(1398) 1차 왕자의 亂(란)에는 장자에게 禪位(선위)하여야 한다고 주장했고 정종
이 즉위하자 定社功臣一等(정사공신일등)이 되었다. 정종 1년(1399) 登極使(등극
사)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가 되었으며, 태종 1년(1401) 좌
정승(左政丞), 이듬해에 영사평부사(領司平府事)로 府院君(부원군)이 되어 공직에
서 물러났다. 벼슬을 하면서도 한번도 탄핵을 받은 일이 없었다. 翼元(익원)을 시
호하였다.
---조선 초기에 충주목사가 되었는데 剛明(강명)으로 다스렸다고 한다.
(문헌 : 고려사, 태조.태종실록, 신증동국여지승람)
pp1069. 142. 金時讓(김시양, 1581 선조 14 ∼1643 인조 21)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초명은 時言(시언), 자는 子中(자중), 호는 荷潭(하담),
본관은 안동, 비안현감 김인갑의 아들이다. 선조 38년(1605) 庭試文科(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三司(삼사). 世子侍講(세자시강)의 여러 벼슬을 거쳐 吏曹郞(이조랑)
을 지냈다. 광해군 3년(1611) 全羅道(전라도) 都事(도사)가 되어 鄕試(향시)를 주
관할 때 詩題(시제)에 왕의 실정을 비유한 문제를 출제했다 하여 종성에 유배, 광
해군 8년(1616) 영해(寧海)에 移配(이배)되었다. 1623년 仁祖反正(인조반정)으로
풀려나와 예조좌랑. 병조정랑. 修撰(수찬). 校理(교리)를 역임, 이듬해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都體察使(도체찰사) 이원익(李元翼)의 從事官(종사관)으로 활약, 난이 평
정된 후 應敎(응교)로 文學(문학)을 겸임, 이어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다.
---丁卯胡亂(정묘호란, 1627) 후 서북지방의 경비가 중요시 되자 특히 평안도 관
찰사로 발탁, 인조 9년(1631) 병조판서에 올라 8道都元帥(8도도원수). 4道體察使(4
도체찰사) 등을 겸임하며 斥和(척화)를 주장했다. 그후 강화유수. 호조판서. 병조
판서. 4도의 관찰사를 역임, 知中樞府事(지중추부사)를 거쳐 인조 19년(1641)「宣
祖實錄(선조실록)」을 改修(개수)할 때 判中樞府事(판중추부사) 겸 판춘추관사(判
春秋館事)로 이에 참여했으나 眼疾(안질)로 맹인이 되었으므로 중도에서 사직, 충
주에 내려가 있다가 죽었다.
---典籍(전적)과 經史(경사)에 밝았으며, 인조때 淸白吏(청백리)에 錄選(녹선)되었
다. 시호는 忠翼(충익), 회령(會寧)의 향사(鄕祠)에 祭享(제향)되었다.
--저서로는「荷潭破寂錄(하담파적록)」「荷潭集(하담집)」「 溪記聞(부계기문)」
이 있다.(문헌 : 인조실록, 국조명신록)
pp1112. 270. 金在玉(김재옥, 1934 ∼1963)
--충북 음성군 감곡면 상평리에서 출생, 1949년 음성여자중학교를 거쳐 충주사범
학교를 졸업하고 1950년 6월 1일 동락국민학교 교사가 되어 근무하던 중 6.25를
당했다. 북괴군의 남침은 파죽지세로 내려와 7월 5일 음성군 무극리가 점령되었
다. 국군 6사단 7연대장 林富渾(임부혼) 중령은 7월 6일 새벽 5시 무극리를 공격
하여 공방전을 벌이다가 음성으로 철수하였다. 적은 7월 7일 주덕면 선양리를 거
쳐 충주방면으로 남진 중이었다. 국군 7연대는 다시 음성을 출발하여 제1대대는
무극리와 음성간을 잇는 도로를 방어하고 제2대대는 우측의 644고지를 재탈환하
여 음성 충주간 중간지대에서 적과 대치하고 있었다. 644고지에서 적진을 관측하
던 제2대대장 金鍾洙(김종수) 소령은 동락국민학교를 중심으로 적의 연대 병력이
집결하고 교정에는 수십대의 차량과 포가 포진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한편 김재옥 여교사는 학교를 지키고 있다가 적의 병력이 학교 교정에 집결
하는 것을 보고 기지를 발휘하여 적군을 안심시키고 학교에서 4㎞가 넘는 험준한
가섭산 644 고지에 매복 중인 아군에게 적 15사단 예하 48연대와 포병연대의 배
치 상황을 알려 주었다.
---적은 김재옥 교사의 말을 믿고 안심하고 저녁식사 준비에 바빴다. 이 틈을 타
서 아군은 불과 400여명으로 적의 대병력에 기습 공격을 가했다. 적 사살 8백여
명, 생포 90명, 포 52문, 소총 천여정, 차량 60대 등을 얻는 큰 전과를 올렸다. 이
전과로 7연대는 전원 1계급 특진을 하게 되었다. 19세된 여교사의 기지와 민첩한
행동이 있었던 것은 오로지 불타는 반공 애국 정신의 발로였던 것이다.
---김교사는 그후 소대장이었던 이득주 소위와 결혼하여 군인가족으로 생활하다
1963년 12월에 고재봉이라는 자의 엉뚱한 저격대상으로 오인받아 일가족이 참변
을 당했다.
---그 후 국방부에서는 김교사의 빛나는 반공정신을 널리 알리고자 「전쟁과 여
교사」라는 영화를 제작 상영하였다.
---당시 전적을 기념하는 현충비가 1968년 세워졌으며 1976년 7월에는 충주여교
사협의회에서 김교사의 장한 공적을 기록한 행적비를 동락국민학교 교정에 세웠
다.(문헌 : 내고장전통가꾸기(중원군))
【옮기는이 註】
▣여교사 김재옥의 세계▣
---자랑스런 여교사 김재옥은 음성군 감곡면 상평리 출신으로서 문온공파 음성
공 후손이라고 하였습니다만, 정작 문온공파세보(1992년 임신)에는 어찌된 영문인
지 기록이 누락되어 있어 향후 파보 또는 대동보 편찬시 삽입하여 바로잡아야 할
것 입니다.
● 먼저 재옥아주머니의 부친 완묵공의 친가쪽 세계를 살펴 보았습니다.
-1세(충렬공 방경) 2세(판서공 선) 3세(양간공 승택) 4세(평장사공 묘)
-5세(문온공 구용) 6세(부사공 명리) 7세(직제학공 맹헌) 8세(참의공 자양)
-9세(참판공 예생) 10세(병사공 윤종) 11세(음성공 진강) 12세(하양공 대화)
13세(계), 14세(영후), 15세(익서), 16세(시정 : 규서공의 장자), 17세(남신),
18세(찬원),19세(호인), 20세(의신), 21세(형식), 22세(상준), 23세(완묵), 24세(재옥)
---충렬공 22세손 상준공은 순묵, 시묵, 완묵 3형제를 두셨는데 시묵공은 계족상
갑공(월정리 남술계)의 양자로, 완묵공은 계족숙부상익공(월정리 남술계)의 양자
로 각각 입호되었습니다. 완묵공은 재옥 따님외 아들이 없어 맏형 순묵공의 차자
재혁을 다시 양자로 입호하였는데 상평리 남신계, 월정리 남술계 어디에도 재옥
아주머니에 대한 기록이 없습니다. 현재 완묵공의 손자는 돈회, 덕회와 손녀 회영
이 있습니다.
● 다음은 완묵공의 양가쪽 세계를 정리해 봅니다.
-1세(충렬공 방경) 2세(판서공 선) 3세(양간공 승택) 4세(평장사공 묘)
-5세(문온공 구용) 6세(부사공 명리) 7세(직제학공 맹헌) 8세(참의공 자양)
-9세(참판공 예생) 10세(병사공 윤종) 11세(음성공 진강) 12세(하양공 대화)
13세(계), 14세(영후), 15세(규서), 16세(시형 : 시정의 아우), 17세(남술),
18세(혜원),19세(건인), 20세(의수), 21세(주식), 22세(상익), 23세(완묵), 24세(재옥)
이러한 사실은 문온공파세보(1992)를 바탕으로 재옥아주머니와는 친가쪽 8촌간이
며 안동김씨대종회 고문, 음성공종회 명예회장(초대회장)이신 저의 숙부 재용어른
의 증언을 통하여 기록하였음을 부기합니다. 한가지 덧붙일 것은 이득주, 김재옥
사이의 장남 이훈은 고재봉 사건 당시 서울에 유학중인 관계로 화를 면하고 생존
해 있음을 밝혀둡니다.
그리고 시군지순례 타이틀 특성상 이하의 글은 본 홈페이지 1076. 자랑스럽고도
가슴아픈이야기(2/16)와 중복되나 다시한번 게재함을 이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제13편 중원문화중.
pp1322. ④현충탑
☞ 있는곳 : 충북 중원군 신니면 대화리 동락국민학교 교정
☞ 크 기 : 높이 770㎝
☞ 만든때 : 서기 1968년
--이 탑은 동락전투를 승리로 이끄는데 중요한 정보를 제공한 김재옥 여교사의
업적을 기리고 산화한 동료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당시 박격포 반장인 신용관(申
用寬) 중위가 1968년에 세웠다. 탑의 규모는 3단계의 기단위에 높이 6m의 탑신을
정사각형으로 세우고 위로 갈수록 작아지게 만들었다.
【현충탑 건립문】
--국가에 바친 그대의 충성을 앙모하며 이곳에 산화한 동료의 명복을 비노라.
------------------------------------1968. 12. 17.
----------------------------------- 신 용 관
pp1322. ⑤전승비
☞ 있는곳 : 충북 충주시 신니면 대화리 산1번지(동락초등학교 건너편 산밑)
☞ 크 기 : 전체높이 400㎝
☞ 만든때 : 서기 1973년 7월 7일
--이 비는 북괴가 불법 남침으로 일어난 6.25동란때 한국군의 승전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비이다. 높이 26㎝의 계단을 5계단 쌓고 그 위에 높이 114㎝와 길이
215㎝의 돌과 높이 280㎝ 나비 82㎝의 돌을 두 개 얹어놓아 만든 비이다. 이 전
투의 약사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6.25 불법남침을 감행한 북괴군은 파죽지세로 남하하여 7월 5일에는 음성읍 금
왕읍 무극리까지 점령하였다. 이 무도한 적군을 격퇴하기 위하여 제6사단장 김종
오(金鍾五) 대령은 예하 제7연대장 임부택(林富澤) 중령에게 7월 6일 05시를 기하
여 공격토록 명령했다. 이때 제7연대 제 1, 2, 3대대는 춘천에서 후퇴하여 음성군
금왕읍 백야리 및 가엽산 줄기인 644고지 등에서 매복중이었으며 명령을 받은 임
부택 제7연대장은 계획된 시간에 각각 공격을 개시했다. 장시간의 격전 끝에 제1
대대는 동일 11시에 무극리를 탈환했으나 부대를 재편성할 사이도 없이 전진중
14시 무극리 북방 2㎞ 지점에서 적 예비대의 공격을 받아 다시 음성으로 철수하
였다. 적은 장호원에서 남하하여 7월 7일 12시 주덕면 신양리를 거쳐 충주방면으
로 남진중에 있었으며 우리 제7연대 1, 2대대는 음성으로부터 다시 출발 무극리
에 돌입했으나 적은 철수하고 없었으므로 접전없이 점령하였다. 이에 1대대는 무
극리 음성간을 잇는 도로를 방어하고 제2대대는 우측의 644고지를 재점령하여 음
성 충주간 중간 지대에서 적에 대비했다. 644고지에서 적진을 관측하던 제2대대
장 김종수(金鍾洙)소령은 동락국민학교를 중심으로 적군 연대 병력이 집결하고
교정에는 수십대의 차량과 포가 포진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때 동락국민학
교 김재옥(金在玉) 여교사가 기지를 발휘하여 적군을 안심시키고 자신은 제2대대
장 김종수소령에게 적 15사단 예하 48연대와 포병연대의 배치 상황을 상세히 제
보했다. 김소령은 당시 644고지를 확보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었으나 김재옥 여교
사의 제보에 따라 기습의 좋은 기회라고 판단 17시를 공격시간으로 정하고 제 6,
7중대로 하여금 적의 퇴로를 차단케 하였으며 각 중대는 공격지점으로 이동했다.
김재옥 여교사로부터 무극리 일대는 국군이 철수하고 없다는 정보를 믿고 적은
안심하고 석식 준비를 하였고 경비는 소홀히 하였다. 정각 17시에 제5중대가 먼
저 적에게 집중 사격을 하였다. 불의의 공격을 받은 적은 대피하기에 어쩔줄을
몰랐고 김종수소령은 박격포 반장인 신용관(申用寬) 중위로 하여금 제1탄을 발포
케하니 운동장에 방열된 적의 포진지 중앙에 정확하게 명중하여 적의 포는 순식
간에 괴멸하였다. 다음날 미명에 실시된 아군의 소탕전으로 적은 완전 섬멸되었
다. 이전투의 전과는 차량 60대, 장갑차 3대, 기관총 47정, 포 12문, 박격포 35문,
소총 1000여정을 노획하거나 파괴하였다. 이승만 전대통령께서는 제7연대 전장병
에게 1계급 특진의 은전을 내렸으며 노획된 무기는 대전에서 전시되었고 각종 무
기 1점씩은 UN본부로 이송하여 소련제 무기의 증거품으로 제시했다.
【비 문】
--우리 민족의 역사상에 그렇게도 처참한 피를 뿌린 1950년 6.25동란 동족상잔의
비극이야말로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슬픈 일이었다. 그러기에 북한 공산군들의 반
역적인 남한 침공때 우리는 조국과 자유를 위하여 그들과 싸우면서도 동포의 양
심으로 울며 싸웠던 것이다. 마침내 비인간적이요 반민족적인 그들을 격퇴시켜
승리를 거두었던 것은 실로 다행한 일이었던 바 가장 통쾌했던 것은 무극리 전투
였다. 우리 국군 제6사단 제7연대 제1대대 장병들은 7월 6일 치열한 전투 끝에
무극리를 탈환하고 그대로 북진하다가 역습을 받아 음성 쪽으로 후퇴 제2대대도
진천으로 향하다. 다시 음성으로 귀환 제3대대는 용원리 방면으로 철수했다. 7월
7일 공산군 제15사단 제48연대 병력이 장호원으로부터 충주를 향해 남쪽으로 내
려옴으로 우리 제1대대는 무극리와 음성사이를 방어하고 제2대대는 644고지를 점
령했었다. 이때 공산군들은 동락국민학교에 전병력을 집결 수십대 차량과 일개
대대의 포까지 설치했으나 이를 발견한 제2대대는 병력 겨우 4백명 연대의 지휘
를 받을 길조차 없으므로 주저하다가 절호한 기회이므로 공격을 결정했었다. 마
침내 포화는 터졌다. 7월 7일 정각 17시였다. 제6중대의 집중 사격은 문자그대로
청천벽력이었다. 다시 이어 우리 제8중대의 포탄이 또 떨어졌다. 너무나 정확하게
적의 포진지 한복판에 명중되어 포대는 완전 파괴되고 시체들이 공중에 떠 올랐
으며 도망가는 적들마져 우리들의 포위망에 섬멸되어 최후의 개가를 부르니 8일
8시였다. 이것이 통쾌한 승첩을 거둔 그날의 전투였거니와 굳이 그 사실을 새겨
여기에 비를 세우는 뜻은 뒤에 오는 자손들에게 피흘린 일을 기억케하고 조국 수
호와 자유평화를 사랑하는 마음을 길러 민족의 염원인 통일 성업을 이루게 하고
자 함이니 누구나 여기 오거든 옷깃 여미고 묵념을 올리며 나라 사랑할 생각을
거듭 다짐합시다.
---------------------------------1973년 7월 7일
---------------------------------이은상 짓고 김충현 쓰고
---------------------------------충청북도지사 태종학 세움
pp1324. ⑥김재옥 행적비
☞ 있는곳 : 충북 중원군 신니면 대화리 동락국민학교 교정
☞ 크 기 : 높이 210㎝
☞ 만든 때: 서기 1976년 7월 7일
--이 비는 김재옥 여교사의 빛나는 반공정신을 찬양하고 그의 행적을 기리기 위
하여 충주여교사 협의회에서 세웠다. 규모는 받침돌 위에 40cm 높이의 지주를 세
우고 지주 위에 나비 155㎝ 높이 95㎝의 직사각형의 판판한 면에 글자를 새겼다.
【비 문】
--김재옥 교사는 1934년 3월12일 음성군 감곡면 상평리에서 태어나 음성 여자중
학교를 거쳐 충주사범학교를 졸업, 1950년 교사 발령을 받아 중원군 동락국민학
교에 부임한 그해 이북 공산 괴뢰의 불법 남침으로 6·25동란이 발발 7월 6일에
는 이곳 동락까지 적의 병력이 침투되었고 적의 탱크를 비롯한 수많은 무기와 장
비가 본교 교정에 집결함을 본 김교사의 기지는 날이 어두워짐을 이용하여 4킬로
가 넘는 험준한 가엽산 644고지에 매복중이던 아군에게 적의 정세를 알려 불과 4
백여명의 소수 병력으로 적 1개 연대를 기습 공격하여 완전 섬멸하는 대첩을 거
두게 하였다. 이는 오로지 19세 김재옥 교사의 기지와 민첩한 행동과 불타는 애
국 지성에서만이 해낼 수 있었던 결과이며 이 나라의 장한 반공 여성으로서의 귀
감이라고 할 것이다.
--김교사는 그 후 당시의 소대장이었던 이득주 소위와 결혼 강원도 인제 방면에
배치되어 전방을 지키는 군인 가족이었으나 1963년 12월 세상을 놀라게 했던 고
재봉 사건때 저격 대상으로 오인받아 김교사 일가족이 참변을 당하였으니 이 어
찌 통탄할 일이 아니리오 그 후 국방부에서는 김교사의 빛나는 반공정신을 널리
알려 그를 찬양하기 위하여 전쟁과 여교사라는 영화를 제작하여 전국에 걸쳐 상
영하였으며 동락 전투 당시 박격포 대장이었던 신용관 중위가 군을 제대 1968년
해양경찰 대장으로 재임시 고인이 된 김교사의 충혼을 달래기 위하여 본 현충비
를 건립하였으나 김교사의 당시의 행적을 기리는 자세한 연유가 없어 충주 중원
여교사회에서 당시의 통쾌한 전첩을 거두게 한 김교사의 청사에 빛날 불멸의 사
실을 여기에 기록하여 후세에 길이 전하고자 하노니 이 앞을 지나는 이 누구나
애석하게 고인이 된 김교사의 영전에 읍하고 반공의 결의를 다시 한번 마음에 새
김을 잊지 마소서.....
----------------------------------1976년 7월 7일
----------------------------------충주여교사협의회 일동
▣ 김태서 - 자료 감사드립니다.
▣ 김항용 -
▣ 김재익 -
▣ 김영환 -
▣ 김발용 - 40년전 그리고 오늘 그리고 또 내일......
▣ 김주회 - 전국 시군순회 자료탐사. 감사합니다. 고맙고 소중하게 읽게 있습니다.
▣ 김태영 -
제12편 인물중.
pp1030. 40. 金士衡(김사형, 1333 충혜왕 복위 2 ∼ 1407 태종 7)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 字(자)는 平甫(평보)이며, 號(호)는 洛圃(낙포)이다. 본관
은 안동이며 上洛候(상락후) 金永煦(김형후)의 손자, 副知密直司事(부지밀직사사)
金 (김천)의 아들이다. 조부의 蔭德(음덕)으로 鶯溪館直(앵계관직)이 된 후 監察
糾正(감찰규정)을 거쳐서 恭愍王(공민왕)때 문과에 급제하고 禑王(우왕) 3년(1377)
에 執義(집의)가 되었다.
--趙浚(조준) 등과 臺諫(대간)에 근무했으며 개성부윤에 오르고 端誠輔理功臣(단
성보리공신)의 號(호)를 받았다. 외직으로 交州江陵道(교주강릉도) 都觀察黜陟使
(도관찰출척사)가 되었는데 공명하고 은혜를 베풀어 명성이 높았다. 恭讓王(공양
왕) 2년(1390) 에 지밀직사사동지경연사(知密直司事同知經筵事)를 거쳐 지문하부
사(知門下府事)가 되어 사헌부 대사헌(司憲府 大司憲)을 겸하였다. 뒤에 三司右使
(삼사우사) 동판도평의사사사(同判都評議使司事)를 拜命(배명)받았다. 1392년 여러
將相(장상)과 함께 李成桂(이성계)를 추대하여 조선이 건국되자 문하시랑찬성사
(門下侍郞贊成事)로 판상서사사(判尙瑞司事)와 병조전서(兵曹典書)를 겸임하고 開
國功臣一等(개국공신일등)이 되었다.
---이어 문하우시중(門下右侍中)에 上洛伯(상락백)으로 封(봉)해 졌다. 태조 7년
(1398) 1차 왕자의 亂(란)에는 장자에게 禪位(선위)하여야 한다고 주장했고 정종
이 즉위하자 定社功臣一等(정사공신일등)이 되었다. 정종 1년(1399) 登極使(등극
사)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가 되었으며, 태종 1년(1401) 좌
정승(左政丞), 이듬해에 영사평부사(領司平府事)로 府院君(부원군)이 되어 공직에
서 물러났다. 벼슬을 하면서도 한번도 탄핵을 받은 일이 없었다. 翼元(익원)을 시
호하였다.
---조선 초기에 충주목사가 되었는데 剛明(강명)으로 다스렸다고 한다.
(문헌 : 고려사, 태조.태종실록, 신증동국여지승람)
pp1069. 142. 金時讓(김시양, 1581 선조 14 ∼1643 인조 21)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초명은 時言(시언), 자는 子中(자중), 호는 荷潭(하담),
본관은 안동, 비안현감 김인갑의 아들이다. 선조 38년(1605) 庭試文科(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三司(삼사). 世子侍講(세자시강)의 여러 벼슬을 거쳐 吏曹郞(이조랑)
을 지냈다. 광해군 3년(1611) 全羅道(전라도) 都事(도사)가 되어 鄕試(향시)를 주
관할 때 詩題(시제)에 왕의 실정을 비유한 문제를 출제했다 하여 종성에 유배, 광
해군 8년(1616) 영해(寧海)에 移配(이배)되었다. 1623년 仁祖反正(인조반정)으로
풀려나와 예조좌랑. 병조정랑. 修撰(수찬). 校理(교리)를 역임, 이듬해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都體察使(도체찰사) 이원익(李元翼)의 從事官(종사관)으로 활약, 난이 평
정된 후 應敎(응교)로 文學(문학)을 겸임, 이어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다.
---丁卯胡亂(정묘호란, 1627) 후 서북지방의 경비가 중요시 되자 특히 평안도 관
찰사로 발탁, 인조 9년(1631) 병조판서에 올라 8道都元帥(8도도원수). 4道體察使(4
도체찰사) 등을 겸임하며 斥和(척화)를 주장했다. 그후 강화유수. 호조판서. 병조
판서. 4도의 관찰사를 역임, 知中樞府事(지중추부사)를 거쳐 인조 19년(1641)「宣
祖實錄(선조실록)」을 改修(개수)할 때 判中樞府事(판중추부사) 겸 판춘추관사(判
春秋館事)로 이에 참여했으나 眼疾(안질)로 맹인이 되었으므로 중도에서 사직, 충
주에 내려가 있다가 죽었다.
---典籍(전적)과 經史(경사)에 밝았으며, 인조때 淸白吏(청백리)에 錄選(녹선)되었
다. 시호는 忠翼(충익), 회령(會寧)의 향사(鄕祠)에 祭享(제향)되었다.
--저서로는「荷潭破寂錄(하담파적록)」「荷潭集(하담집)」「 溪記聞(부계기문)」
이 있다.(문헌 : 인조실록, 국조명신록)
pp1112. 270. 金在玉(김재옥, 1934 ∼1963)
--충북 음성군 감곡면 상평리에서 출생, 1949년 음성여자중학교를 거쳐 충주사범
학교를 졸업하고 1950년 6월 1일 동락국민학교 교사가 되어 근무하던 중 6.25를
당했다. 북괴군의 남침은 파죽지세로 내려와 7월 5일 음성군 무극리가 점령되었
다. 국군 6사단 7연대장 林富渾(임부혼) 중령은 7월 6일 새벽 5시 무극리를 공격
하여 공방전을 벌이다가 음성으로 철수하였다. 적은 7월 7일 주덕면 선양리를 거
쳐 충주방면으로 남진 중이었다. 국군 7연대는 다시 음성을 출발하여 제1대대는
무극리와 음성간을 잇는 도로를 방어하고 제2대대는 우측의 644고지를 재탈환하
여 음성 충주간 중간지대에서 적과 대치하고 있었다. 644고지에서 적진을 관측하
던 제2대대장 金鍾洙(김종수) 소령은 동락국민학교를 중심으로 적의 연대 병력이
집결하고 교정에는 수십대의 차량과 포가 포진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한편 김재옥 여교사는 학교를 지키고 있다가 적의 병력이 학교 교정에 집결
하는 것을 보고 기지를 발휘하여 적군을 안심시키고 학교에서 4㎞가 넘는 험준한
가섭산 644 고지에 매복 중인 아군에게 적 15사단 예하 48연대와 포병연대의 배
치 상황을 알려 주었다.
---적은 김재옥 교사의 말을 믿고 안심하고 저녁식사 준비에 바빴다. 이 틈을 타
서 아군은 불과 400여명으로 적의 대병력에 기습 공격을 가했다. 적 사살 8백여
명, 생포 90명, 포 52문, 소총 천여정, 차량 60대 등을 얻는 큰 전과를 올렸다. 이
전과로 7연대는 전원 1계급 특진을 하게 되었다. 19세된 여교사의 기지와 민첩한
행동이 있었던 것은 오로지 불타는 반공 애국 정신의 발로였던 것이다.
---김교사는 그후 소대장이었던 이득주 소위와 결혼하여 군인가족으로 생활하다
1963년 12월에 고재봉이라는 자의 엉뚱한 저격대상으로 오인받아 일가족이 참변
을 당했다.
---그 후 국방부에서는 김교사의 빛나는 반공정신을 널리 알리고자 「전쟁과 여
교사」라는 영화를 제작 상영하였다.
---당시 전적을 기념하는 현충비가 1968년 세워졌으며 1976년 7월에는 충주여교
사협의회에서 김교사의 장한 공적을 기록한 행적비를 동락국민학교 교정에 세웠
다.(문헌 : 내고장전통가꾸기(중원군))
【옮기는이 註】
▣여교사 김재옥의 세계▣
---자랑스런 여교사 김재옥은 음성군 감곡면 상평리 출신으로서 문온공파 음성
공 후손이라고 하였습니다만, 정작 문온공파세보(1992년 임신)에는 어찌된 영문인
지 기록이 누락되어 있어 향후 파보 또는 대동보 편찬시 삽입하여 바로잡아야 할
것 입니다.
● 먼저 재옥아주머니의 부친 완묵공의 친가쪽 세계를 살펴 보았습니다.
-1세(충렬공 방경) 2세(판서공 선) 3세(양간공 승택) 4세(평장사공 묘)
-5세(문온공 구용) 6세(부사공 명리) 7세(직제학공 맹헌) 8세(참의공 자양)
-9세(참판공 예생) 10세(병사공 윤종) 11세(음성공 진강) 12세(하양공 대화)
13세(계), 14세(영후), 15세(익서), 16세(시정 : 규서공의 장자), 17세(남신),
18세(찬원),19세(호인), 20세(의신), 21세(형식), 22세(상준), 23세(완묵), 24세(재옥)
---충렬공 22세손 상준공은 순묵, 시묵, 완묵 3형제를 두셨는데 시묵공은 계족상
갑공(월정리 남술계)의 양자로, 완묵공은 계족숙부상익공(월정리 남술계)의 양자
로 각각 입호되었습니다. 완묵공은 재옥 따님외 아들이 없어 맏형 순묵공의 차자
재혁을 다시 양자로 입호하였는데 상평리 남신계, 월정리 남술계 어디에도 재옥
아주머니에 대한 기록이 없습니다. 현재 완묵공의 손자는 돈회, 덕회와 손녀 회영
이 있습니다.
● 다음은 완묵공의 양가쪽 세계를 정리해 봅니다.
-1세(충렬공 방경) 2세(판서공 선) 3세(양간공 승택) 4세(평장사공 묘)
-5세(문온공 구용) 6세(부사공 명리) 7세(직제학공 맹헌) 8세(참의공 자양)
-9세(참판공 예생) 10세(병사공 윤종) 11세(음성공 진강) 12세(하양공 대화)
13세(계), 14세(영후), 15세(규서), 16세(시형 : 시정의 아우), 17세(남술),
18세(혜원),19세(건인), 20세(의수), 21세(주식), 22세(상익), 23세(완묵), 24세(재옥)
이러한 사실은 문온공파세보(1992)를 바탕으로 재옥아주머니와는 친가쪽 8촌간이
며 안동김씨대종회 고문, 음성공종회 명예회장(초대회장)이신 저의 숙부 재용어른
의 증언을 통하여 기록하였음을 부기합니다. 한가지 덧붙일 것은 이득주, 김재옥
사이의 장남 이훈은 고재봉 사건 당시 서울에 유학중인 관계로 화를 면하고 생존
해 있음을 밝혀둡니다.
그리고 시군지순례 타이틀 특성상 이하의 글은 본 홈페이지 1076. 자랑스럽고도
가슴아픈이야기(2/16)와 중복되나 다시한번 게재함을 이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제13편 중원문화중.
pp1322. ④현충탑
☞ 있는곳 : 충북 중원군 신니면 대화리 동락국민학교 교정
☞ 크 기 : 높이 770㎝
☞ 만든때 : 서기 1968년
--이 탑은 동락전투를 승리로 이끄는데 중요한 정보를 제공한 김재옥 여교사의
업적을 기리고 산화한 동료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당시 박격포 반장인 신용관(申
用寬) 중위가 1968년에 세웠다. 탑의 규모는 3단계의 기단위에 높이 6m의 탑신을
정사각형으로 세우고 위로 갈수록 작아지게 만들었다.
【현충탑 건립문】
--국가에 바친 그대의 충성을 앙모하며 이곳에 산화한 동료의 명복을 비노라.
------------------------------------1968. 12. 17.
----------------------------------- 신 용 관
pp1322. ⑤전승비
☞ 있는곳 : 충북 충주시 신니면 대화리 산1번지(동락초등학교 건너편 산밑)
☞ 크 기 : 전체높이 400㎝
☞ 만든때 : 서기 1973년 7월 7일
--이 비는 북괴가 불법 남침으로 일어난 6.25동란때 한국군의 승전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비이다. 높이 26㎝의 계단을 5계단 쌓고 그 위에 높이 114㎝와 길이
215㎝의 돌과 높이 280㎝ 나비 82㎝의 돌을 두 개 얹어놓아 만든 비이다. 이 전
투의 약사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6.25 불법남침을 감행한 북괴군은 파죽지세로 남하하여 7월 5일에는 음성읍 금
왕읍 무극리까지 점령하였다. 이 무도한 적군을 격퇴하기 위하여 제6사단장 김종
오(金鍾五) 대령은 예하 제7연대장 임부택(林富澤) 중령에게 7월 6일 05시를 기하
여 공격토록 명령했다. 이때 제7연대 제 1, 2, 3대대는 춘천에서 후퇴하여 음성군
금왕읍 백야리 및 가엽산 줄기인 644고지 등에서 매복중이었으며 명령을 받은 임
부택 제7연대장은 계획된 시간에 각각 공격을 개시했다. 장시간의 격전 끝에 제1
대대는 동일 11시에 무극리를 탈환했으나 부대를 재편성할 사이도 없이 전진중
14시 무극리 북방 2㎞ 지점에서 적 예비대의 공격을 받아 다시 음성으로 철수하
였다. 적은 장호원에서 남하하여 7월 7일 12시 주덕면 신양리를 거쳐 충주방면으
로 남진중에 있었으며 우리 제7연대 1, 2대대는 음성으로부터 다시 출발 무극리
에 돌입했으나 적은 철수하고 없었으므로 접전없이 점령하였다. 이에 1대대는 무
극리 음성간을 잇는 도로를 방어하고 제2대대는 우측의 644고지를 재점령하여 음
성 충주간 중간 지대에서 적에 대비했다. 644고지에서 적진을 관측하던 제2대대
장 김종수(金鍾洙)소령은 동락국민학교를 중심으로 적군 연대 병력이 집결하고
교정에는 수십대의 차량과 포가 포진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때 동락국민학
교 김재옥(金在玉) 여교사가 기지를 발휘하여 적군을 안심시키고 자신은 제2대대
장 김종수소령에게 적 15사단 예하 48연대와 포병연대의 배치 상황을 상세히 제
보했다. 김소령은 당시 644고지를 확보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었으나 김재옥 여교
사의 제보에 따라 기습의 좋은 기회라고 판단 17시를 공격시간으로 정하고 제 6,
7중대로 하여금 적의 퇴로를 차단케 하였으며 각 중대는 공격지점으로 이동했다.
김재옥 여교사로부터 무극리 일대는 국군이 철수하고 없다는 정보를 믿고 적은
안심하고 석식 준비를 하였고 경비는 소홀히 하였다. 정각 17시에 제5중대가 먼
저 적에게 집중 사격을 하였다. 불의의 공격을 받은 적은 대피하기에 어쩔줄을
몰랐고 김종수소령은 박격포 반장인 신용관(申用寬) 중위로 하여금 제1탄을 발포
케하니 운동장에 방열된 적의 포진지 중앙에 정확하게 명중하여 적의 포는 순식
간에 괴멸하였다. 다음날 미명에 실시된 아군의 소탕전으로 적은 완전 섬멸되었
다. 이전투의 전과는 차량 60대, 장갑차 3대, 기관총 47정, 포 12문, 박격포 35문,
소총 1000여정을 노획하거나 파괴하였다. 이승만 전대통령께서는 제7연대 전장병
에게 1계급 특진의 은전을 내렸으며 노획된 무기는 대전에서 전시되었고 각종 무
기 1점씩은 UN본부로 이송하여 소련제 무기의 증거품으로 제시했다.
【비 문】
--우리 민족의 역사상에 그렇게도 처참한 피를 뿌린 1950년 6.25동란 동족상잔의
비극이야말로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슬픈 일이었다. 그러기에 북한 공산군들의 반
역적인 남한 침공때 우리는 조국과 자유를 위하여 그들과 싸우면서도 동포의 양
심으로 울며 싸웠던 것이다. 마침내 비인간적이요 반민족적인 그들을 격퇴시켜
승리를 거두었던 것은 실로 다행한 일이었던 바 가장 통쾌했던 것은 무극리 전투
였다. 우리 국군 제6사단 제7연대 제1대대 장병들은 7월 6일 치열한 전투 끝에
무극리를 탈환하고 그대로 북진하다가 역습을 받아 음성 쪽으로 후퇴 제2대대도
진천으로 향하다. 다시 음성으로 귀환 제3대대는 용원리 방면으로 철수했다. 7월
7일 공산군 제15사단 제48연대 병력이 장호원으로부터 충주를 향해 남쪽으로 내
려옴으로 우리 제1대대는 무극리와 음성사이를 방어하고 제2대대는 644고지를 점
령했었다. 이때 공산군들은 동락국민학교에 전병력을 집결 수십대 차량과 일개
대대의 포까지 설치했으나 이를 발견한 제2대대는 병력 겨우 4백명 연대의 지휘
를 받을 길조차 없으므로 주저하다가 절호한 기회이므로 공격을 결정했었다. 마
침내 포화는 터졌다. 7월 7일 정각 17시였다. 제6중대의 집중 사격은 문자그대로
청천벽력이었다. 다시 이어 우리 제8중대의 포탄이 또 떨어졌다. 너무나 정확하게
적의 포진지 한복판에 명중되어 포대는 완전 파괴되고 시체들이 공중에 떠 올랐
으며 도망가는 적들마져 우리들의 포위망에 섬멸되어 최후의 개가를 부르니 8일
8시였다. 이것이 통쾌한 승첩을 거둔 그날의 전투였거니와 굳이 그 사실을 새겨
여기에 비를 세우는 뜻은 뒤에 오는 자손들에게 피흘린 일을 기억케하고 조국 수
호와 자유평화를 사랑하는 마음을 길러 민족의 염원인 통일 성업을 이루게 하고
자 함이니 누구나 여기 오거든 옷깃 여미고 묵념을 올리며 나라 사랑할 생각을
거듭 다짐합시다.
---------------------------------1973년 7월 7일
---------------------------------이은상 짓고 김충현 쓰고
---------------------------------충청북도지사 태종학 세움
pp1324. ⑥김재옥 행적비
☞ 있는곳 : 충북 중원군 신니면 대화리 동락국민학교 교정
☞ 크 기 : 높이 210㎝
☞ 만든 때: 서기 1976년 7월 7일
--이 비는 김재옥 여교사의 빛나는 반공정신을 찬양하고 그의 행적을 기리기 위
하여 충주여교사 협의회에서 세웠다. 규모는 받침돌 위에 40cm 높이의 지주를 세
우고 지주 위에 나비 155㎝ 높이 95㎝의 직사각형의 판판한 면에 글자를 새겼다.
【비 문】
--김재옥 교사는 1934년 3월12일 음성군 감곡면 상평리에서 태어나 음성 여자중
학교를 거쳐 충주사범학교를 졸업, 1950년 교사 발령을 받아 중원군 동락국민학
교에 부임한 그해 이북 공산 괴뢰의 불법 남침으로 6·25동란이 발발 7월 6일에
는 이곳 동락까지 적의 병력이 침투되었고 적의 탱크를 비롯한 수많은 무기와 장
비가 본교 교정에 집결함을 본 김교사의 기지는 날이 어두워짐을 이용하여 4킬로
가 넘는 험준한 가엽산 644고지에 매복중이던 아군에게 적의 정세를 알려 불과 4
백여명의 소수 병력으로 적 1개 연대를 기습 공격하여 완전 섬멸하는 대첩을 거
두게 하였다. 이는 오로지 19세 김재옥 교사의 기지와 민첩한 행동과 불타는 애
국 지성에서만이 해낼 수 있었던 결과이며 이 나라의 장한 반공 여성으로서의 귀
감이라고 할 것이다.
--김교사는 그 후 당시의 소대장이었던 이득주 소위와 결혼 강원도 인제 방면에
배치되어 전방을 지키는 군인 가족이었으나 1963년 12월 세상을 놀라게 했던 고
재봉 사건때 저격 대상으로 오인받아 김교사 일가족이 참변을 당하였으니 이 어
찌 통탄할 일이 아니리오 그 후 국방부에서는 김교사의 빛나는 반공정신을 널리
알려 그를 찬양하기 위하여 전쟁과 여교사라는 영화를 제작하여 전국에 걸쳐 상
영하였으며 동락 전투 당시 박격포 대장이었던 신용관 중위가 군을 제대 1968년
해양경찰 대장으로 재임시 고인이 된 김교사의 충혼을 달래기 위하여 본 현충비
를 건립하였으나 김교사의 당시의 행적을 기리는 자세한 연유가 없어 충주 중원
여교사회에서 당시의 통쾌한 전첩을 거두게 한 김교사의 청사에 빛날 불멸의 사
실을 여기에 기록하여 후세에 길이 전하고자 하노니 이 앞을 지나는 이 누구나
애석하게 고인이 된 김교사의 영전에 읍하고 반공의 결의를 다시 한번 마음에 새
김을 잊지 마소서.....
----------------------------------1976년 7월 7일
----------------------------------충주여교사협의회 일동
▣ 김태서 - 자료 감사드립니다.
▣ 김항용 -
▣ 김재익 -
▣ 김영환 -
▣ 김발용 - 40년전 그리고 오늘 그리고 또 내일......
▣ 김주회 - 전국 시군순회 자료탐사. 감사합니다. 고맙고 소중하게 읽게 있습니다.
▣ 김태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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