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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54)청산리 전투와 북로군정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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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환 작성일02-06-03 17:51 조회1,83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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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리 전투를 승리로 이끈 부대는 백야 김좌진 장군이 이끄는 북로군정서부대였습니다.



북로군정서 (北路軍政署 )는 1919년 12월중국 만주 왕칭현(汪城縣)에서 조직된 무장 항일독립군



부대로서 항일투쟁, 군대양성, 군사훈련을 목적으로 세워진 부대입니다. 청산리전투의 빛나는



업적을 남겼습니다. 그 규모는 약 2,500여명으로 알려졍 있습니다.







북로군정서는1919년 대종교(大倧敎)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무장독립운동단체 대한군정서



(大韓軍政署)로 출범해 그해 12월 북로군정서로 개편된 항일 무장독립군 부대다.



주요 임원은 총재 서일(徐一), 총사령관 김좌진(金佐鎭), 참모장 이장녕(李章寧),



사단장 김규식(金奎植), 여단장 최해(崔海), 연대장 정훈(鄭勳), 연성대장 이범석(李範奭) 등이며,



왕칭현 일대의 삼림지대를 근거지로 하였다.



사관연성소(士官練成所)를 설립하고 신흥무관학교의 도움을 받아 청년들에게 6개월의 군사훈련을



실시, 기초훈련을 마친 총 600명 가운데 300명이 다시 본격적인 군사훈련을 받는 등 체계적인



교육훈련을 실시하는 한편, 인근 독립운동단체와 제휴해 북만 독립운동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1920년 8월, 총병력이 1,600명을 넘었고, 소총·권총·기관총 등으로 중무장했으며, 재정은 인근



주민과 국내 모금액으로 충당하였다.



같은 해 10월, 청산리(靑山里) 어귀로 이동하던 중 일본군 혼성부대인 동지대(東支隊) 37여단



소속 1만 명과 접전, 4일 동안 10여 차례의 전투 끝에 수많은 일본군을 사살하는 대전과를 올리니,



바로 청산리전투다.



그 뒤 일본군의 반격을 피해 소만국경으로 이동해 10여 개 독립군 부대와 통합, 연해주에서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을 결성해 무장 독립운동을 전개하다 1922년 소련에 의해 무장해제



당할 때까지 항일 독립투쟁의 구심점 역할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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