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 서당공(휘 성립) 할아버지에 대한 새로운 평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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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영 작성일07-10-08 10:33 조회2,841회 댓글0건본문
4) 시숙과의 관계
익히 알려져 있듯이 허난설헌은 1983년 허봉이 갑산으로 유배를 떠날 때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보낸다.
멀리로 귀양가는 나그네여
함경도 길 가느라고 마음 더욱 바쁘겠소
쫓겨나는 신하야 가의와 같겠지만
쫓아내는 임금은 어찌 패왕같이 아둔할까
가을비 갠 언덕엔 강물이 잔잔하고
고개위의 구름은 저녁노을 물드는데
서릿바람 받으며 기러기 울어에니
걸음이 멎어진 채 차마 길을 가는구려
이상은 허난설헌의 시이다. 이에 시숙인 김수는 조카며느리의 운에 맞추어 친구인 허봉에게 보낸다.
次姪婦韻送許美叔謫甲山
朝端時論變 嶺外逐臣忙
用舍闕天數 愛憎豈我王
悲吟同澤畔 治臥異淮陽
聞說甲山久 心驚淚萬行
조정에서 살피는 시대적 논란이 변해서
영서밖으로 신하 쫓아보내기 바쁘도다.
등용과 해임은 하는 운수에 관한 것이요.
사랑함과 미워함이 어찌 우리 인군에게 있으랴
슬피 읊음은 초나라 굴원의 못 뚝으로 지나던 때와같고
다스리고 쉬는 것이 회양에서와 다르도다.
갑산에 귀양가서 오래될 풍설을 들으니
마음에 놀래서 일만줄기의 눈물이 흐르노라.
이것은 1557년 할아버지 김홍도가 윤원형이 정난정을 정실로 삼았을 때 비난한 것을 빌미로 갑산으로 유배당하던 때를 비유하여 친구이며 허난설헌의 오라비인 허봉에게 보낸 것이다. 같은 동인으로 그리고 친구인 허봉에게 시를 부칠 수야 응당 있을 수 있는 일이겠으나 구태어 허난설헌의 시에 운을 맞추었다는 것은 특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허난설헌을 인정하였다는 뜻도 되겠지만 평소에도 더불어 시운을 맞추어 왔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시숙과 질부사이에, 더구나 여성의 시에 문과 급제하여 학문적 세평이 높았던 시숙이 운을 맞추었다는 것은 주자학적 사회에서는 힘들었을 것으로 보여진다.
5) 허균과 김성립의 관계
김성립이 처남 허균을 어떻게 생각하였는지에 관한 자료는 없다. 다만 일방적인 허균의 비방만이 전한다. 이에 잠시 허균 연보14)에 의지하여 허난설헌의 친가와 시가의 사건을 중심으로 두 사람의 관계를 추정하고자 한다.
1588년 허균의 작은 형이 죽다.
1589년 허난설헌이 죽다.
같은 해에 김성립은 과거에 급제하여 홍문관에 임용되었다.
1589-1592년 사이에 김성립은 재혼한 것으로 보여진다.
1590년 난설헌의 시 210편을 정리하여 책으로 엮고 유성룡에게 서문을 받다.
1592년 임진왜란 발발하자 봉심을 명받고, 근무중 31세 꽃다운 나이에 김성립은 전사하고 시신도 찾지 못하여 의복만으로 장례를 치루다. 반면 허균은 홀어머니 김씨와 만삭의 아내를 데리고 피난중 7월 아내는 해산후 사흘만에 죽고 곧 갖난 아이도 죽다. 15세에 시집와서 23세에 허균의 아내도 아들없이 요절하였다. 함경도를 전전하다가 가을에 강릉에 도착하다.
1593년(25세) 『학산초담』을 지음
1594년(26세) 문과 급제승문원 사관에 임용.
1595년(27세) 홍문관에 후보로 올랐지만 낙점을 받지 못함.
1597년(29세) 세자시강원 설서에 임용되자 곧 3월에 파직됨.
이상의 경력을 비교해 보면, 김성립은 허균에 비해 많이 떨어지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미루어 짐작컨데 허균의 성정에 대한 세평 등등을 감안한다면 허균의 김성립에 대한 인물평은 객관적이라고 보기 힘들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리고 허균은 허난설헌의 죽음을 시댁 탓으로 돌리고자 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3. 거내이불언외?
1) 형제와의 교류
허난설헌은 강릉의 초당을 떠나 서울 처음에는 동인들의 거주지인 건천동(오장동)에 살다가 상동(필동으로 추정됨)으로 이사할 즈음인 14-15세(안동문중에서는 15세로 기재되어 있으며, 경국대전 반포 후 법적으로 15세가 결혼 적년기로 규정됨)에 출가하여 남소문동에 살았던 것으로 보여진다. 한편 허균은 1585년에 17세의 나이로 결혼하여 명동에 살게 된다. 오빠인 허봉은 83년에서 85년까지 갑산에 유배되었다가 곧이어 유랑생활을 한다. 난설헌과 허균, 두 남매는 서로 의지하며 자주 왕래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갓 결혼한 남동생의 눈에 비친 결혼 10년차의 누나의 결혼생활이 안스러워 보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당시 기록에 율곡이 허봉의 집에 가서 보니 김첨이 와 있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허균도 누이의 집에 드나들었을 가능성은 높다. 출가외인으로 간주되었다면 허난설헌의 시를 허균이 간직한 것을 해명할 도리가 없다.
사료상에 보면 김첨과 허봉은 늘 함께 등장한다. 그리고 동인이 남북으로 분당하게 되는 장면에서도 허봉은 우성전의 집에서 시간을 허비한 것으로 되어 있다. 우성전은 허난설헌의 작은 언니의 남편 즉 형부이었다. 후기에는 기피하였을 사돈들이 늘 이해관계를 함께하던 사회가 양계적 사회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사회에서의 여성의 역할은 후기보다는 지대하였고 함부로 박대하지 못하였을 것으로 보여진다.
2) 문학수업
『성옹지소록』중의 기록에 의하면,
“형님과 누님의 문장은 가정에서 배운 것이며, 선친은 젊었을 때 慕齋 金安國에게 배웠다. 모재의 스승은 虛白堂 成俔인데, 그 형 成侃과 金守溫에게 배웠다. 두 분은 모두 泰齋 柳方善의 제자이고, 유공은 文靖公 李穡의 으뜸가는 제자였다.”
라고 하여 허봉과 난설헌이 모두 가학을 계승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학문적인 전통은 도교에 두고 있다고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 밖에도 초당의 스승으로는 長吟 羅湜과 화담 서경덕이 있다. 난설헌의 시 가운데 仙界詩가 많은 것과 신선 세계에 관한 책을 많이 읽은 것도 모두 아버지를 통해 내려온 서경덕의 영향이다.”
난설헌의 詩風은 일찍이 오빠 허봉과 당시 三唐시인으로 유명했던 손곡 이달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 것으로 주위의 사물을 매우 정감 있게 묘사하고, 詩語에 있어서도 평이하고 간결하면서도 자연스러운 점이 특징이었다. 허봉의 문장은 간결하고도 무게가 있었으며 특히 시는 호탕했다고 전해진다. 허균이 스승인 이달의 유고를 모아 편집한 『蓀谷詩集』서문을 보면 난설헌의 시 공부에 큰 영향을 준 이달이 어떠한 인물인가를 알 수 있다.
손곡산인 이달의 자는 益之이며, 쌍매당 이첨의 후손이다. 그의 어머니가 천인이어서 세상에 쓰임 받지 못했다. 원주의 손곡에 살면서 자신의 호로 삼았다. 어려서부터 많은 책을 읽었고, 지은 글도 매우 많았다. 한리학관이 되었지만, 합당치 못한 일을 당하여 관직을 내버리게 되었다. 고죽 최경창 ? 옥봉 백광훈 등과 어울리며 서로 마음이 맞아 시 모임을 결성하였다.(…) 이달은 그 이름이 나라에 알려져 그의 신분에 관계없이 그를 중히 여기고 칭찬하는 시단의 3,4명의 거장들이 있었다. 그러나 세속의 소인들 중에는 그를 질투하고 미워하는 자들이 많아 여러 번 더러운 누명을 씌워 형벌의 그물에 밀어 넣었지만 끝내 그의 명성을 말살시킬 수는 없었다. 이달은 용모가 아름답지 못하고 성품도 호탕하여 절제하지 못했다. 또한 세속의 예법에 익숙치 않아 이로 인해 풍습에 거슬렸다.
이렇듯 신분이 다른 사람을 어떠한 방식으로 스승으로 삼을 수 있었을까. 엄격히 거내이불언외하던 사회의 소산은 아닐 것이다. 그의 시를 보면 소서문(덕수궁와 서울역을 잇는 뒤쪽 길에 위치함)을 거쳐 서릉(서오릉, 불광동 방향)에 이르는 풍광을 노래하고 있다.15) 그녀의 집과는 상당한 거리에 위치해 있다. 정신적으로 물리적으로 거내이불언외하지 않았던 여성의 삶을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3) 작품의 내용을 통해본 허난설헌의 참여의식
허난설헌의 문학세계에 대한 고찰은 허미자 교수의 『허난설헌연구』와 허경진 교수의 『허난설헌시선』, 장정룡 교수의 『허난설헌과 강릉』그리고 김성남 선생의 『허난설헌』등의 문헌에 『난설헌집』에 실린 시는 211편이나 된다. 이 시편들을 그 내용에 따라 대략 분류해 보면 유선사(遊仙詞), 견흥시(遣興詩), 규원시(閨怨詩), 민원시(民怨詩) 등으로 나눌 수 있다.
그 중에서도 선계(仙界)에서 노니는 일을 엮은 유선사(遊仙詞)가 87수로 가장 많다. 중정건치(仲井健治)가 쓴 『일본인이 본 허난설헌 한시의 세계』의 기록에 의하면, 이 유선사는 선인(仙人)의 높은 뜻을 흠모하고 심오한 도의 경지에 이르기를 바라는 뜻에서 지어진 것으로, 사(詞)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가사(歌詞)로서의 운율을 중시한 점에 특색이 있다고 한다.
견흥시는 술을 마시거나 시를 읊는 흥에 겨워 지은 시를 말한다. 규원시는 홀로 남편을 기다리는 여인의 원망과 정겨움이 담뿍 실린 시이다. 민원시는 당시 일에 지치고 부역에 고단한 가난한 사람들과 병사들의 한많은 인생의 단면을 읊은 시이다. 일반적으로 민원시로 분류된 시들 중에 다음의 두 편의 시를 살펴보고자 한다.
‘출새곡’이라는 제하에
“횃불은 긴 강물에 비추어 있고
군사들은 한가를 떠나 출정하도다
군사들은 창을 벼게 삼아 베고 눈위에 자며
말을 달려 사막에 이르니
삭풍은 진군 징소리를 전해주고
오랑캐들의 피리소리는 만리장성을 넘어오노라
가진 신고를 하여 가며
오랑캐의 병거를 쫓고 있노라“
......
그리고 ‘새하곡’에서는
“전군은 나팔을 불며 진문을 나오고
붉은 깃발은 눈에 얼어붙어 펄럭이지도 못하는구나
구름에 덮여 어두운 사막엔 척후병들의 불빛 신호 번쩍이고
밤이 깊자 유격 기마대는 벌판을 누비도다 ”
......
규중 여성의 시라고 보기는 힘들다. 암울한 전쟁터로부터 들려오는 우울한 소식은 서울에 사는 관리가족에게는 낮설지 않은 풍경 이었을 것이다. 직접 보지는 못할지라도 허난설헌의 감수성으로 멀지 않은 전쟁의 예감과 짓밟힐 민중의 고통을 외면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시숙인 김수가 남긴 글에도 전쟁터의 풍광이 특히 많은 것을 보면 내훈에서의 여성규범과는 달리 가정내에서 바깥 정세에 대한 대화가 이성간에도 있지 않을 수 없었을 것으로 보여진다.
4) 과부 재가 문제
정치정세뿐 아니라 사회구성원으로서 사회문제에 무심할 수는 없다. 시를 통하여서만이 아니라 시밖에 전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허난설헌의 세계를 시를 통하여 들어갈 수 밖에 없다. 다음의 일례를 들어보자.
청동이 홀로 지내기 일천 년,
천수선랑과 좋은 인연을 맺었네.
하늘 음악 소리 밤 늦도록 추녀 밖 달까지 올리고,
북궁선녀도 발 앞까지 내려왔다네.
靑童孀宿一千年
天水仙郞結好緣
空樂夜鳴?外月
北宮神女降簾前
허난설헌 시에 나오는 이 청동은 하늘의 선녀이며, 천수선랑은 인간 세상에 사는 남자 서생 조욱(趙旭)을 말한다. 북궁선녀가 바로 달로 날아간 항아이다. 이 시는 천 년 동안을 과부로 산 청동이 천수선랑과 인연을 맺자 이를 축하해 주기 위해 항아가 땅으로 내려왔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는 시이다. 청동과 천수선랑 조욱의 사랑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는데, 난설헌이 이 신화를 이용해서 바로 과부의 재혼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고 파악되고 있다.16)
즉 이 시에서 허난설헌이 사용하고 있는 ‘좋은 인연[好緣]’은 재혼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당시 조선 사회는 국초에 재가녀의 자녀를 관인으로 등용하지 않음으로서 양반가의 부녀자의 재혼을 금하여왔는데, 조선 후기에는 이러한 풍속이 일반화되기에 이른다. 특히 임난이전에 사대부 출신의 허난설헌 입장에서 과부 여성의 능동적 구애의 모습을 표현한 점은 우리에게 신선한 충격을 준다. 허난설헌은 감히 천 년 동안을 과부로 산 청동의 문제를 제기하여 불행한 과부에 대한 동정과 함께 유교 사회에 대해 분노에 찬 비판을 던진 것은 아닐까?
5) 출가외인?
앞서 살펴보았듯이 허난설헌의 집 주위에는 본인의 친정과 시어머니의 친정가족들로 둘러 싸여 있었다. 그리고 주지하듯이 사임당과 허난설헌은 외가에서 혹은 외가의 지역에서 태어나 생장하였다.
또한 조선 후기 노론의 정신적 지주인 宋時烈(1608-1689)의 아버지는 司饔院 奉事 甲祚이고, 어머니는 善山 郭氏로 봉사 自防 의 딸이다. 그는 충청도 옥천군 구룡천 외가에서 태어나 26세 때까지 살았으나 후에는 懷德의 宋村 飛來洞 蘇堤 등지로 옮겨 지내며 살았으므로 세칭 회덕인으로 알려졌다. 1625년에 공주 장기면에 사는 도사 李德泗의 딸과 혼인하였다. 즉 태어나 결혼한 이후까지 외가에서 살았다.
또한 조선 중기의 열녀들을 살펴보면 친정과 시댁에 의하여 재가의 권유를 받은 것으로 나타난다. 다음 몇 개의 사료를 살펴보자.
咸州에 살던 朴召史는 밀양의 良家女인데 의령현감 趙壽儀의 妾이 되었다. 첩이 된지 얼마 안되어 의령현감의 喪을 만났다. 슬퍼하여 살고싶은 마음이 없었다. 복을 마치자 부모님을 보살피기 위해 돌아갔으나 부모가 뜻을 빼앗고자함을 알고 즉시 남편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다시는 친정에 왕래하지 않았다.17) 열녀 順月은 古春谷 驛吏 朴希貞의 처이다. 19세에 시집을 가 34세에 남편을 잃고 슬퍼함이 지극하여 9년을 복상하였다. 절기가 변할 때마다 망부를 위해 새옷을 지어 헌제한 후에는 태워버렸다. 부모형제가 일찍 과부된 것을 슬퍼하여 뜻을 빼앗고자 하니 불러도 가지 않고 늙을 때까지 수절하였다.18) 朴召史는 正兵 李弘의 처인데 25세에 남편이 죽었다. 시아버지는 개가시켜 쫓아내고자 하였으며 송곳 꽂을만한 땅도 주지 않았다. 그래서 송소사가 스스로 당을 팔아 남편 장사지내고 3년복을 입었으며 지성으로 제사지냈다. 나쁜 무리들이 있어 여러번 강제로 욕보이고자 했으나 송사를 제기하여 마침내 뜻을 빼앗지 못했다.19) 晉州에서 살던 黃壽長의 妾 私婢 鳳鶴은 20세에 남편상을 당하여 상복을 벗지 않고 애통해하여 몸을 상하였다. 그 아버지가 그의 나이 젊음을 가엾게 여겨 애통해하여 개가시키고자 하였으나 죽기를 맹세하고 다른데로 가지 않았다.20)
물론 신분이 낮은 계층에서 집중적으로 보이지만 친정에서 혹은 시댁에서 개가시키려고 하였다. 위의 자료로 볼 때 아직 기층사회민까지 출가외인 내지 개가금지의 풍조는 내면화 되지 않은 것으로 보여진다. 이와 같은 읍지는 대부분 사류중심으로 임란직후의 흩어진 사회풍속과 토착기반을 굳히고자 하는 목적하에 간행된 것이므로 오히려 하층민의 열녀행실을 독려한 자료로써 사료해석은 역으로 해석되어야 할 것으로 본다.
4. 맺음말
이상에서 조선 중기 그것도 임진왜란 직전에 살다간 허난설헌의 삶과 작품을 양계적 사회의 특성 하에 설정하여 살펴보았다. 종전의 연구가 허난설헌은 현모양처를 강요하는 주자학적 사회 . 가족윤리관이 지배하던 사회에서 한 많은 삶을 살았다고 설정하였다. 나아가서 그러한 사회적 한계를 넘어 仙界를 그리는 훌륭한 작품을 남긴 것을 기려왔다.
그러나 본고는 허난설헌의 소녀시절-완벽한 행복, 시집살이-불행의 시작이라고 도식화 시켜놓은 조선 중기 여성의 구체적인 삶, 생활상에 접근하고자 하였다. 친정가족에 관한 연구는 선행 연구성과를 정리하였고, 시댁 가족에 관하여는 『安東金氏族譜 』와 『恩津 宋氏族譜 』 그리고 안동 김문과 동인계의 문집 등을 발굴하여 재 구성하여 양계의 가족관계에서의 허난설헌의 운신의 폭을 가늠해 보고자하였다. 그 운신의 폭이 허난설헌의 공간이고 작품활동을 할 수 있는 활력소가 되었을 것으로 추정해본 것이다. 앞으로 보다 좋은 사료가 발굴된다면 조선시대 여성의 생활사가 보다 투명해질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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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허난설헌연구』, 허미자, 성신여대출판부,1984.
『허난설헌의 문학』,김명희, 집문당,1987.
『허난설헌시선』, 허경진 역, 평민사,1993.
『신사임당.허난설헌』, 강릉시사, 박양자,1996.
『허난설헌시선』,장정룡 역, 동녘출판기획,1999.
『평전 허난설헌과 강릉』, 장정룡, 동녘출판기획,1999.
『허난설헌』, 김석남,동문선,2003.
『허난설헌 한시의 세계』,중정견치,국학자료원,2003.
2) 허난설헌의 묘소는 경기도 지방문화재90호로 지정됨.
허난설헌, 박양자, 강원여성역사인물집,강원도,(2004),96쪽.
3) 「허난설헌-여성억압과 불평등에 저항한 시인」, 『여인열전』,(김영사,2002) 306쪽.
「중국이 먼저 인정한 천재 시인 허난설헌」, 이문호,『한국 역사를 뒤흔들었던 여성들』, (도원미디어,2002) 200쪽.
「허난설헌 -불운에 몸부림친 천재 시인」, 허미자, (한국 여성개발원, 1998) 111쪽.
김석남(동문선 2003) 35쪽.
4) “...자신의 피붙이들을 둘러싼 잇단 불운...” 등 친정에 한정된 고찰에 집중되어 있다. 당시 허난설헌을 둘러싼 모든 인물들 -시아버지, 시숙, 남편, 그리고 시어머니의 형제들, 언니의 남편 그밖의 친지들이 모두 퇴계의 문인이었으므로, 동인으로서 정치적 운명을 함께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고찰되어져야 한다. 아울러 왜변과 임진왜란의 희생자들로서 작품분석에서 고려되어져야 할 것이다.
5) 부록 1 세계표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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