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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경주(3) 내물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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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환 작성일02-06-04 17:57 조회1,70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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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물마립간



이름은 내물이니 각간(角干) 말구(末仇)의 아들이요 갈문왕 구도(仇道)의 손자이며 어머니는 휴례부인



김씨이고, 김씨로서는 제2대왕이다. 비는 보반(保反)부인 김씨이니, 일설에는 내례길포(內禮吉怖)로서



미추왕의 따님이라고도 한다. 홀해왕이 훙하고 아들이 없으매 내물왕이 왕위를 계승하였다. 병진 원년



(진 영화 12년 서기 356년) 4월에 즉위하였다.



2년 봄에 사신을 보내어 환과고독(鰥寡呱獨)을 위문하고 각기 미곡 3곡(곡)을 내려주었으며 효성과



우애와 특이한 행실이 있는자는 벼슬 한 계급을 하사하였다.



3년 2월에 시조묘에 친히 제향을 올리니, 사당 위에 붉은 구름이 감돌고 묘정에는 신작(神雀)이 모여



들었다.



9년 4월에 왜병이 대거하여 쳐들어오거늘 풀로서 허수아비 수천개를 만들어 옷을 입히고 병기를 손에



들려 토함산 아래에 줄지워 세웠으며 용사 1천명을 매복시키었다가 왜병을 쳐서 몰살시켰다.



13년 봄에 백제에서 사신을 보내어 양마(良馬) 2필을 바쳤다.



17년에 흉년이 들어 창고를 열고 기민(飢民)을 진휼(賑恤)하였다.



18년에 백제 독산성주가 3백인을 이끌고 투항해 오니, 임금께서 이를 받아들였다. 이해에 큰 풍년이



들었다.



42년 7월에 북쪽 변방 하슬라 (강능)에 한발이 심하고 황충(蝗蟲)이 일어나 백성이 굶주리거늘 죄수를



놓아주고 1년에 조(祖)와 조(調)<백성에게 조세를 부과하던 제도>를 면제해 주었다.



47년 2월에 임금이 훙하고 아들이 어리거늘 나라 사람들이 실성왕을 세워 왕위에 계승하게 했으니,



키가 칠척이요 총명하여 모든 일에 통달하고 식견이 심원하였다.



내물왕은 참성대 서남방 <지금 교촌이니 본전에서 동쪽으로 백무(百武)쯤 떨어져 있음>에 장사하였다





내물마립간은 신라사의 분기점에 우뚝 서 있는 왕이다. 내물왕의 등장으로 신라는 진한의 강력한



소국에 불과하였던 좁은 틀에서 벗어나 한반도 동남쪽 전체를 아우르는 고대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한다.



신라는 내물왕 때부터 시작된 나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고구려는 태조대왕, 백제는 고이왕 때



부터 고대국가의 꼴을 형성했듯이 신라는 내물왕 때가 되어서야 진한 전체를 통합하여 국가로서의



꼴을 갖추었다.



신라가 내물왕 시대일 때 고구려는 고국원왕을 거쳐 광개토대왕, 백제는 근초고왕과 근수고왕이라는



가장 강력한 정복 군주들이 한반도 의 운명을 놓고 자웅을 겨루고 있었다.



중국대륙세력에 밀려 남하정책을 시도하는 고구려와 고구려의 남하를 결사코 저지하려는 백제는



신라와 가야제국을 놓고도 치열하게 대립했다.백제 근초고왕은 왜와 연합하여 가야지역으로



팽창하려는 신라를 압박하는 한편, 북으로는 평양성까지 진출하여 고구려의 고국원왕을 전사시킬



정도로 강력한 정복 활동을 펼쳤다.



고구려는 한때 백제의 북진정책에 밀려 주춤하기도 했으나 광개토대왕이 등장하면서 대대적인



반격을 시도하여 백제와 왜의 연합세력을 제압하고 신라를 자신들의 보호국으로 삼았다.



이런 정세 하에서 신라의 내물왕은 고구려의 보호를 받으며 국가위기를 하나씩 극복해 나갔다.



내물왕 시기에 신라가 고대국가의 기본적 틀을 확립하게 된 구체적 계기는 백제 근초고왕의



낙동강 유역 진출이었다.



당시 백제는 일본과 연합한 다음 그들의 군사를 끌어들여 364년 393년 등 수차례에 걸쳐



신라를 공격했다.



백제와 일본의 빈번한 공격에, 신라는 내부통합력을 높여 적의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필요성이 절실해졌다.



내물왕은 이 위기를 왕권강화와 체제정비의 기회로 삼았다.



그러나 내물왕은 혼자만의 힘으로는 일본과 연합한 백제의 공격을 막아낼 수 없었다.



내물왕은 할 수 없이 우호관계를 맺고 있던 고구려에 군사 보호를 요청했다. 고구려의 군사 보호의



대가로 나라가 멸망하는 위기를 넘겼지만 신라는 자주적인 발전을 상당한 기간동안 저지당해야 했다.



내물왕은 고구려로부터 지속적인 보호를 받기 위해 볼모를 보냈다. 따라서 내물왕 시기에 비록



고대국가체제를 정비했다고 하더라도, 대외적으로는 아직 강대국인 고구려에 의지하고



그들의 내정간섭을 받음으로써 완전한 자주국가로는 발전하지 못했다.















▣ 김태서 -

▣ 김항용 -

▣ 김재원 - 일가 종친님들과 함께 경주 여행을 하지못하는것이 아쉽습니다.

▣ 김재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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