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충사에 정조의 친필 어제시 걸기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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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작성일07-11-24 12:00 조회1,554회 댓글0건본문
*포충사에 있었던 정조대왕의 친필 어제시가 6.25동란으로 소실되었습니다.
그런데 현 포충사가 복원되고 난 뒤 아직도 이 어제시는 재제작되지 않았습니다.
1)2004. 11. 14. 안사연 참배시 확인.
2)2007. 11. 24. 재은 전부사공파회장님과의 전화 통화 확인
*이 어제시를 정조대왕의 친필 서책 등에서 집자하여 제작 게시하는 것은 어떤지 감히 제안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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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정조대왕이 1798년(정조22) 3월 19일 포충사에 걸게 한 어제시 관련 기록과 어제시입니다.
1. <조선왕조실록> 기록
정조 048 22/03/19(계미)
충무공 김응하에게 어제시를 내리다
충무공 김응하의 봉사손이 등제한 뒤에 상이 시를 지었는데 그 소서에,
"황조에서 요동백을 고증한 충무공 김응하가 심하의 전쟁에 참가한 지 1백80년째가 되는 모춘에, 장렬 황제의 휘신에 여러 충신 집 후손들과 대보단의 봉실에 지배를 하고 나서 먼저 명하여 선전관에게 충무공의 봉사손 김택기를 단천하도록 해서 당일에 선전관을 제수하였고, 또 명하여 무장인 충무공 이순신과 충숙공 조정익의 후손들에게 북영으로 가서 유엽전을 시험하게 하여 초시 합격을 내리고, 인하여 북원으로 가서는 친히 시험하여 사제하고, 특별히 무오 식년의 방에 붙이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일이 마칠 때를 기다림이 있은 듯하니, 어찌 옛일에 대한 슬픔을 이루 다 감당하랴. 만일 영령들이 앎이 있다면 반드시 흐르는 눈물을 금치 못할 것이다. 그래서 마침내 시 일절을 써서 철원의 포충사(褒忠祠)에 걸게 하는 바이다."
하였다. 그 시는 다음과 같다.
2. 어제시
男兒聲名聞四夷(남아성명문사이) : 남아의 높은 명성을 천하에 떨치니
遼東華誥海東姿(요동화고해동자) : 요동백 추증 중국 고명은 조선의 자랑이네
深河老柳如人立(심하노유여인립) : 심하의 늙은 버드나무가 사람처럼 서있나니
如是將軍倚劍時(여시장군의검시) : 이는 장군이 칼 기대고 서 있는 모습일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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