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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증왕 하면 생각나는 두가지 -두번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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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환 작성일02-06-05 18:48 조회1,86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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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에 보면 지증왕에 대한 매우 흥미스러운 기록이 있습니다.



역사는 역사일뿐 이니 조상에 대한 무례라 생각지 마시고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지증왕의 옥경은 1尺5寸(45cm)이나 되었다는데



요즘도 대부분의 남성이 남근 왜소증을 호소하며 비뇨기과를 찾아 남근 확대술을 받기도하고 목욕탕에 가서도 자신의 것보다 더 큰 사람을 보면 괜히 주눅이 들어 그 사람 주변에는 잘 가지도않고 그 사람은 의기양양하게 목욕탕을 활보하면서 물을 함부로 튀기기도 하지만 주변 사람들은 제대로 항의도 못한다.



이는 은연중에 남성의 심볼의 크기가 심리적인 영향을 끼쳐서 남성의 우월성을 나타내는 척도로 작용한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장대한 남근은 남자에게는 자신감의 표출이 되기도 하고 술자리에서 허세를 부리는 도구가 되기도 한다. 또한 얼마전 대만의 한 남성이 자신의 심볼로 자동차를 끌었다는 해외 토픽이 나와서 뭇 남성의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의학적으로는 남성의 크기는 부부 생활에 큰 지장이 없고 서로의 애정이 보다 중요하다는 정보를 내놓고 있지만 여전히 큰 남성을 선호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도 적당히 커야지 너무 크면 오히려 문제가 될 것이다. 너무 커서 배우자와의 조화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오히려 즐거워야할 부부 생활이 고통이 되어버릴 것이다. 이처럼 남성이 너무 비대해서 곤란을 겪은 한 왕이 있었으니 그는 바로 신라 22대 지증왕이었다.



그의 남성은 기록상 1척5촌이라하니 현재의 측정단위로 환산하면 무려 45cm나 된다. 그래서 지증왕 자신도 고민을 했었고 주위 사람들도 지증왕과 어울리는 배필을 찾느라 고생을 한 것 같다. 이에 관한 삼국유사의 기록을 살펴보자 제22대 지철로왕(지증왕)의 성은 김씨요 이름은 智大路(지대로) 또는 智度路(지도로)라고 하며 시호를 지증이라 하였으니 諡號(시호)는 이때서부터 시작되었다. 또 방언에 왕을 麻立干(마립간)이라 한 것도 이 王(왕)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王(왕)이 永元二年(영원2년) 庚辰(경신)에 즉위하니【혹은 辛巳(신사)라 하니 그러면 永元三年(영원3년)이다】왕의 陰長(음장)이 一尺五寸(1척5촌)이나 되어 배우를 얻기 어려워 사자를 삼도에 보내어 구하였다. 사자)가 牟梁部(모량부) 冬老樹(동로수) 아래에 이르러 본즉 개 두마리가 큰 북만한 똥 덩어리 두 끝을 물고 다투는지라 촌인에게 물으니 한 소녀가 말하기를 이곳 상공의 딸이 여기서 빨래를 하다가 수풀 속에 숨어서 눈 것이라 하였다.



그 집을 찾아가 보니 그 여자의 신장이 七尺五寸(7척5촌)이었다. 사실을 고하니 왕이 수레를 보내어 그 여자를 궁중에 맞아들여 황후를 삼으니 여러 신하가 모두 하례하였다. 라는 기록이 있다. 이렇게 해서 지증왕은 간신히 혼인에 성공하여 찬란한 신라의 왕실 계보를 잊게 되고 그 아들인 법흥왕은 삼국통일의 기틀을 만든 영민한 군주로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 두 부부의 결혼 생활은 행복하게 이어지게 된 것이다.











▣ 김태서 -

▣ 김발용 - 그 유전자는 지금 어디에 숨어 있나요

▣ 김항용 -

▣ 김재원 - 이번경주 답사에서 대부님께서 올리신 자료 지증왕에 대해선 많은 도움됬습니다. 이번에 답사할 태보공탄강지, 내물왕, 원성왕, 신무왕, 문성왕,미추왕, 대릉원, 오릉, 무열왕, 서악동고분군, 김인문묘, 김유신묘, 탈해왕릉, 안압지, 임해전. 반월성, 석빙고, 포석정, 선덕여왕, 신문왕. 경덕왕, 삼릉, 경애왕,서악동고분군등의 자료도 좀 올려 주시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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