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군지순례11(고창군)
페이지 정보
김윤만 작성일02-06-06 14:55 조회1,912회 댓글0건본문
고창군지(고창군지편찬위원회, 1992)
pp 103 취락중.
---안동김씨 : 갑촌10(공음), 대정28(공음), 선동19(공음), 용수26(공음), 칠암31(공
음), 지로13(해리), 도산10(고창), 매산10(고창), 내창15(고수).
pp 129 성씨중.
---안동김씨 : 공음면 선동. 칠암. 장곡. 신촌. 신평. 원동. 용수. 대정. 고창읍 도
산. 매산, 고수면 내창. 초내. 우평.
pp 142∼143. 안동김씨
---시조 : 평장사공(平章事公) 숙승(叔承). 상락군개국공(上洛君開國公) 방경(方慶
: 정난정국공신 도첨의중찬 판전리사사 도원수(定難靖國功臣 都僉議中贊 判典理
司事 都元帥))을 중조(中祖)로 하고 있다.
(주(註) : 上洛君開國公 → 上洛郡開國公의 오기임)
---입향조 : 을만(乙萬 : 자 이원(理源), 관 통례원통찬(通禮院通贊). 익원공 사형
(士衡 : 자 평보(平甫), 호 낙포(洛圃), 관 좌정승(左政丞))의 현손으로 세조 4년
(1458) 양평 양근에서 출생. 기묘사화 후 낙남하여 담양 남평에 잠시 우거했다가
성종 8년(1477) 공음면 칠암리 갑촌(甲村)으로 입향, 손자 질(質 : 자 문소(文素),
호 영모당(永慕堂))은 효자 정문이 섰고 도암사(道岩祠)에 주벽(主壁)으로 모셔
있다.
---후손 분포 : 고창읍 도산 매산, 고수면 내창 초내 우평, 공음면 칠암 장곡 신
촌 선동 신평 원동 용수 대정.
pp 311 몽고의 침입과 고창
---(전략) 고려가 몽고에 항복하여 개경으로 환도할 때, 즉 1270년에 항몽전의
주력부대였던 삼별초군은 배중손의 지휘하에 승화후(承化候) 온(溫)을 추대하고
반몽정권을 수립하였다. 그들은 강화에서 진도로 옮긴 다음, 여기를 근거한 남해
안 지방을 차지하고 국민들의 항몽의식을 고취하였다. 결국 4년만에 여.원 엽합군
에게 궤멸되었으나 한때 그 세력은 매우 왕성하여 남해의 거제. 창선. 남해. 제주
등 제도와 장흥. 합포. 김해. 동래 등 연안요지를 점령하고 전라도의 조운을 방해
하였다. 또 내지 깊숙이 진공하여 금성산성 싸움에서는 7주야 동안이나 관군과
공방전을 벌여 위력을 떨치고 일부는 전주를 공격하였다. 나주 싸움에서 전라도
토역사 신사전은 삼별초가 오기도 전에 도망치고 전주부사 이삼도 성을 버리고
도망하였다. 당시 지방 주(州). 군(郡). 현(縣) 중에는 진도정부를 인정하여 향응
영항(迎降)하는 곳도 있었는데 이때 나주인들은 전주인들과 행동을 같이 하고자
했다. 전주에서도 삼별초군에 항복할 것인가 망설이던 중 마침 김방경군(金方慶
軍)이 남하한다는 소식을 듣고 항복치 않았다고 한다.
pp 1262 김재종(金在鍾)
---자는 백은(伯應)이고 호는 회천(晦泉)이며 본관은 안동이니 개국공신 사형(士
衡)의 후손이다. 1880년(고종 17)에 고창 도산(道山)에서 출생하였고 1938년 졸했
다. 그는 숙부인 항재(恒齋) 김순묵(金純默)과 송사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학행이
들어났고 저서로 회천유고(晦泉遺稿) 4권 1책이 전한다.
pp 1265 김순묵(金純默)
---자는 덕문(德文) 호는 항재(恒齋)이며 본관은 안동이니 진사(進士) 양대(養大)
의 손자이다. 1866년(고종 3)에 고창 도산(道山)에서 출생하였고 1935년에 졸하였
다. 그는 면암의 문하에서 수학했고 노사 기정진의 문하에도 출입하여 학행이 있
었으며 문집 항재유고(恒齋遺稿)가 있다.
pp 1265 김정회(金正會)
---자는 중립(中立)이고 호는 보정(普亭) 또는 연연당(淵淵堂)이며 본관은 안동이
니 회천(晦泉) 재종(在鍾)의 아들이다. 1903년(광무 7)에 고창 도산(道山)에서 출
생하여 1970년에 졸했다. 그는 종조인 항재(恒齋) 문하에서 수학했고 해강(海崗)
김규진의 문하에서 서화(書畵)를 배워 모두 정통했다. 유고(遺稿)로 연연당문고
(淵淵堂文稿) 10권 1책이 전한다.
pp 1452 김정회(金正會)
---호는 보정(普亭) 또는 연연당(淵淵堂), 관향은 안동, 익원공 사형(士衡)의 후손
이고 회천(晦泉) 재종(在鍾)의 아들이다. 문학에 조예가 깊고 시.서.화(詩.書.畵)에
능해 삼절(三絶)이라 일컫기도 했다. 유저(遺著)로 《연연당문고(淵淵堂文稿)》(양
장 1책)가 간행되어 전하고 사림들이 추모비(追慕碑)와 제명비(題名碑)를 고창 도
산(道山)에 세웠다.
〈금봉문찬 행장(金鳳文撰 行狀)〉《연연당집(淵淵堂集)》《호남인물지》
pp 1370 김정회(金正會)의 생가(生家)
---고창읍 도산리에 있는 김정회의 생가는 현재 6동(棟)의 고건물로서 안채, 사
랑채, 행랑채 및 사당과 2동(棟)의 곳간으로 되어 있다.
---안채는 잡석으로 쌓아올린 축대(築臺 높이 약 100㎝) 위에 세워져 있는데 정
면 6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후에 동.서쪽에 각각 1칸씩을 덧붙였다.
주초(柱礎)는 자연석을 이용한 덤벙주초이고 기둥은 방형과 두리기둥이 섞여 있
으며 처마는 홑처마이다.
---사랑채는 안채의 앞에 있는데 정면 4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동쪽
끝에 안문을 달아 내었다. 축대(築臺)는 흙으로 쌓였는데 높이는 약 20㎝이다.
---행랑채는 사랑채의 동편에 있는데 정면 5칸, 측면 2칸의 맛배지붕 건물이다.
주초는 덤벙주초이고 기둥은 방형이며, 처마는 홑처마이다. 행랑채의 건물연대는
안채나 사랑채에 비해 훨씬 뒤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사당은 안채의 뒤에 있는데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맛배지붕이다. 축대의 높이
는 약 250㎝ 정도이다. 뒤에는 대나무 숲이 울창하게 우거져 있다.
---곳간채 2동(棟)은 안채의 동쪽과 서쪽에 있다. 동쪽에 있는 곳간은 정면 6칸,
측면 2칸, 서쪽에 있는 곳간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맛배지붕 건물로 주초는 덤
범주초이고 기둥은 방형이며, 처마는 홑처마이다.
---보정(普亭) 김정회(金正會)는 이 고장의 석학이요 예술인(藝術人)이다. 송사
(松沙) 기우만(奇于萬)에게서 한학을 배우고 해강(海崗) 김규진에게서 서화(書畵)
를 배워 특히 란(蘭)과 죽(竹)은 일품(一品)으로 친다.
pp 1443 김경철(金景哲)
---자는 윤보(允保), 호는 청송당(聽松堂), 본관은 안동이니 진사 질(質)의 증손이
다. 1575년(선조 8) 공음면 개가리 출생. 부모의 상사에 6년을 여묘(廬墓)하고 복
을 벗은 뒤에는 벼슬에 뜻을 두지 아니하고 학문에 전념하여 효(孝)로 남원교수
에 제수했으나 나아가지 아니하고 또 복호(復戶 : 호세(戶稅)와 부역 면제)를 내
렸으나 받지 않았다. 선조 정유재란(丁酉再亂)에 인근 선비와 함께 영광성(靈光
城)을 지키고, 이괄의 난에 신유일 등과 함께 창의하여 군량을 모집하다가 난이
평정되자 양곡을 관아에 바쳤다. 도암사(道巖祠)에 배향되었다.
《호남절의록(湖南節義錄)》《신재집( 齋集)》《호남인물지》
pp 1451 김익철(金益哲)
---자는 우보(友輔), 호는 현무재(賢武齋), 본관은 안동이니 진사 질(質)의 증손이
요 은송당(隱松堂 : 註 - 위의 청송당과 어느 것이 바른 것인지 확인을 요함. 확인
결과 은송당이 바른 것임) 경철의 아우이다. 1595년(선조 28) 공음면 개가리 출생.
나이 18세에 무과에 올라 봉사(奉事)가 되었는데 임진왜란에 어가(御駕)가 의주로
파천할 때 지존(至尊)을 모시고 80리를 달려 신이 벗겨져 피가 흐르는 줄도 몰랐고,
정유재란에도 창의하여 공적이 많았으므로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책록
되고 주부(主簿)를 제수했으나 부모 봉양을 위해 귀향했다.
도암사(道巖祠)에 배향되었다.
《여지도서(與地圖書)》《호남절의록(湖南節義錄)》《호남인물지》
pp 1452 김질(金質)
---자는 문소(文素), 호는 영모당(永慕堂), 본관은 안동이니 상락백(上洛伯) 사형
(士衡)의 5대손이요 통례원통찬(通禮院通贊) 복중(福重)의 아들이다. 1496년(연산
2)공음면 개가리 출생. 효성이 지극하여 어머니의 등창을 빨아 낫게 하고, 아버지
의 상사에 흙을 져다가 성분(成墳)하고 여묘(廬墓)했는데 어느날 제사지내는 간장
그릇에 쥐가 빠지매 공이 그 그릇을 안고 통곡하니 근처의 쥐가 모두 와서 그릇
밑에서 죽었고, 아버지가 꿩고기를 좋아하여 젯상에 반드시 꿩고기를 올리는데
한번은 눈이 많이 내려 저자(안산시장)에 갈 수 없으매 불효를 한탄하니 꿩이 부
엌으로 날아 들었다.
---어머니의 상사에 여묘와 집의 거리가 들 하나 사이임에도 한번도 집에 온 일
이 없었고 부인과 여비(女婢)도 가까이 오지 못하게 했는데 부인 김씨가 긴히 알
릴 일이 았어 여비를 보내매 공이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고 부인이 직접 나아갔
으나 더욱 깊이 숨어 만나지 못했다. 어느 날 밤 눈이 많이 내렸는데 그 묘 주위
에는 눈이 내리지 않았으므로 지방 사람들이 그 산을 제청산(祭廳山)이라 이름하
였다.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가 그 집에 영모당(永慕堂)이라 현판하고 미암(眉
巖) 유희춘(柳希春)이 평소 공의 효를 사모하던 중 무장현감으로 오게 되어 자주
상종하며 글을 지어 벽에 걸어 주었고,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 송천(松川) 양
응정(梁應鼎)이 모두 공의 효에 감복했다.
---이 때 명(明)나라에서 우리나라 제일의 행의를 알리라 하여 전라도 안찰사 민
성휘(閔聖徽)에 의해 공의 효가 추천되어 1546년(명종 1) 명나라로부터 정려(旌
閭)가 내려 공음면 칠암(七岩)에 「효자 진사 김질지려(孝子 進士 金質之閭)」가
서고, 1613년(광해 5) 그곳에 도암사(道巖祠)를 일으켜 주벽(主壁)으로 향사한다.
저술로는 영모록(永慕錄)과 육사자책설(六事自責設)이 전한다.
《여지도서(與地圖書)》《호남인물지》(2002. 6. 6)
▣ 김발용 - 감사합니다.
▣ 김태서 - 감사합니다.
▣ 김항용 -
▣ 김영환 -
▣ 김주회 - 재종, 순묵 님은 처음 접하는 자료입니다. 감사합니다. 요즈음 윤만 형님의 대한민국 시군지 순례에 제 눈이 행복합니다. 감사합니다.
▣ 郡/김태영 - 감사합니다.
pp 103 취락중.
---안동김씨 : 갑촌10(공음), 대정28(공음), 선동19(공음), 용수26(공음), 칠암31(공
음), 지로13(해리), 도산10(고창), 매산10(고창), 내창15(고수).
pp 129 성씨중.
---안동김씨 : 공음면 선동. 칠암. 장곡. 신촌. 신평. 원동. 용수. 대정. 고창읍 도
산. 매산, 고수면 내창. 초내. 우평.
pp 142∼143. 안동김씨
---시조 : 평장사공(平章事公) 숙승(叔承). 상락군개국공(上洛君開國公) 방경(方慶
: 정난정국공신 도첨의중찬 판전리사사 도원수(定難靖國功臣 都僉議中贊 判典理
司事 都元帥))을 중조(中祖)로 하고 있다.
(주(註) : 上洛君開國公 → 上洛郡開國公의 오기임)
---입향조 : 을만(乙萬 : 자 이원(理源), 관 통례원통찬(通禮院通贊). 익원공 사형
(士衡 : 자 평보(平甫), 호 낙포(洛圃), 관 좌정승(左政丞))의 현손으로 세조 4년
(1458) 양평 양근에서 출생. 기묘사화 후 낙남하여 담양 남평에 잠시 우거했다가
성종 8년(1477) 공음면 칠암리 갑촌(甲村)으로 입향, 손자 질(質 : 자 문소(文素),
호 영모당(永慕堂))은 효자 정문이 섰고 도암사(道岩祠)에 주벽(主壁)으로 모셔
있다.
---후손 분포 : 고창읍 도산 매산, 고수면 내창 초내 우평, 공음면 칠암 장곡 신
촌 선동 신평 원동 용수 대정.
pp 311 몽고의 침입과 고창
---(전략) 고려가 몽고에 항복하여 개경으로 환도할 때, 즉 1270년에 항몽전의
주력부대였던 삼별초군은 배중손의 지휘하에 승화후(承化候) 온(溫)을 추대하고
반몽정권을 수립하였다. 그들은 강화에서 진도로 옮긴 다음, 여기를 근거한 남해
안 지방을 차지하고 국민들의 항몽의식을 고취하였다. 결국 4년만에 여.원 엽합군
에게 궤멸되었으나 한때 그 세력은 매우 왕성하여 남해의 거제. 창선. 남해. 제주
등 제도와 장흥. 합포. 김해. 동래 등 연안요지를 점령하고 전라도의 조운을 방해
하였다. 또 내지 깊숙이 진공하여 금성산성 싸움에서는 7주야 동안이나 관군과
공방전을 벌여 위력을 떨치고 일부는 전주를 공격하였다. 나주 싸움에서 전라도
토역사 신사전은 삼별초가 오기도 전에 도망치고 전주부사 이삼도 성을 버리고
도망하였다. 당시 지방 주(州). 군(郡). 현(縣) 중에는 진도정부를 인정하여 향응
영항(迎降)하는 곳도 있었는데 이때 나주인들은 전주인들과 행동을 같이 하고자
했다. 전주에서도 삼별초군에 항복할 것인가 망설이던 중 마침 김방경군(金方慶
軍)이 남하한다는 소식을 듣고 항복치 않았다고 한다.
pp 1262 김재종(金在鍾)
---자는 백은(伯應)이고 호는 회천(晦泉)이며 본관은 안동이니 개국공신 사형(士
衡)의 후손이다. 1880년(고종 17)에 고창 도산(道山)에서 출생하였고 1938년 졸했
다. 그는 숙부인 항재(恒齋) 김순묵(金純默)과 송사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학행이
들어났고 저서로 회천유고(晦泉遺稿) 4권 1책이 전한다.
pp 1265 김순묵(金純默)
---자는 덕문(德文) 호는 항재(恒齋)이며 본관은 안동이니 진사(進士) 양대(養大)
의 손자이다. 1866년(고종 3)에 고창 도산(道山)에서 출생하였고 1935년에 졸하였
다. 그는 면암의 문하에서 수학했고 노사 기정진의 문하에도 출입하여 학행이 있
었으며 문집 항재유고(恒齋遺稿)가 있다.
pp 1265 김정회(金正會)
---자는 중립(中立)이고 호는 보정(普亭) 또는 연연당(淵淵堂)이며 본관은 안동이
니 회천(晦泉) 재종(在鍾)의 아들이다. 1903년(광무 7)에 고창 도산(道山)에서 출
생하여 1970년에 졸했다. 그는 종조인 항재(恒齋) 문하에서 수학했고 해강(海崗)
김규진의 문하에서 서화(書畵)를 배워 모두 정통했다. 유고(遺稿)로 연연당문고
(淵淵堂文稿) 10권 1책이 전한다.
pp 1452 김정회(金正會)
---호는 보정(普亭) 또는 연연당(淵淵堂), 관향은 안동, 익원공 사형(士衡)의 후손
이고 회천(晦泉) 재종(在鍾)의 아들이다. 문학에 조예가 깊고 시.서.화(詩.書.畵)에
능해 삼절(三絶)이라 일컫기도 했다. 유저(遺著)로 《연연당문고(淵淵堂文稿)》(양
장 1책)가 간행되어 전하고 사림들이 추모비(追慕碑)와 제명비(題名碑)를 고창 도
산(道山)에 세웠다.
〈금봉문찬 행장(金鳳文撰 行狀)〉《연연당집(淵淵堂集)》《호남인물지》
pp 1370 김정회(金正會)의 생가(生家)
---고창읍 도산리에 있는 김정회의 생가는 현재 6동(棟)의 고건물로서 안채, 사
랑채, 행랑채 및 사당과 2동(棟)의 곳간으로 되어 있다.
---안채는 잡석으로 쌓아올린 축대(築臺 높이 약 100㎝) 위에 세워져 있는데 정
면 6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후에 동.서쪽에 각각 1칸씩을 덧붙였다.
주초(柱礎)는 자연석을 이용한 덤벙주초이고 기둥은 방형과 두리기둥이 섞여 있
으며 처마는 홑처마이다.
---사랑채는 안채의 앞에 있는데 정면 4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동쪽
끝에 안문을 달아 내었다. 축대(築臺)는 흙으로 쌓였는데 높이는 약 20㎝이다.
---행랑채는 사랑채의 동편에 있는데 정면 5칸, 측면 2칸의 맛배지붕 건물이다.
주초는 덤벙주초이고 기둥은 방형이며, 처마는 홑처마이다. 행랑채의 건물연대는
안채나 사랑채에 비해 훨씬 뒤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사당은 안채의 뒤에 있는데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맛배지붕이다. 축대의 높이
는 약 250㎝ 정도이다. 뒤에는 대나무 숲이 울창하게 우거져 있다.
---곳간채 2동(棟)은 안채의 동쪽과 서쪽에 있다. 동쪽에 있는 곳간은 정면 6칸,
측면 2칸, 서쪽에 있는 곳간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맛배지붕 건물로 주초는 덤
범주초이고 기둥은 방형이며, 처마는 홑처마이다.
---보정(普亭) 김정회(金正會)는 이 고장의 석학이요 예술인(藝術人)이다. 송사
(松沙) 기우만(奇于萬)에게서 한학을 배우고 해강(海崗) 김규진에게서 서화(書畵)
를 배워 특히 란(蘭)과 죽(竹)은 일품(一品)으로 친다.
pp 1443 김경철(金景哲)
---자는 윤보(允保), 호는 청송당(聽松堂), 본관은 안동이니 진사 질(質)의 증손이
다. 1575년(선조 8) 공음면 개가리 출생. 부모의 상사에 6년을 여묘(廬墓)하고 복
을 벗은 뒤에는 벼슬에 뜻을 두지 아니하고 학문에 전념하여 효(孝)로 남원교수
에 제수했으나 나아가지 아니하고 또 복호(復戶 : 호세(戶稅)와 부역 면제)를 내
렸으나 받지 않았다. 선조 정유재란(丁酉再亂)에 인근 선비와 함께 영광성(靈光
城)을 지키고, 이괄의 난에 신유일 등과 함께 창의하여 군량을 모집하다가 난이
평정되자 양곡을 관아에 바쳤다. 도암사(道巖祠)에 배향되었다.
《호남절의록(湖南節義錄)》《신재집( 齋集)》《호남인물지》
pp 1451 김익철(金益哲)
---자는 우보(友輔), 호는 현무재(賢武齋), 본관은 안동이니 진사 질(質)의 증손이
요 은송당(隱松堂 : 註 - 위의 청송당과 어느 것이 바른 것인지 확인을 요함. 확인
결과 은송당이 바른 것임) 경철의 아우이다. 1595년(선조 28) 공음면 개가리 출생.
나이 18세에 무과에 올라 봉사(奉事)가 되었는데 임진왜란에 어가(御駕)가 의주로
파천할 때 지존(至尊)을 모시고 80리를 달려 신이 벗겨져 피가 흐르는 줄도 몰랐고,
정유재란에도 창의하여 공적이 많았으므로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책록
되고 주부(主簿)를 제수했으나 부모 봉양을 위해 귀향했다.
도암사(道巖祠)에 배향되었다.
《여지도서(與地圖書)》《호남절의록(湖南節義錄)》《호남인물지》
pp 1452 김질(金質)
---자는 문소(文素), 호는 영모당(永慕堂), 본관은 안동이니 상락백(上洛伯) 사형
(士衡)의 5대손이요 통례원통찬(通禮院通贊) 복중(福重)의 아들이다. 1496년(연산
2)공음면 개가리 출생. 효성이 지극하여 어머니의 등창을 빨아 낫게 하고, 아버지
의 상사에 흙을 져다가 성분(成墳)하고 여묘(廬墓)했는데 어느날 제사지내는 간장
그릇에 쥐가 빠지매 공이 그 그릇을 안고 통곡하니 근처의 쥐가 모두 와서 그릇
밑에서 죽었고, 아버지가 꿩고기를 좋아하여 젯상에 반드시 꿩고기를 올리는데
한번은 눈이 많이 내려 저자(안산시장)에 갈 수 없으매 불효를 한탄하니 꿩이 부
엌으로 날아 들었다.
---어머니의 상사에 여묘와 집의 거리가 들 하나 사이임에도 한번도 집에 온 일
이 없었고 부인과 여비(女婢)도 가까이 오지 못하게 했는데 부인 김씨가 긴히 알
릴 일이 았어 여비를 보내매 공이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고 부인이 직접 나아갔
으나 더욱 깊이 숨어 만나지 못했다. 어느 날 밤 눈이 많이 내렸는데 그 묘 주위
에는 눈이 내리지 않았으므로 지방 사람들이 그 산을 제청산(祭廳山)이라 이름하
였다.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가 그 집에 영모당(永慕堂)이라 현판하고 미암(眉
巖) 유희춘(柳希春)이 평소 공의 효를 사모하던 중 무장현감으로 오게 되어 자주
상종하며 글을 지어 벽에 걸어 주었고,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 송천(松川) 양
응정(梁應鼎)이 모두 공의 효에 감복했다.
---이 때 명(明)나라에서 우리나라 제일의 행의를 알리라 하여 전라도 안찰사 민
성휘(閔聖徽)에 의해 공의 효가 추천되어 1546년(명종 1) 명나라로부터 정려(旌
閭)가 내려 공음면 칠암(七岩)에 「효자 진사 김질지려(孝子 進士 金質之閭)」가
서고, 1613년(광해 5) 그곳에 도암사(道巖祠)를 일으켜 주벽(主壁)으로 향사한다.
저술로는 영모록(永慕錄)과 육사자책설(六事自責設)이 전한다.
《여지도서(與地圖書)》《호남인물지》(2002. 6. 6)
▣ 김발용 - 감사합니다.
▣ 김태서 - 감사합니다.
▣ 김항용 -
▣ 김영환 -
▣ 김주회 - 재종, 순묵 님은 처음 접하는 자료입니다. 감사합니다. 요즈음 윤만 형님의 대한민국 시군지 순례에 제 눈이 행복합니다. 감사합니다.
▣ 郡/김태영 - 감사합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